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도 요리도 부족한 거 투성이지만 생일 하루만큼은 우즈베크에서 온 타지 생활 중인 남편에게 따뜻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 줘야겠다고 마음먹고 생일 닷새 전 책상에 앉아 계획을 세웠다.
사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아이들 핑계로 힘들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 이제 막 삼십 대인 밥 잘 먹는 우즈베크 남편에게 제대로 된 밥을 해준 게 손에 꼽는 것 같아 계획의 시작은 생일만큼은 잘 차려진 하루 세끼를 차려주는 것이었고,
가족들과 모두모여 밥도 먹고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는 우즈베크 사람인지라 친정식구들 생일에도 늘 두 발 벗고 나서서 생일파티를 열어주었던 남편에게 가까이 살고 있는 시댁의 이모님 식구와 친정식구들을 모두 불러 파티를 열 계획이었다.
몇 가지 계획 중 또 하나는 집에 사는 곰이 오늘만큼은 사슴은 아니지만 사슴 비스무리한 거라도 돼보려고 헝클어진 머리를 빗고 오랜만에 화장도 하고오늘만큼은 잔소리를 하지 않기로 나와 약속도 했다. 내가 매일같이 하는 잔소리 중 하나가 핸드폰이었는데 눈이 안 좋은 나는 예민할 정도로 샤로프든과 아이들이 핸드폰 보는 걸 싫어해 고쳐지지도 않는 잔소리를 해왔지만 오늘은 작정하고 친정집에 있는 거치대까지 들고 와 방에 설치해두고 편하게 보라고 인심을 쓰기도 했다.(마음껏 보라고 하니 오히려 안보는 신기한? 청개구리 남편)
선물은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세 개를 주고 싶은데 뭘 줘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사실 남편은 옷과 신발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지만 남편도 나도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생기니 더 우리에겐 무언가 사는데 야박해진 듯한데 지난번에 샤로프든은 해진 내 신발을 보고 커플로 운동화 하나씩 사자고 했지만 나는 그 돈이면 아이들..이라는 생각에 결국 또 사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남편까지 못사신어오다 친오빠가 귀신같이 알고 우리에게 커플 운동화를 선물해주었다.
가정주부인 내가 무슨 선물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얼마 전 포인트를 쌓아서 모은 커피 기프티콘 선물과 마스크팩을 해주는걸 엄청 좋아하는 남편이라 돈 없이도 가능한 마스크팩을 해주기로 하고 마지막 선물 하나는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어 남편 이름으로 영유아 임시보호소에 정기후원을 신청했다. 큰돈은 아니지만 한 달에 배달음식을 줄여도 충분히 낼 수 있는 돈이니 내가 아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생일 당일,
전날 새벽 음식 레시피를 적다 새벽 두 시나 되어 잠이 들어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실 청소를 하려 했던 나의 하루 첫 일과부터 꼬여버렸다. 화장실 청소와 분리수거는 늘 샤로프든이 해와서 이날만큼은 내가 하고 싶었는데 의욕만 앞서고 게으른 나의 몸은 어쩔 수가 없는듯했다.
새벽기도를 하기 위해 일어난 남편이 손님 오는 걸 생각해서 샤워하며 해버리는 바람에 나의 하루 첫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남편이 모르는 계획적인 나의 칭찬과 감사 표시들로 남편의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은 행복한 분위기로 시작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는 아~~ 무겠도 하지 마!
라고 말했지만 전날 미리 장을 봐 온 것 중 빼먹은 게 있어 마트에 다시 갔다 와야 했고 음식 좀 해보려고 하면 빨래가 다 돌아가고, 건조기에 넣으려고 하니 개지 않은 빨래들이 잔뜩 있고, 손님이 오기 전에 거실 청소기도 돌려야 하는데 아이는 칭얼대고 독박 육아를 하려던 계획은 숲으로 돌아가고 샤로프든이 결국 아이를 재우고 놀아주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식사는 커피 한잔을 겨우 타 주고 10시나 되어서야 빵과 잼을 겨우 차려줄 수 있었는데 혼자 독박 육아를 하려고 마음먹고 하루를 지내보니 그동안 남편이 얼마나 집안일을 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원래 같으면 내가 요리를 할 때 남편이 했을 일들이었는데 남편도움 없이 하루를 보내려 하니 전쟁터가 따로 없었고 그동안 남편이 집안일을 안 한 게 아니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해 주었다.
하루를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남편에게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니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다.
평소에도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많이 해왔는데 원래 같으면 의견 차이를 느끼면 남편의 말에 부정을 하고 그 말들이 상대방에게 기분이 나쁠걸 알면서도 나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했을 텐데 긍정적으로 생각해야겠다는 의식을 계속하고 있으니, 말을 하기보다 열심히 듣는 나의 모습을 보았고 긍정적인 말들을 해주려 하다 보니 남편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며 맞장구도 쳐주게 되고
그러다 보니 듣는걸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남편은 오늘따라 신나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이렇게 사이좋게 지낼 수도 있는데 서로에 대해 잘 알면서도 왜 이런 사소한 일들을 배려하지 못했나 싶었고존대해주고 존중해주니 남편도 평소보다 나에게 더 따뜻하게 대해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 앞으로는 남편이 아닌 나를 위해서라도생각날 때마다 의식적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밤 열 시가 되어 갈 때쯤 남편은아주 자유로운 하루를 보내며 컴퓨터로 소설책을 읽고 있었는데 원래 같으면 목욕시킨 아이의 옷을 입혀달라고 했겠지만 샤로프든 에게 편하게 컴퓨터 하라고 이야기해주었고 남편 도움 없이두 아이를 모두 씻기고 나와 옷을 입혔다.
그리고 남편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두 시간 남았어~~
평소에는 집안일에 투덜대는 나였지만 생각의 힘이 이런 것인가.
힘들어도 힘들지도 않았고 준만큼 무언가 더 많이 받은 것 같아 오늘 남편의 생일파티는 내게 더 행복한 하루였다.
-epilogue-
이번 주는 남편 생일이니까 생일을 주제로 브런치에 글을 써야지!
지난주 나는 브런치에 생일을 주제로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어떤 음식을 할지 무슨 선물을 할지 여러 계획을 세웠는데,
계획을 세우고
생일파티를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글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글이 사람을 만드는구나.
다정하고 화목한 가족의 글을 쓰기 위해 가족들과 더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 글을쓰는 것과, 이 보잘것없는 글을 읽어줄 분들께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