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가 여름에 개봉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나는 여름 시즌이야말로 블록버스터를 개봉하거나 카타르시스를 고조하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쾌감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방학과 휴가철을 맞은 대중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시즌인데, 일본에게 고통 받은 징용자의 한을 소재로 어떻게 여름 대목을 흥행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하나의 생각은 ‘군함도’의 메가폰을 잡은 이가 다름 아닌 류승완이기에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는 건 문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언론에 공개된 ‘군함도’는 하루 12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린 조선인 징용자의 한을 강조하기 보다는 영화라는 가상의 방식으로나마 관객의 액션 쾌감을 고조시키는 데 있어 모자람이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탈출하고 싶어도 탈출하지 못한 징용자의 한을 류승완 감독과 황정민, 소지섭, 송중기, 이정현이 달래려고 작정한 듯 영화 안에서는 400여 명의 징용자가 한꺼번에 탈출을 시도하는 거대한 엑소더스가 스펙터클하게 진행된다. 역사적인 아픔을 소재로 하되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하는 전략의 상업적인 전략도 놓치지 않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노리는 모양새다.
아우슈비츠를 묘사하는 일련의 서구 영화들 안에서는 이분법적 도식이 확연하다. 유태인을 괴롭히는 독일 나치와 핍박당하는 유태인이라는 이분법 말이다. 이에 비해 ‘군함도’는 징용자라는 핍박받는 조선인과 조선인을 착취하는 일본인이라는 이분법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
조선인이 착취당하면서도 마냥 선량한 ‘을(乙)’이 아니라 징용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조선인 부역자’라는 계급을 하나 더 추가한다. 같은 을이면서도 선량한 징용자를 ‘병(丙)’으로 만들어버리는 못된 ‘을’ 말이다. 일본인만이 징용자를 착취하고 괴롭힌 게 아니라 일본인과 조선인 부역자라는 이중의 악을 부여하면서 ‘군함도’는 두 종류의 악인들과 상대해야 하는 징용자의 애로점을 묘사한다. 같은 민족이라 할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위해서라면 같은 민족인 조선인 징용자의 뒤통수를 치는 야비함은 조선인 부역자의 몫이 된다.
말년을 비롯하여 군함도에 끌려온 여성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감당하지 않는다. 여성으로서는 치욕스러운 위안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말년의 사연이 기막힌 것은 일제 치하 아래 조선인이 같은 민족의 여자를 감언이설로 속여 일본인의 욕정의 대상으로 넘겼다는 점이다. 말년은 군함도로 끌려오기 전부터 조선인 이장에게 속아 육체를 파는 일을 감당했다.
남성 징용자가 조선인 부역자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당한 것에 비해, 말년과 같은 위안부는 같은 동포의 뒤통수를 치는 친일파 조선인에게 속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정신’ 모두를 수탈당했다는 점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이중의 고통을 당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영화에서 일본을 악, 징용자를 선이라는 이분법적인 공식에 묶어두지 않고 일본에 협조하는 조선인 부역자라는 층위를 추가함으로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공식에 머무르지 않는 관점은 황정민이 연기하는 강옥이 일본군을 어떤 방식으로 매수하고 강옥의 편으로 회유하는가 하는 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강옥은 일본군을 매수할 때 술이나 담배와 같은 물자보다 춘화라는 포르노그래피를 뇌물로 제공한다. 춘화를 받아들이는 자는 일본군이 맞지만 춘화를 뇌물로 제공하고 생산하는 이는 조선인 징용자다. 만일 ‘군함도’가 선-악의 이분법적 도식에만 국한된 영화였다면 춘화를 생산하는 이를 조선인 징용자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가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은 조선인 부역자라는 차악(次惡)과 더불어 춘화를 제공하는 이가 조선인 징용자라는 점을 통해서도 유추 가능하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가상이나마 400명이 넘는 징용자가 일본의 포위망을 뚫고 군함도를 탈출하려 시도하는 엑소더스다. 영화는 액션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답게 일본군에 뒤지지 않고 항쟁하는 불굴의 징용자로 묘사하고 있다.
필자가 이 영화를 인상 깊게 바라본 시퀀스는 후반 40분의 용감무쌍한 투쟁기보다는 다른 장면에 있다. 군함도를 탈출하기 전 징용자들이 한데 모인 자리는 어두움이 드리워진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징용자들이 손에 들고 있던 건 ‘촛불’이었다. 징용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던 그 자리에서 징용자들은 그들이 미처 알지 못하던 놀라운 진실과 대면한다.
현실에서 촛불을 언급하면 흔히 대다수는 촛불시위 또는 촛불혁명을 떠올린다. 즉 촛불은 어둠을 밝히는 저항의 아이콘으로 한국인의 심상 가운데 자리한다. 영화 속 촛불은 ‘국정 농단을 일으킨 주범에 대한 비판적인 알레고리’다. ‘군함도’에서 촛불을 든 이들이 거짓이라는 가면을 벗겼다면 현실에서는 국정 농단의 주범이 촛불이라는 무혈 혁명에 의해 탄핵당하지 않았던가.
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한 CJ는 지난 정권 당시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내놓은 것과 ‘변호인’에 CJ가 투자를 검토한 사안, tvN ‘SNL코리아’에서 선보인 ‘여의도 텔레토비’라는 찰진 정치 풍자 때문에 수첩공주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적이 있었다.
‘군함도’에서 촛불을 든 모든 징용자들이 보는 앞에서 진실이 드러나는 시퀀스는 단지 영화적 시퀀스가 아니다. 대중이 촛불 혁명을 통해 국정 농단의 실체를 벗기고 고발하던 작년 말에 벌어진 시국을 비유하는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다. 이 영화의 크랭크인 시점과 지난 정권 수장이 탄핵 당한 시점이 엇비슷한 건 우연이 아니다.
미디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