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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중 Jul 30. 2021

명량 납량특집극

(주의 : 예전 포스트한 것을 각색하여 상황설정함. 중복 오해 없으시길...)


더위도 잊을 겸 지난 겨울 경험한 기이한 목격담을 들려주도록 함세. 자네도 기억하다시피 작년 연말은 유난히도 폭설이 잦았지. 그날도 눈이 많이 왔었을 거야 아마. 새벽 2시, 늦은 야식  탓에 속이 불편하고 잠도 오질 않아 아파트 단지를 걸을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네. 매서운 눈은 그쳤지만 여전히 바람이 차갑게 불어 사위는 개미 새끼 조차 보이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지   

그런데 인적 드문 단지 공원 저 멀리서 뭔가 움직이는 듯한 검은 실루엣을 발견하였다네.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보니 이리 휘청, 저리 휘청, 갈지자 행보를 이어가면서도 쉬이 쓰러지지 않고 스르르~ 나아가는 모습이 마치 공중부양을 하는 것만 같았네. '저게 뭐야?'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곧 환한 가로등 밑에서 드러난 그 정체는 중년의 한 취객이었다네 


고주망태. 이 시간까지 무슨 술을 그리 마셨는지 나오지도 않는 오바이트를 하려 기둥을 붙잡고 고군분투를 벌이는 그를 보니 '귀신은 뭐하나 저런 술 귀신 안 잡아가고' 눈살이 찌푸려지더군. 하지만 무지로 인한 공포의 대상이 확인되니 이내 얹잖았던 마음은 안도와 함께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바뀌었다네. '쯧쯧, 회사 상사 뒤치다꺼리하다 못 먹는 술을 억지로 마셨나보군'


다가서서 도와주고 싶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섣불리 선의를 베풀었다가 오히려 퍽치기로 오해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니 어설픈 동정은 그만두기로 하고 그를 뒤로한 채 발길을 돌렸다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아파트 단지 안을 돌고 있는데, 갑자기 112동 필로피 안에서 인사불성이었던 그  사나이가 툭 튀어나오지 뭔가


헉.. 너무 놀란 나머지 정말로 안 밴 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네. 아니, 어떻게 여기에? 시간상으로는 이미 자기집에 있어야 할 그가 휘적휘적 걸으며, 나를 향해 다가오다니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미리 자네에게 말해두면 여기는 세대가 많은 대단지라 아까 그를 본 공원과 지금 한참을 걸어온 이곳은 물리적으로 가능한 시간거리가 아니라네. 그런데 어떻게 여고괴담급  순간이동이 가능했던걸까?  말 그대로 신출귀몰이라 생각하니 더욱 오싹했지. 햄릿에 나오는 한밤중에 성벽위를 부유하는 부왕의 유령처럼. 


그러나 논리적으로 도출한 결론은 이렇다네. 내가 빠른 걸음으로 단지의 가장자리를 따라 원형으로 넓게 도는 동안, 방향감각을 상실한 그는 자기 아파트를 찾아 동과 동 사이의 필로티를 통과하다 다시 나와 조우한 것이 아닐까하는 추론일세. 


그나저나 아직도 집을 못 찾았다면  이 양반, 그냥 포기하고 전화 걸어 데리러 오라는 게 차라리 빠르지 않을까. 하긴 그 정도의  사고회로가 작동한다면 이 아파트 단지의 회로를 실험용 쥐 마냥 뱅뱅 돌고 있진 않겠지.과연 폭음이 얼마나 큰 죄인지는 모르겠으나, 미노타우루스처럼  미로 속을 계속 헤매야 할 형벌이라면 너무 가혹한 것 같아  "저기 아저씨, 댁이 몇 동이세요? "하고 물었다네


그러나 다른 존재는 시야에 없는 듯, 그는 대꾸도 없이 긴 외투 자락을 휘날리며  예의 공중부양 보법으로 내 곁을 스쳐갈 뿐이었다네. 하지만 그가 지나치는 순간, 뭔가를 구시렁 대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네. "에이쒸, 도대체 어디 숨은 거야"  그것은 집을 잃어버린 자의 원망 섞인 저주였다네


그 후로도 우리는 두어번을 더 마주쳤지. 여전히 아파트 단지를 배회하는 뒷모습을 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그 옛날 마르크스라는 친구가 썼다던 어느 선언문의 첫 문장이 오버랩되었다네  (이 상황에 부적절한 인용을 부디 용서하시길)


- 하나의 유령이 단지 안을 배회하고 있다. 취객이라는 유령이.....


다음날 아침, '무정한 인심, 술 취해 버려진 채 동사 당해...' 따위의 지역신문 헤드라인이 상상되어 가로등의 오바이트와 그를 목격했던 단지 안을 다시 한번 샅샅이 살펴보았다네. 그런데 놀랍게도 지난밤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지 뭔가. 마치 새하얀 눈속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네. 도대체 그 취객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부디 자네의 고견을 부탁하네....미궁에 빠진 친구로부터 


친애하는 왓슨 군. 편지는 잘 보았네. 하지만 자네가 한 가지 간과한것이 있군. 한국 남성의 귀소본능 말일세. 그는 다음날 평상시처럼 출근했을 테니 걱정 안해도 될걸세 . 그러니 잊지 말게 왓슨, 그 아저씨들은 강하.. 아니 아주 독하다는걸                                                                       오랜 벗 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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