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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오페라 ‘파우스트’ 이토록 유쾌한 재해석이라니

남성 중심의 원작을 인과응보로 재해석한 점은 인상적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졌어도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늙은 학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파우스트.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했던 파우스트가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는 영혼과 맞바꾸면서까지 누리고자 했던 건 ‘젊음’이었다.      

<은교>에서 교과서에 작가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명망 있는 시인 이적요가 부러워했던 단 한 가지가 여고생 은교의 젊음이었듯이, 젊음은 늙은 학자 파우스트에게 있어 되찾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추구할 가치가 있는 최상의 가치였다.     


그런데 파우스트가 젊음을 찾자마자 한 일이 무엇인가. 순결한 아가씨 마르그리트를 꾀어 임신시킨다는, 육체의 욕정을 절제하지 못한 나머지 리비도(libido)에 경도된 행동을 보이지 않았던가.      


괴테의 원작에서 그레트헨(오페라 속 마르그리트)이 종국에는 신의 구원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그레트헨의 육체는 사형대에서 차디차게 식어가지 않았는가. 비록 그레트헨의 영혼은 구원받았을지언정 육체는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고 인위적으로 목숨을 빼앗긴 비운의 행적이 그레트헨 가운데 배어있는 걸 볼 수 있다.     

이러한 거시적인 관점으로 마르그리트를 본다면 그는 남성 중심의 세계관에서 희생당한 비운의 여인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에게 있어 마르그리트를 사랑한 건 엄연히 죄가 아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임신시킨 것은 리비도에 경도된, 정욕을 절제하지 못한 파우스트의 그릇된 행동이다.      


하나 더, 파우스트라는 남성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생긴 아기를 죽게 만든 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때문이다. 악마를 중성적으로도 바라볼 수 있지만 메피스토펠레스 역시 남성이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 두 남성에 의해 마르그리트가 임신하고, 미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남성 중심의 세계관 가운데서 희생당한 여성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오페라 <파우스트>가 괴테의 원작을 고스란히 답습했다면 마르그리트는 영혼은 구원받을지 몰라도 육체는 사형당해야만 했던, 남성성에 짓눌린 여성성을 반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출가 존 듀는 이런 원작의 서사를 고스란히 따르지 않았다. 마르그리트는 사형을 당할 타이밍에 구원을 받지만, 반대로 순결한 마르그리트의 육체를 빼앗은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함께 무대가 낙하하면서 지옥으로 떨어진다.      

남자인 파우스트는 무슨 짓을 해도 마지막에 가서는 구원받지만, 반대로 여성인 마르그리트는 구원을 받는다 해도 이생에서는 목숨을 빼앗긴다는 원작을 인과응보적인 차원에서 유쾌하게 비튼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남성 중심적인 원작의 결말에서 벗어나 주인공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인과응보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오페라를 보며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서울시오페라단의 작품 하게 되면 재해석이 배제된, 클래식적으로 무대화하는 오페라를 떠올리기 쉬웠다. 하지만 이번 <파우스트>는 서울시오페라단 하면 으레 떠올리던 기존의 고정관념을 전복시킨 획기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신선한 재해석이야말로 서울시오페라단에게 있어 필요한 적업이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보다 다양한 재해석된 오페라들을 선보였으면 하는 바람이 커지게 되었다.


(사진제공: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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