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타닥 vs 사각사각 (feat)
'창밖은 5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에도 아까운 순간
라일락 향기 짙어 가는데 너는 아직 모르나 보다 잎사귀 모양이 심장인 것을...(중략)'
피천득 선생이 입시 준비에 힘들어하는 딸을 위해 안쓰러운 마음으로 쓴 시라고 한다.
우리 딸도 창밖은 5월인데 모평을 준비하고 있다. 눈부신 청춘의 아까운 순간에 종합반 학원에서
신입생들이 캠퍼스에서 삼삼오오 지날 때마다, 예쁜 카페나 꽃밭에서 셀카 찍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집 아이도 저 무리 안에서 까르르 웃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딸은 작년 수능이 끝나고 오랜 동면의 시간을 갖더니 올해 초 방을 박차고 나와 재수를 선언하였다. 부모의 마음이 다 똑같겠지만, 나 또한 딸이 고생길에 들어서는 것 보다는 자기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은 것 실컷 하고 살기를 바랐다.그러나 본인이 꼭 재수하겠다는데야 말릴 도리가 없다.
재수생의 일상은 옆에서 보기에도 고되 보인다. 나보다 일찍 등원하고 늦게서야 집에 오는 딸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누래지기만 하다. 소화가 안돼 아침 먹는 것도 부담이라더니 요즘은 꾸역꾸역 숟가락을 뜬다. 언젠가 밥을 안 먹었더니 조용한 학원 자습실에 꼬르륵 소리가 울려 너무 창피했기 때문이라나
5월의 마지막 날, 딸의 생일이어서 모처럼 학원까지 태워다 주기로 한다. 차에서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정작 당사자는 친구들로부터 온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바쁘다. '누구는 어젯밤부터 미리 축하를 해주었는데 누구는 아직도 문자를 안 보내고 있다'는 둥, '아무개는 문자를 길게 보냈는데 아무개는 이모티콘 달랑 하나 보냈다'는 둥, 텍스트 하나 하나에 일일이 품평 중이다.
"그래도 바쁜 친구들이 아침 일찍 문자 보내 준 게 어디니?"
" 헹~ 아닐걸. 이것들 학교 가는 지하철에서 휴대폰 보다가 시간 남으니까 문자 보냈을 거야 " 라며 독심술로 행동심리까지 분석을 한다.하지만 툴툴거리면서도 싫지는 않은 표정이다. 떨어져 있는 친구들로부터 혹시나 자신의 존재가 잊혀질까 걱정했다가 이제 조금 안도한 걸까
그러다 한 친구에게서 '미안해~ 내가 1 빠로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전공시험 때문에 늦어서 미안"이라며 도착한 메시지를 읽어주며 연신 부러워 죽겠다고 한다. 도대체 뭐가 부럽다는 거지?
"아~ 나는 낼모레 6월 모평 시험 보는데 누구는 전공시험이라잖아, 전 공 시 험! "며 마지막 네 글자를 힘 주어 말한다. 마치 전공시험이야말로 대학생이 누리는 특권이라도 되는 양
참나. 세상 부러워할 게 없어서 남의 시험을 부러워하다니...
한번 봇물 터진 딸의 방언은 계속 이어진다. " 아빠, 이번 주에 우리 반에 반수생이 새로 왔는데 은근 자기는 대학생이고 티를 내는 거 있지" 이유는 자습시간에 기존 재수생들은 연습장에 사각사각 문제를 푸는데 그 반수생은 노트북으로 타닥타닥 소리를 내기 때문이란다.
사각사각 VS 타닥타닥, 그런데 타닥타닥이 뭐 어때서? 라고 물으니 " 학원 수업시간엔 수능 공부하다가, 자습시간엔 노트북으로 대학교 팀플 과제 하는 거잖아" 다른 학생들이 그 반수생의 양다리를 거슬려 한다고 한다. 에구 별걸 다 신경쓴다.
그렇게 딸의 불평불만 가득한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니 어느새 학원에 다다르게 되었다. 작년 고3 때는 병든 병아리 마냥 축 쳐저 있었는데 올해는 싸움닭이 다 되어버린 것 같다. 좋게 해석하면 건강한 생존 욕구, 생존 본능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지금의 의기소침, 질투와 시기는 내년에 대학 가면 자동으로 나을 수 있는 병일 것이다. 이 또한 인생의 한 순간을 거치는 작은 성장통이겠지만 심하지 않게 잘만 활용하면 좋은 추동력이 될 지도 모르겠다.
차에서 내리는 딸에게 재수 선택한 거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반 예비역이 자기소개 시간에 '두 번 후회하지 않으려고 다시 시작했다'라는 말은 인상에 남는다고 한다.
그래 그거면 됐다. 공부가 별거냐, 다른 사람에게서 인생 배우는 게, 그게 진짜 공부지
딸아~
올해까지만 미적분 풀고 내년 5월에는 네가 부러워 하는 전공시험 보자꾸나
그때까지만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