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때아닌 소나기처럼 불쑥 날아든 문자 한 통에 그만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흔들리는 지하철의 손잡이를 잡고 몸을 지탱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스쳐가는 레일을 바라보며 고향의 오래된 심상을 기억해내려 애를 써보았다.하루 두 번 운행하던 시커먼 화물열차와 철로 사이 점점이 널려있던 고추더미. 그리고 기다란 장대에 나부끼던 하얀 빨래들….
그러나 이내 기억 속 색색의 이미지들은 창가에 비친 도시의 네온사인이 빗물에 번지듯 뒤섞이고 희미해져 버렸다. 그런데 모든것이 침잠하는 내 깊은 곳 어딘가에서 잊은줄 알았던 기억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날, 눈쌓인 철길의 풍경만이...
구산시 철암동은 일제 말에 신문용지를 구산항에 실어 나르기 위해 개설한 사철(私鐵) 주위로 해방 이후 실향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형성되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하꼬방 몇 채에 불과하던 것이 80년대 들어 월하동에서 달동네 주민들이 이주해 오면서 함석집들로 빽빽이 채워지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폭 1m의 철로를 사이에 두고 좌우 철길을 따라 마주 보고 서있는 우리 마을을 철길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양철로 때운 현관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 나오는 쪽방 구조가 대부분이어서 한 여름이면 건너편 집 부엌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자연히 사람들은 앞집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 오늘은 무슨 반찬을 먹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장돌뱅이 40년에 안 가본 곳 없다던 곽 씨 노인은 “조선 팔도에 요로코롬 엎어지면 코 닿는 이웃사촌이 워디있당가" 말하곤 했다. 월하동에서 쫓겨 온 사람들도 "달동네도 윗집 아랫집 층하가 있지만 여긴 위아래 없이 콩한쪽도 나눠먹는당께" 라며 입을 모았다.
20호가 넘는 마을이 한집처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미덕을 아버지는 마을의 자랑으로 여겼다. 3대째 토박이인 아버지는 마을 이장으로서 네 집 내 집 구분 없이 동네 대소사를 챙겼고 마을 사람들도 그런 아버지를 믿고 따르며 철길마을을 만들어갔다. 어른들은 한가위나 대보름이면 철로 사이에 널따란 자리를 깔아 윷을 놀았고, 아이들은 철로 위에서 술래잡기나 다방구를 하며 놀았다. 해가 지면 엄마들은 철길을 향해 자기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처음 소희를 만난 곳도 철길이었다. 중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얘~”하고 불렀다. 돌아보니 한 여학생이 말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서있었다. “네가 바로 이장집 아들이구나, 따라오는 내내 누군가 했다” 그 아이는 싱긋 웃고는 앞집으로 이내 들어가 버렸다. 그날 저녁 어머니로부터 앞집에 새로 이사 온 모녀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딱하게도 서방 없이 딸 하나 키우느라 고생 무지 했습디다. 우리가 먼저 챙겨줘야 쓰것소" 어머니는 아버지는 물론 나에게도 당부했다. " 가시내가 얼굴은 야무저보이드만 다리가 해필 소아마비란다. 헝께 니도 잘해줘야 쓴다"
그로부터 3년 내내 소희의 가방을 들고 통학했다. 그녀는 목발을 짚고 철길을 걸으며 ‘소희의 파란만장 인생사’를 들려주곤 했다. 10살 생일날 꼭 돌아오겠다던 아빠, 해마다 바뀐 엄마의 애인들. 서울서 철길마을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사연까지. 간혹 동네 꼬마들이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잘도 낳는다.' 짓궂게 노래를 부르면 소희는 목발을 씩씩하게 휘둘러 보였다. 아이들이 도망치며 “이 다리 빙신아, 니 살던 데로 돌아 가랑께” 헛돌이라도 던질라치면 소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절뚝절뚝 걸어가며 말했다. “병신~ 쪼다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소희의 말수는 줄어만 갔다. 대신 헤드폰을 낀 채 음악을 들으며 걷는 일이 많아졌다. 가끔 비행기가 들고 나는 구산공항 하늘을 보면서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다고 했다. 중학교를 마치던 날, 나는 stand by your man을 들려주며 오랫동안 준비해 온 말을 꺼내 그녀에게 전했다. “항상 네 곁에서 지켜줄게, 이 철길처럼"
그러나 소희는 멈춰 서서 고개를 기울여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 철길은 서로 바라만 보는걸. 평행선은 영영 만날 수 없을거야" 그녀는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그대로 목발을 짚고 걸었다. 나는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왜 그러한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 쌓인 철길에 그녀가 남긴 세 발자국을 내려다보며 잠자코 걷기만 했다. 그해 겨울, 그렇게 그녀는 천천히 내 마음 바깥으로 걸어가 버렸다.
마을에선 나 혼자 시내 인문고에 진학했지만 도시 아이들의 세계에는 편입될 수 없었다. 덩친 큰 녀석들은 낄낄대며 "너희 마을에선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더니 과부도 서로 나눠 먹나 보지, 이 더러운 자식“하며 공공연히 마을에 대해 수군거렸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지 못하는 왜곡된 시선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아파 조퇴를 하고 이른 시간에 마을에 들어선 참이었다. 부녀회 단풍놀이로 아무도 없어야 할 앞집에서 아버지가 상기된 얼굴로 나왔다. 반쯤 열린 현관 사이로 널브러진 목발을 발견한 순간 나는 그제야 학교에 떠돌던 소문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 후 다시는 그곳을 찾지 않았다. 한때 아버지가 자랑했던 마을의 상부상조도 미덕이 아닌 위선으로 여겨져 그의 장례에도 가지 않았다. 철길마을은 제지회사의 부도로 더 이상 기차가 운행하지 못하게 되자 추억거리를 파는 관광단지로 탈바꿈 중이라 했다. 어쩌면 그곳은 철길마저 사라져도 계속해서 철길마을이란 이름으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허울이고 진실인지, 무엇이 아름답고 추한 것인지 이젠 나조차 혼란스럽기만 하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소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공사 중인 철길 위에 목발 하나 남둔 채.
빗물 맺힌 차창 너머로 눈 쌓인 철길의 풍경을 떠올리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날 만약 내가 그녀의 세 발자국 옆으로 나란히 걸었더라면 우리는 영원할 수 있었을까. 마주 보는 평행선 중 어느 선 하나가 조금만 각도를 틀었더라면 두 선은 언젠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조금만이라도 그녀를 향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