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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박소담, 아름답고 처연한 공포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보았을 법한 일본 애니가 있다. <폭풍우 치는 밤에>의 가브(늑대)와 메이(늑대)는 분명 포식자와 피식자다. 하지만 늑대는 양을 잡아먹는 게 아니라 거꾸로 양과 우정을 나눈다. 최근 10년 동안 선보인 북유럽 호러영화 중 가장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공포물로 손꼽히는 영화 <렛미인>을 원작으로 하는 동명의 연극 속 히로인인 일라이는 인간보다 상위에 속하는 최고 포식자이면서 인간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연인 관계를 보여준다.


일라이는 겉모습은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수백 년을 살아온 불멸의 존재. 혼자 있기에는 외로웠는지 그의 곁에는 언제나 남자가 있지만 일라이가 사랑하는 남자는 일라이와 항상 함께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라이는 늙지도 시들지도 않지만 그의 연인인 남자들은 나이를 먹고 죽어갔기 때문이다.


지금 일라이의 곁에도 하칸(주진모 분)이라는 오래된 연인이 있는 반면에 새로운 연인인 오스카(안승균, 오승훈 분)가 있다. 이는 일라이의 남자관계가 복잡해서가 아니다. 하칸이 언젠가 수명을 다할 때 하칸의 빈자리를 오스카가 대신해줄 필요성이 있기에 그렇다. 이런 다양한 연기를 보여주어야 하는 일라이 역에 요즘 충무로에서 가장 핫한 배우인 박소담이 캐스팅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

Q. 1막에서 등진 채 떨어지는 장면을 소화했어요. 평소 담력이 많은 편인가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떨어지는 건 고사하고 높은 곳에 있는 것도 싫어해요. 1막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소화한다고 했을 때 ‘저걸 어떻게 해?’하고 난감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뒤로 넘어가는 장면을 처음 연습할 때 패닉 상태에 빠졌어요. 눈이 돌아가면서, 뒤로 떨어져야 안전한데 봉을 잡은 상태에서 앞으로 떨어졌어요.


자칫하면 봉에 부딪혀서 얼굴뿐만 아니라 턱도 잘못될 뻔한 아찔한 위기였죠. 첫 연습에서 실패한 다음에는 이틀씩이나 (떨어지는 장소에) 올라가지 못했어요. ‘나도 할 수 있다’는 다짐을 수백 번씩 하고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제대로 떨어지고 나서야 잘 떨어질 수 있었어요.”


Q. 흡혈귀 일라이는 사람보다 강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흡혈귀가 “나 들어가도 돼?”  라면서 오스카에게 동의를 구하는 설정이 인상적이기도 해요.


“하칸에게는 자기 주관이 확실해요. 하지만 이제 갓 사귀는 오스카와는 정서적인 유대가 강하지 않아요. 자신이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리기 전(前) 단계죠. 흡혈귀임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러워서 오스카에게 동의를 구한 것일 수도 있어요. ‘나 들어가도 돼?’하고 동의를 구하기 전에 오스카가 일라이의 정체를 알면 겁을 먹고 도망칠 수도 있었기에, 일라이는 오스카를 곁에 두고 싶어 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두 감정이 교차한 거죠.”


Q. 일라이는 오스카 외에도 하칸 또한 사랑하고 있어요.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한결같이 ‘일라이, 너무 나쁜 애 아냐?’할 정도였어요(웃음). 오래 지낸 하칸이 옆에 있으면서 일라이를 사랑해주어도 또 다른 젊은 남자인 오스카에게 눈길이 가요. 연출가가 ‘일라이는 하칸과 오스카 두 사람 모두 사랑한다’고 설명해 주었을 때 ‘양다리 아니에요?’라는 반응이 절로 나왔죠. ‘현실에서 이렇게 할 수 있어요?’라고 반문하니 연출가는 일라이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고 설명해 주었어요.


하칸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이 지금 오스카를 만났을 때의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칸 역시 자기 이전에 일라이 곁에 있던 남자를 보았을 겁니다. 수백 년 동안 끊이지 않는 악순환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제가 이렇게 수많은 남자를 만나왔던 일라이를 이해할 수 있던 건 일라이가 새로운 남자만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났던 남자들을 잃어갔다는 점입니다. 일라이가 사랑하던 남자들이 늙고 죽는 걸 수백 년 동안 지켜보았던 거죠. 그렇게 이해를 하고 나니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한다는 게 몇 백 년을 살아온 일라이에게는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Q. 일라이가 몇 백 년 동안 살아왔다면 남자를 보는 눈이 높아졌으면 높아졌지, 오스카처럼 왕따 당하는 소년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일라이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사람의 피를 공급해주지 않으면 일라이 혼자서 살아가기가 버거워요. 일라이가 몇 백 년 동안 살아오면서 (사랑하던 남자들이 나이 들어 죽어나가면서) 외롭다 보니 오스카처럼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주지 않을 가련한 남자에게 끌리는 게 있었던 거죠. 약한 남자에게 정이 가고 마음이 가는 거라고나 할까요.


사실 오스카가 못나서 왕따를 당하는 건 아닙니다. 괴롭힘을 당한 친구들이 속으로는 성장을 많이 한 친구들이 많아요. 충분히 괜찮을 수 있었지만 어머니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지도 못하고 아버지에게도 충격을 받으며 자라왔어요. 이런 결핍 때문에 다른 아이보다 기가 죽은 것일 뿐이지 오스카 자체가 못난 남자는 아니란 거죠. 일라이가 옆에 있어주면 충분히 강해지고 멋진 남자가 될 가능성이 많아질 수 있어요.”


Q.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미친 연기’로 주목을 받았어요. 소포모어 징크스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도 있었을 법한데요.


“다음 작품에서 배역이 크면 클수록 더 잘 해야겠다는 부담감이 없을 수는 없어요. <검은 사제들>에서 훌륭한 선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어요. 김윤석 선배는 ‘소담아, 너 혼자 짊어지고 가려고 하지 마. 주변 사람들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 네가 할 수 있는 연기는 하되  도움받을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야’라는 조언을 해주었어요. 연기에 대한 부담감을 ‘책임감’으로 바꿀 수 있는 마인드 컨트롤을 할 수 있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죠. 그리고 배우로서 어느 정도 부담감을 가지고 있어야 저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도 있어요.”

Q. <렛미인> 오디션 때 경쟁률이 600:1인 건 양반이었죠. <검은 사제들> 때 오디션 경쟁률은 무려 2,000:1이었다고 하니까 말이에요.


“재작년과 작년에 신인 여배우를 뽑는 오디션이 많았어요.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 학교를 졸업한 타이밍과 잘 맞았던 거죠. 만일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면 오디션을 많이 보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지금의 나이와 맞는 캐릭터를 뽑는 오디션이 많았으니 오디션이라는 도전을 하는 게 맞았죠. 학생이 아니라 수입이 필요해서 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해야만 했다는 절박감도 있었고요. 수많은 오디션에서 불합격했지만 <렛미인>과 <검은 사제들>처럼 큰 작품에는 운이 좋게 합격된 거였어요.”

              

Q. “내가 내 연기에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었는데?


“관객은 추운 겨울이나 뜨거운 한여름에 돈을 내고 관람을 해요. 관객의 돈과 시간을 할애해서 찾아오는 것이기에 연기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연기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연기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Q. “인간적인 배우가 되고 싶다”는 멘트도 인상적이었어요.


“예술은 배우의 삶을 반영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관객이 보기에는 비현실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이상하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배우가 역할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을 때를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었어요. 자연스러운 연기를 관객에게 충분히 어필하고 싶다는 의미에서 인간적인 배우가 되고 싶어요.”


Q. 한때는 오디션을 볼 때 한 달에 19번씩 떨어지는 힘든 때도 있었다면서요?


부모님이 제가 연기하는 것에 대해 많이 반대했어요. 부모님의 압력이 있을 때 배우는 두 부류로 나뉘어요. 하나는 엄청난 반항을 하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부모님의 반대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이를 악물고 연기하는 경우가 있어요. 저 같은 경우는 후자에 속해요. 원래 낙천적인 성격이지만 오디션에서 많이 떨어져서 우울해할 때 어머니는 ‘네가 하고 싶어서  고집부려가며 시작하지 않았니, 연기를 하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벌써부터 나가떨어지면 어떡하니’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보니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구나,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오기가 생겼어요.


아버지의 반대가 심해서 아버지가 미울 때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스무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술을 사주시면서 ‘네가 미워서 연기를 반대한 게 아니다. 연기의 길이 너무 힘들다고 다른 사람들이 만류해서 세게 반대하면 네가 포기할 줄 알았던 거지, 기왕 이렇게 된 거니(한예종에 합격한 것) 잘 해봐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한예종에 합격해서 열심히 연기해서 만든 작품을 꾸준히 보여드리다 보니 전에는 영화 티켓을 드려도 쳐다보지도 않고 TV를 보셔도 하루 종일 뉴스랑 디스커버리 채널만 보시던 아버지가 지금은 ‘너 덕분에  문화생활한다’고 흐뭇해하세요. 지금 부모님은 ‘잘 하렴’하고 응원자가 되어 주셨어요.”


더무브 2월호 지면기사

(사진: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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