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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중 Jan 09. 2024

내 이웃의 집은 어디인가

 2년 동안 연재하던 웹툰을 마친 주식은 오랜만에 본가로 돌아와 쉬는 중이었다. 아들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매일같이 한상 가득 차려내었다. 그날도 저녁을 배불리 먹은 탓에 불편한 속을 달래려 한밤중이 지났지만 주식은 주섬주섬 추리닝 잠바를 걸치고는 현관문을 나섰다. 


평소라면 이미 자정을 넘은 시간이라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 테지만 주식은  아파트 단지 안쪽으로만 산책할 요량이었다. 마침 동짓달 그믐이어서 달빛을 따라 걸으니 주식에겐 메밀꽃 필 무렵 속 허생원의 독백이 들리는 듯했다. '참, 이상한 일도 많지, 달밤이었으니... 허긴 어찌 그리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주식에게는 그런 로맨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심야에 인적도 드문 길 저 너머로 커다란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주철은 소름이 돋았다. 


"뭐지 저건?" 

주식은 쭈뼛쭈뼛 걸음을 멈추고 숨 죽인 채 그 정체불명의 대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리 휘청, 저리 휘청 갈지자 행보를 하면서도 용케 쓰러지지 않았다. 마치 햄릿에 나오는 부왕의 유령처럼 공중부양 하듯 앞으로 스르르 나아가는 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놀란 주식이 산책이고 나발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그 낯선 형체로부터 왠지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우웩, 우웩,,, 우우우 웩'

분명 그 소리는 인간만이 뱉어낼 수 있는 단말마였다. 주식이 소리 나는 곳으로 용기 내어 가보니 가로등 밑에서 마침내 어둠을 드러낸 그것은 기둥을 부여잡고 오바이트와 고군분투 중인 한 한 남자였다.   모든 공포의 원인은 사실은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했던가. 방금까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공중부양의 정체가 한낱 취객임을 확인한 순간 주식은 맥이 풀렸다. 그러나 넥타이도 풀린 채 기둥과 씨름 중인 중년의 남성에게서 주식은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어느 회사의 말년과장일지도, 누군가에게는 한 집안의 가장일지도 모른다.


‘쯧쯧, 얼마나 마셨길래 나오라는 오바이트마저 안 나올까?'

주식은 곤경에 빠진 네 이웃을 도우라는 성경 말씀이 기억은 났지만 그렇다고 선뜻 직접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만큼 그 자신이  순종적이지도 나이브하지도 않았다. 


‘아서라. 요즘 세상에 싸구려 감성팔이 했다가 덤터기로 누명 당하는 뉴스도 많은데' 

주식은 자신의 인사이드에 숨어 있던 파란 까칠이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인사불성 취객은 여전히 기둥과 샅바싸움 중이었다. ’ 음… 이 정도면 집에 돌아갈 힘은 남아있겠네 ‘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주식은 그를 남겨둔 채  발길을 돌려 계속 산책을 이어갔다.


 그렇게 아파트 단지 주위를 10분쯤 걷고 있던 주식은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첫 번째 놀라움이 무지의 공포였다면 두 번째는 상식의 배신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안 밴 애마저 떨어뜨릴 만큼 충격은 더 컸다.  주식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쯤이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있어야 할 사람이 어째서 아직도 공중부양으로 아파트를 배회하며  휘적휘적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20개 동이 산재해 있는 대단지 아파트에서 시간상으로 불가능한 거리를 어떻게 여고괴담급 3단 순간 이동으로 주식의 눈앞에 나타난 것일까?


 아마도 주식이 아파트 가장자리를 따라 원형으로 넓게 도는 동안, 방향감각을 상실한 그 사내는 자신의 아파트를 찾아 동과 동 사이를 통과하다 주식과 다시 마주쳤다는 것이 타당한 추론일 것이다. 그제야 주식은 설령 폭음이 큰 죄악이라 하더라도 미노타우르스처럼 영원히 미로 속을 헤매야 하는 형벌이라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 ‘나의 집은 어디인가’를  몸소 시전하고 있는 주인공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로 했다. 


"이봐요 아저씨, 집이 몇 동이예요? "

그러나 그 사내의 눈엔 주식이 보이지 않는 듯 "아이씨~ 당최 이노무 집구석은 어디에 숨은 거야"라고 구시렁 대기만 할 뿐이었다. 주식은  차라리 식구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라고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 대신  보이지 않는 자기 집과 여전히 숨바꼭질 중이었다. ‘하긴 그런 사고 회로가 작동한다면 다 큰 어른이 이렇게 자기 집을 미로처럼 헤맬 리가 없겠지’라는 생각에 주식은 체념했다.

   

 결국 주식은 이 심신미약자를 상대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는 사이 숨바꼭질에 지친 오디세이아는 돌아갈 수 없는 집을 향해 알아듣기 힘든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몽유병 환자처럼 주식의 곁을 지나가 버렸다. 주식은 외투자락을 휘날리면서 멀리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어쩐지 공산당 선언문의 첫 문장이 오버랩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나의 유령이 아파트를 배회하고 있다. 취객이라는 유령이…….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뒤늦은 잠을 청한 주식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주식이 지구가 되어 우주를 천천히 유영하고 있는데 갑자기 소행성 하나가 출현했다. B612라는 그  소행성은 스스로 자전을 하는가 싶더니 불쑥 주식에게 다가와 지구 주위를 공전하기도 했다. 주식이  움직이면 어느새 따라오고, 앞서 거니 뒤서 거니 하는  좌충우돌 속에서 주식은 아파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아~아~ 관리사무소에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 입주민으로 보이는 성인 남성분을 발견하여 보호하고 있사오니 관련 보호자께서는 속히 방문하시어..."


안내방송이 끝나자 주식의 어머니는 ‘도대체 어떤 남편일지 그 부인이 불쌍하다’ 라며 혀를 찼고, 주식의 여동생은 ‘그런 민폐 인간은 유실물 보관도 해주지 말고 바로 폐기 처분해야 한다’ 며 열을 올렸다. 다만 주식의 아버지만이  한국인의 귀소본능이 입증되었다며 ‘그 양반 상판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라며  껄껄 웃었다. 주식은 주식대로 '혹시라도 밤사이 사고라도 났더라면 CCTV에 찍혀있을지도 모를 자신이 곤란했을 텐데 별일 없어 다행이다'라는 생각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주식의 가족이 아침식사를 마치고  있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현관 외시경으로 밖을 내다보는 주식에게 낑낑대는 경비원에게 업힌 고주망태의 사내가 한 아줌마의 등짝 스매싱을 맞으며 앞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뭐야 우리 앞집 사는 거였어? 그럴 줄 알았으면 어제 같이 데리고 올걸 그랬나”  왠지 죄지은 마음이 들어

주식은 소리 나지 않게 현관문 걸쇠를 걸었다.  


 (예전의 썼던 에세이를 소설로 각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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