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네이터’ 시리즈는 그동안의 ‘에이리언’,‘트랜스포머’ 시리즈가 걸어온 졸작의 길을 걸어왔다. ‘에이리언’이 2편까지만 해도 완성도와 오락성 면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반면 3편부터는 이야기가 산으로 가질 않았던가. ‘터미네이터’도 마찬가지로 3편부터 재미와 작품성 모두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3편부터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되살리기 위한 심폐소생술이다.
5편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게 아니다. 3편부터의 시나리오를 무시하고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만든 2편의 이야기에서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시나리오가 이어진다는 건 2편 이후에 만들어진 시리즈를 더 이상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적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는다.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그동안 ‘젤리하’ 서사를 변주해왔다. 세상의 구세주가 될 아이를 낳을 사라 코너를 없애는 것이 터미네이터의 임무였고, 시리즈 2편에선 이미 태어난 세상의 구세주 존 코너를 사살하는 게 터미네이터의 임무였다.
바빌론을 멸망시킬 아이가 누군지를 몰라 그해에 태어난 모든 아이를 학살하라고 명령한 니므롯 왕, 니므롯의 박해를 피해 동굴로 피신한 아브라함과 그의 어머니 젤리하 이야기가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통해 다양하게 변주돼왔다.
‘젤리하’ 서사를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선 니므롯을 스카이넷, 아브라함을 존 코너, 젤리하를 사라 코너라는 방식으로 변주했다. 이를 예수와 마리아, 헤롯이라는 ‘성모 마리아’ 서사로 ‘터미네이터’에 대입해도 무방하다.
‘터미네이터’ 속 ‘젤리하’ 서사 가운데선 백인 외의 인종은 중요한 캐릭터로 담당할 수 있는 몫이 없었다. 사라 코너나 존 코너, T-1000 같은 암살 기계의 인종은 모두 백인이었다. 그동안의 ‘터미네이터’ 서사는 ‘젤리하’ 서사이기도 하면서 ‘백인’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그동안 1편과 2편이 다뤄온 백인 위주의 서사에서 변주를 시도한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가운데서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도 미국 외 지역인 멕시코로 확장된다.
사라 코너와 터미네이터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에서 왜 멕시코인 대니를 보호해야 할까. 그건 ‘터미네이터’ 1편과 2편을 관통하던 백인 위주의 서사에 히스패닉이라는 PC(정치적 올바름)적 요소, 다양성이 가미된 결과다.
존 코너와 사라 코너를 암살하기 위해 미래에서 날아온 살인 병기 터미네이터 역시 과거엔 백인이었지만 이번엔 히스패닉이라는 인종적 다양성이 시도된다.
인종적, 지리적 다양성의 시도는 미국에서 히스패닉이 차지하는 비율이 그많큼 높아졌음을 뜻한다. 21세기 전엔 영화 속에서 인종적 다양성을 추구한다 해도 흑인에 국한하는 비율이 높았다. 모건 프리먼의 ‘브루스 올마이티’나 ‘용서받지 못한 자’, 로렌스 피시번의 ‘매트릭스’가 이에 해당하는 사례들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선 사정이 달라졌다. 미국 내 히스패닉 비율이 흑인의 비율을 앞지르는 현상이 2005년에 일어났다. 미국 영화시장이 중국 관객의 입맛에 맞게 스토리를 재단하는 것처럼, 이제는 히스패닉 관객의 영화적 구미를 맞춰야 할 필요성이 미국 내 인종 구성 비율의 변화로 촉발됐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다양성을 추구하되, 높아진 히스패닉의 인구비에 맞춰 영화 속 캐릭터의 인종도 재단되는 현상이 벌어진 결과물이다.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관통하는 ‘젤리하’ 또는 ‘성모 마리아’ 서사에서 히스패닉이 어떻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됐는가는 2005년 미국 인종의 비율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읽을 수 있을 때 이해 가능해진다.
잡설: 브런치는 왜 제목 글자수에 제한을 두는가를 모르겠다. 원래 네이버뉴스 발행 기사 제목을 브런치 발행 정책에 맞게 줄이다보니 이상한 제목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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