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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in Aug 22. 2019

온기가 가득했던 유년시절의 그리움

타임머신을 타고간 우즈베키스탄


세 살 된 저희 딸은 사람들을 보면 안녕~하고 인사를 잘하는데요

 저번 주에는 딸과 둘이 코스트코에 갔어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때도 어김없이 젊은 부부에게 안녕~하고 인사를 하였지요

여자는 어머~안녕? 하는 거야? 세 살 정도 됐나 보다 ~몇 살이야? 했지만

옆에 있던 남자는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 모르는 사람한테 인사하면 안 돼~라며 딸에게 말하더라고요

정말 요즘 사회가 이렇게 무서워진 걸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엄마이길 낯설어하는 초보 엄마의 깊은 고민이 그때부터 시작되었죠

사실 요즘 모임이나 밖에 나가면 엄마들은 다들 교육문제부터 범죄와 학교폭력 문제 등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였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아 보였어요

아프지만 말아다오 하며 지내던 저는 어느 순간 그들의 이야기들이 남 애기가 아니었죠

아이의 교육문제 인성문제 앞으로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렇겠지만

아빠와 엄마가 각기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기에 딸의 앞날에 더 많은 고민이 되었어요

요즘은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언제부터 우리는 개인주의가 되었을까요.


저의 유년시절,

명절이면 할머니 옆집에 살았던 저희 집은 현관문 밖으로 신발이 줄을 이었고 전부 치는 냄새와 북적북적 사람 냄새로 가득했어요


엄마! 내일 사촌오빠 와?

응 아침 일찍 올 거야~

앗싸!! 그러면 언제가? 자고 가?


저희 아빠는 7남매 중 다섯째여서 저에게는 큰아빠에 작은 아빠

큰고모, 작은 고모 모두 있었고 그래서 전 언니 오빠들도 많았어요

그러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언제부턴가 우리의 명절도 점점 변해갔는데 세배할 때마다 나이순대로 5000원 3000원 1000원 세뱃돈을 받던 그 문화도 어느 순간 인사만 짧게 주고받고

각자 여행 가거나 아니면 평소와 같이 그냥 일을 나갔던 것 같아요. 그렇게 우리 집의 신발들의 줄이은 행렬은 어느 순간 우리 가족의 단란한 신반들만이 놓여있었고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사회도 우리 가족들도 변해갔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점점 저는 이 사회와 문화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어요


이십 대의 끝자락에 제 옆에는 제가 만든 또 다른 가족이 생겼는데 우즈베키스탄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결혼 후제 나이 서른이 되던 해 여름 우즈베키스탄에 방문했던 그때

저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나의 유년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어렸을 적 사람들과의 따뜻한 온기를 다시 느낄 수 있었거든요


우즈베크 사람들은 우르르 모일 때가 많아요

대가족인 이유도 사돈의 팔촌도 남편은 살짝 멀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이라고 말하더군요


전화를 하든 사람들을 만나든 하는 얘기는 약쉬!!

약쉬므? 약쉬므? 약쉬므?

좋냐고 물어보는 말이에요

아버지는 잘 있니 어머니는 잘 있니 너의 딸은 잘 있니~

우즈베크어를 잘 모르지만 만날 때마다 5분 정도는 약 쉬 약 쉬만 하는 걸 들을 수 있어요

(저에게 약 쉬라고 물어보면 괜히 NO 약 쉬라고 말하고 싶네요. 우즈베크 사람들은 다 좋다고만 해요)

하지만 밝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할 때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지만 옆에 있으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나더라고요


저희는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총 두 번의 결혼식을 올렸는데

우리는 결혼식을 할 때 보통 축의금을 내면 식권을 나눠주잖아요

이런 한국과 달리 우즈베키스탄에서의 피로연은 결혼식장에서도 하지만 동네잔치처럼 집 대문 앞에 테이블과 천막을 치고 음식을 준비하고 오는 손님들은 다름 아닌 동네 사람 전체예요

이 말은 즉 모르는 사람도 아무나 와서 밥 먹고 가도 된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정말 놀랬어요

동네 사람들은 저희의 결혼식을 축하해주러 많이 왔고 와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덕담도 나누고 마음만 표시하는 작은 돈을 준비해왔지만

시아버님 지갑은 안녕하실까 걱정하며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결혼식 하다가 우리 시댁이 더 주저앉을까 걱정이 되었답니다

다 이런 피로연을 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베푼 만큼 더 많이 돌아온 것 같아요

그때 그 불만 가득했던 제가 지금은 조금 부끄럽네요


이모님의 친구분은 시장에서 아기용품을 팔으셨는데 볼 때마다 우리 딸의 옷을 선물해주셨고 저는 그분의 생일파티도 다녀 왔었요(이분은 오늘날 이모님과 사돈이 되었답니다. 또 하나의 가족이 생긴 거죠..)

시댁의 족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날밤을 새야 해요

그리고 남편 사촌동생의 시어머니 생일파티에도 다녀왔어요

정말이지 한국이었음 남과도 같은 관계였을텐데 누가 누군지 얼굴 외우기도 힘들었어요

하지만 저를 볼 때마다 머리핀에 반지 , 아기 옷 선물, 이불 선물 볼 때마다 무슨 선물을 그렇게 주시는지.

이런 재질은 아기한테 입히기 좀 그런데..

이 이불은 중국 산이네. 무거우니 한국 갈 때 그냥 두고 가야겠다..

속으로 선물을 받으면서도 불평을 늘어놓았는데 한편으로는

비록 비싼 선물은 아니었지만 매번 주시는 선물들을 받고 저는 한국에서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해올걸 아쉬운 마음이 들었어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

마음만은 참 부자인 사람들 같아요


무슨 결혼식을   그렇게 자주 하는지 얼굴도 모르는 남편의 먼 친척들 결혼식도 갔었어요

여기서 살면 정말 잔치하다가 생이 마감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먹으라고 하는지 저만 보면 더 먹으라고 먹으라고 ~저녁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초대받고 가서 먹고.

몸무게도 점점 늘어만 가고 있었어요

내가 먹고 찐살인데도 왜 이렇게 사람들이 밉던지. 타지 생활에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어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가 못 알아듣는  말을 하니 재미도 없고 가기 싫었지만 처음 간 우즈베키스탄 시댁이었기에 꾹 참고 다녔던 것 같아요


모두모여 옹기종기를 좋아하고 동네 일어나는 일들, 온 식구들의 일들을

모두 자기들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들이 오지랖 같고 시간낭비, 에너지 낭비라고만 생각했어요

식구들은 어떻게 그렇게 매일 오는지

저는 그럴 때면 방안에 처박혀 컴퓨터만 하며 하루를 보내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무엇을 하는 것에 이미 익숙함을 잃었기에 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사람들이 우리가 있는 시댁 집에 방문하면 너무 불편하고 싫었던거죠

시댁이라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결혼 전까지 친정집에도 누가 오는 게 어느 순간 싫었어요. 어른들이 오면 나가서 인사도 안 하고 방에만 처박혀 핸드폰만 하고 명절엔 겨우 나가 인사만 했어요

인사와 함께 돌아오는 말은 왜 이렇게 살이 쪘니, 직장 어디 다니니 이런 얘기들 뿐이었으니까요


시댁에 큰어머님 댁에 갔을 때 큰어머님은 저에게 우즈베키스탄에서 지내는데 괜찮냐 불편하진 않냐 물어보셨는데 우즈베키스탄 말을 못 하니 저희 시엄마가 대신 대답해줬어요

우리 며느리~ 적응했다가 안 했다가 왔다 갔다 하는 중입니다

시엄마는 좋게 말한 거고 성격파탄자같이 하루에도 좋았다 싫었다 했어요

불편한 것도 많았거든요.

말을 못 하는 게 제일 답답했고

툭하면 전기가 나가서 한여름에 집에서 파김치가 된 적도 있고

저녁에 목욕하는데 전기가 나가 핸드폰 조명으로 간신히 거품을 닦고 나오고

전기가 안되면 와이파이까지 끊어져 반나절을 인터넷 없이 생활해야 했어요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인터넷 쇼핑이 어려워 직접 돌아다니며 봐야 했고

국제면허증이 없어 편하게 어딜 나가지도 못했어요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나고 자랐기에 못 느꼈었는데 한국은  다른 나라에 없는 좋은 서비스들이 아주 많은 것 같아요  한국에서 태어난 것에 감사한마음이 들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의  일들이 시간이 지나니 이상하게 그때가 그리워졌어요

매일같이 오던 사촌동생은 내가 어디에 가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차를 끌고 달려와줬고

아기한테 생닭을 먹인다고 마트를 찾다가 삼촌의 닭공장에서 생닭을 잡아 이유식을 만들기도 하였고

이모 친구가 동네 호텔 사장분이셔서 제 친정부모님은 그곳에 머물며 편하게 지내다 올 수 있었어요

또 사촌동생의 장인어른이 택시를 하는데 저희 친정부모님이 오셨을 때 가이드도 해주셨어요

 현지 가족들 덕분에 우즈베키스탄의 맛집과 명소 곳곳을 제대로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각박한 삶에서 우즈베키스탄은 조금 느리지만 사람들은 서로에게 정을 주고 베풀고 있었어요

이런 따뜻함을 제 딸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루를 일과 육아에 치이며 남편과 아이의 얼굴 보는 시간이 하루에 몇 시간이 채 되지 않는

각자가 자신의 일만 하며 치열하게 사는 지금

유년시절 느슨하게 편했던 그때의 온기를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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