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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in Sep 11. 2020

우즈벡으로 돌아간 시어머니

 시어머니와의 한 집 살이가 끝나고 느낀 것 

우즈벡 남편과의 결혼생활 4년 차이자, 시어머님과 함께 산지 3년 차인 나는 마음속에 작은 불만들을 조그맣게 쌓아가고 있었다.

결혼하고 그 해에 바로 출산을 하여 어머님이 아이를 봐주시는 목적으로 한국에서 같이 살며 생활을 시작하였지만 시어머니와의 생활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니었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시어머니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왜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걸까. 내가 꿈에 그리던 결혼생활은 이게 아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 시어머니와 3년을 살면서 우리의 신혼은 늘 어머님도 함께였고, 그러다 보니 우리에겐 아주 많은 일들이 있었고 시어머니가 가신 지금 나는 아주 많은걸 깨닫고 잃고 얻고 배우게 되었다.


시어머님이 본국인 우즈벡 집으로 돌아가신 지 보름이 지난 지금 보름 동안 나는 어머님과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면서 많은걸 느끼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에 본 글 중에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보다 독박 육아가 훨씬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며 3년을 지내왔다. 그 이유 중 하나도 어떻게 보면  출산하고 집에 온 날 시어머님이 들어오셔서  나 혼자 육아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독박 육아가 어떤 건지 말로만 들어서 잘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불만들만 차곡차곡 쌓이면서 나 자신도 지쳤던 건지 나름 노력한답시고 생전 써 본 적 없는 감사일기와 독서 등 여러 시도를 한 것 같다. 하지만 육아를 하며 어머님과 맞지 않는 육아방식과 임신까지 하게 되어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그 깨달음을 가끔씩 잊어버릴 때면 남편과 시어머님을 두고 다투기 일쑤였는데, 어머님과 함께 사는 것보다 가까이에 살면서 오고 가고 하는 게 더 좋지 않냐는 내 생각은 외아들이자 부모를 모시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는 우즈벡 남편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사안이었다.


어머님은 우리에게 용돈을 받지도 나에게 시집살이도 시키지 않으셨는데 나는 왜 시댁이라는 이유로 그렇게나 거부반응을 보였을까.

어머님과 같이 지내며 아이를 볼 때, 어머님은 아이와 함께 자고 새벽엔 나를 배려해서 모유도 먹이지 않고 분유를 타 먹이셨고, 밤에는 어머님이 아이를 보고 낮엔 나보고 아이를 보라 하셨지만 어머님은 낮엔 집안일을 해주셨다.

아이가 조금 크고 나서는 아이와 항상 낮엔 두세 시간씩 산책한다며 놀이터와 동네를 유모차를 끌고 다니셨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아이를 데리고 매일같이 외출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예전에 썼던  하루 일과를 적은 스케줄 노트를 보게 되었는데 아이가 있는 엄마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이기적인 스케줄들이었다. 독서를 하고 독서모임에도 나가고 직장도 다니며 브런치에 새벽까지 글을 쓰고 잦은 외출까지. 생각해보니

어머님이 계셔서 지난 3년간  삼천만 원이 넘는 돈을 저축도 할 수 있었고, 많은 책도 읽고 무엇보다 지금처럼 힘들지 않게 병원이며 마트며 아이 없이 혼자 잘도 돌아다녔었다.


당연시하며 감사함을 모르던 이때 어느덧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머님은 코로나로 인해 예정보다는 늦었지만 어쨌든 우즈벡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님이 가시고 나서 또 다른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독박 육아인 데다 임신 8개월 차로 배는 나올 대로 나와 아이와 마트에 걸어가는 것도 부담스러운 지금 어머님이 가신지 얼마나 됐다고 큰소리 뻥뻥 치며 독립을 외쳤던 나는 온데간데없이 어머님을 아무에게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리워하고 있는 듯했다.

어머님이 마지막으로 입은 옷을 빨아 어디에 둘까 고민하던 차에 어머님 장롱에 옷이 그대로 많이 있는 걸 보고 이상하게 나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어머님이 없어서 육아를 하는 방식도 살림도 나 혼자 먹을 땐 밥도 대충 먹어도 되고 집에서 편한 게 드러누워 티브이를 봐도 되니 편하고 좋은 점도 많았지만 말이다.


어머님과 함께한 3년이란 시간 동안 여러 습관들도 변하였는데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보면 아침을 먹지 않던 내가 밥도 아닌 뻑뻑한 빵을 먹고 있었고, 참 나답지 않게 깨끗한 것보다 어질러져있는걸 더 좋아했던 내가 머리카락 하나가 땅에 떨어져 돌아다니면 그 꼴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또 밥을 먹으면 소화가 되기도 전에 바로 설거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고 생전 해보지 않았던 다림질과 틈만 나면 냉장고 엎어 청소하기, 등 결벽증 증세가 보이는 것 같았다.

육아보다 집안일에 더 신경을 썼던 어머님이 항상 나는 불만이었는데 내가 지금 어머님과 똑같이 청소에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은 왜 있을 땐 모르고 없을 때 깨닫게 될까?

왜 나는 장점보다 단점을 먼저 보려 했을까?

요즘 내가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님과 함께 사는 것과 따로 사는 것 중 나는 뭐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

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아이 봐주시고 직장을 다니던 집에서 쉬던 내가 하고 싶은걸 할 수 있게 나에게 시간을 선물해주신 어머님이지만 슬프게도 함께 있으면 불만과 불편함이 먼저 보이고 왜 감사함을 잊게 되는지.

이렇게 떨어져 지내니 오히려 어머님과 더 돈독해진 것 같고 어머님에게도 타지에서 아이 보며 살림하는 것보다 가족들이 모두 있는 우즈베크에서 하고 싶은 일 하시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이기도 했다.

내가 이제야 깨달은 건  어머님의 마음을 왜곡하고 자식이 있는 내가 부모인 어머님 생각을 깊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친정엄마가 어머님의 사진을 보면 결혼식 때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며 항상 미안해하셨는데 아이를 봐주시면서 어머님도 나 이상으로 많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되었다.

어머님이 항상 맘에 들지 않았던 불만들이 육아와 집안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느끼면서 어머님께 더 죄송한 마음이  들었고 남편보다 어머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서 일까 어머님과 미운 정이 들었나 보다. 

어머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는 매일 아이 사진을 보내주기 위해 일부러 많이 찍고 있다.

나보다 더 껌딱지처럼 아이와 붙어 사셨는데 얼마나 손주가 보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매일 밤마다 영상통화로 안부를 물을 때면 아버님이 우즈베크에 가셨을 때의 모습처럼 너무 좋아 보였다.


가신지 보름밖에 되지 않으셨는데 어머님은 벌써 우즈베크의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사업에 필요한 기계들을 잔뜩 사서 집에 세팅을 해두셨다.

얼마 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아마도 우리에게 짐이 되기 싫어서 돈을 벌 생각을 깊게 하신 것 같다.

집 가구 배치를 문제로 어머님이 우즈베크에 가시는 날까지도  남편과 어머님 앞에서 다투었던 우리인데 어머님은 보고 싶다며 아이 낳고 얼른 와서 같이 사업하자며 웃고 계신 어머님이시다. 

항상 주는 것만 생각하고 받는 건 당연하게 받아오면서 힘들 때면 나만 피해자라는 생각을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이제 곧 둘째가 태어나는데 힘들어서 내가 손을 내밀면 어머님은 달려오시리라 믿지만 과연 나는 그럴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외국인 며느리를 얻어 떨어져 지내며 많이 못 해 드린 걸 뼈저리게 후회한 경험을 다신 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어머님께 긍정적인 생각과 감사한 마음을 갖도록 항상 인지하고 후회할 짓을 최소화하자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같이 살던 따로 살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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