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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중 Jun 28. 2021

간헐적 단전

"아~아~, 관리사무소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파트 발전기 정비를 위해 금일 10시부터 단전될 예정이오니 각 세대께서는..."  

아니  단전인 거야, 정전인 거야? 주말을 집에서 느긋하게  보내려 했는데 왜 하필이면 토요일 아침부터 전기를 끊는단 말인가.

과연 예정된 시간이 되자 보고 있던 TV도 툭~  꺼져버리고, 공유기 와이파이가 먹통이 되더니 인터넷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갑작스러운 블랙아웃이 불청객처럼 당황스럽기만 한데 그동안 디지털 라이프에 길들여진 탓인지 전기 없는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별 수 없이 노트북을 챙겨 동네 카페에 자리를 잡았지만 뒤늦게 확인한 휴대폰 배터리가 한 칸 밖에 남지 않았다.나올 때 투덜대느라 충전기를 깜박했더니 간당간당한 휴대폰이 영 불안하다. 충전기 가지러 다시 집으로 갈 수 밖에. 엘리베이터 없이 아파트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했더니 도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소파에 잠시 눕는다는게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어느새  사위가 어둑해지고 그새 전기가 들어왔는지 벽에 걸린 디지털 시계의 숫자판이 깜빡깜빡거린다. 새로 시간을 맞추어야 해서 번거롭긴 하지만  오랜만의 낮잠이 꿀잠이었는지 기분은 아까와는 달리 긍정 모드로 바뀌었다. '마침 잘 됐네, 5분 빨라서 어차피 고쳐야 했는데...'     

문득, 현재 시각으로 세팅을 하던 손을 멈추고 잠시 생각해본다. 어쩌면 지금 리셋이 필요한 것은 이 시계가 아니라 내가 아닐까?   


돌아보면 내 인생의 시계도 항상 5분이 앞당겨져 있었다. 앞서 나가지는 못하더라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미리 준비라도 해야 했으니까. 덕분에 그동안 아무 탈 없이 '재깍재깍' 잘 돌아가는 중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내부에서부터  펑~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과유불급. 많은 목표와 억지스런 인간관계 그리고 과도한 정보들이 끊임없이 인풋 되다 보니 전력 공급량이 한정량을 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쳇바퀴 속에서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부표처럼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면서도 그럭저럭 잘 버텨왔다고 위안 삼았는데 되돌아보니 떠나온 육지는 아득하고 바다는 막막하기만 하다. 


낮잠 자는 사이 충전 걸어 놓았던 휴대폰을 바라보니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인생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도 밤사이 걸려올 전화와 기상 알람을 위해 휴대폰을 항상 켜 두었는데 오늘처럼 완전 방전이 되어서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다니, 왠지 녀석에게 미안하다. '너도 주인 잘 못 만나 고생이구나'

힘들고 지치면 잠시 쉬었다 재충전 하면 괜찮아질 거라는 조언은 이제  신뢰하지 않는다. 갈수록 촘촘하게 짜여지는 관계망 속에서 단순한 충전만으로는 개인이 원하는 삶은 요원해 보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관계 회로속에서 방전되면 충전하고 다시 방전되면 충전하는 방식으로는 결국 부품의 수명만을 무의미하게 연장할 뿐이라는 회의감마저 든다.

삐~삐 ~ 비상벨이 울리면 공급 전원을 우선 차단하는 것처럼  이상 시그널이 발견되면 관계회로를 구성하는

일과 사람 모두 차단할 필요가 있다. 일단 끊어야 이단으로 나갈 수 있다. 10년 된 아파트도 재정비를 위해 단전 계획을 수립하고, 먹기 위해 사는 들짐승도 때가 되면 금식을 하는데 100년을 살아야 하는 인간이야말로 간헐적인 단전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선 전기를 매개로 나와 연결되는 것부터 절연하기로 한다. TV, 인터넷 뉴스, 아이패드 부터 시작해서 전자렌지로 돌려먹는 냉동음식이나 전기포트를 사용하는 컵라면도 끊어야 한다. 습관이 되기 위해서는 아예 전기코드를 뽑아 놓을 필요도 있다. 이메일을 통한 무리한 일은 하지 않고 사람과의 연락도 카톡 대신 전화를 이용하기로 한다. 전화선은 전기는 아니니까    

SNS 줄이기로 시작해서 차츰 타인과의 관계 회로가 아닌 자기 회로를 위한 자발적 단전을 거쳐야만 완전한 자가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2보 발전을 위한  -1보의 단전은 외부로부터의 갑작스런 정전 상황에서도 작은 촛불이 되어 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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