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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제들’ 신선한 소재에도 영화가 잃어버린 것

트라우마 극복기와  고난받는 의인으로도 읽을 수 있어

여성이 강동원을 볼 때의 심정은 남성이 김태희를 볼 때의 심정과 비슷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여심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마성의 매혹남 강동원이 몸매를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타이트한 사제복을 입고 등장한다는 건 평소 남성의 복장 페티시즘에 흥미조차 없던 여성이라 할지라도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치명적인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가톨릭 신부들이 구마의식을 행한다는 소재는 기존의 한국영화에서 흔히 보던 소재가 아니기에 소재적인 면으로서의 접근은 참신한 영화가 <검은 사제들>이다. 소재적인 포화 상태에 다다른 한국영화 가운데서 이 영화는 비록 소재적인 면에 있어 <엑소시스트>에 빚지기는 했지만(이미 비슷한 소재가 나온 외화가 있기에 독창적인 소재는 아니다) 형사와 조폭, 멜로와 불치병 등 새로운 소재 찾기에 있어 한계에 다다른 한국영화의 소재 돌파라는 점에 있어 그 기상을 높이 사줄 만하다.     

<검은 사제들>은 강동원이 연기하는 최부제의 정신적인 성장담 혹은 트라우마 극복기로 읽을 수 있다. 최부제는 어린 시절 사나운 맹견이 여동생에게 달려드는 바람에 여동생을 잃은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이다. 악마와 김 신부(김윤석 분)는 이런 최부제의 트라우마를 내버려두지 않고 건드리거나 꿈을 통해 괴롭힌다.      


어린 시절 여동생을 잃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느냐, 혹은 트라우마에 잡아먹힐 것인가를 최부제가 선택하게 만드는 영화적인 상황은, 만일 이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한 단계 성숙한 정신적인 성장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검은 사제들>을 또 다른 면으로 본다면 강동원과 김윤석은  ‘고난받는 의인’을 표상한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티칸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김 신부는 귀신 들린 부마자를 성추행하는 파렴치범으로 몰리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김 신부는 최부제에게 “이 길을 걷는다면 잠도 편히 못 자고 매일 술을 마셔야 할 거야”라는 경고를 남기고, 최부제는 김 신부의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구마의식을 돕는다. 다른 사람들과 가톨릭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지 않아도 악마 들린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인도적인 결의가 최부제와 김 신부 두 사람을 공고하게 단결하게 만들어주고  고난받는 길, 오해를 받는 험한 길을 선택하게 만든다.     


그런데 <검은 사제들>이 놓친 한 가지 점이 있다. 그건 바로 강동원과 김윤석이 필사적으로 구하려고 달려드는 귀신 들린 부마자 영신(박소담 분)에게 들어간 귀신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가를 관객에게 설득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로마 교구는 부마자 영신을 살려두면 그의 안에 들어있는 악마가 한국을 위태롭게 할 테니 영신의 목숨을 박탈하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영신의 몸 안에 들어간 악마가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태로운 존재인가를 관객이 납득 가능하도록 설득시켜야 하건만, 영화는 김 신부와 최부제의 구마의식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영신의 육신을 침투한 악마가 얼마나 치명적인 존재라는 점을 설명하는 일에는 간과하고 말았다.      


이를 동물원에서 탈출한 동물로 비유하면, 포획해야 할 동물이 사슴이나 양 같은 초식동물인지 아니면 하이에나나 늑대와 같은 육식동물인지도 모르고 포획하려 달려드는 사육사의 비애와 닮았다고나 할까. 김 신부가 귀신을 퇴치해야 한다는  ‘고난받는 의인’에 너무 많은 포커스를 맞춘 나머지 악마의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납득시키는 데에는 <검은 사제들>은 실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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