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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in Feb 07. 2024

우즈베크 가족의 죽음으로 깨닫게 된 것

남편과 자고 있던 늦은 밤

시어머니가 조용히 우리방에 들어와 말씀하셨다.


sharofiddin dadas o'ldi

샤로프든, 다다스 올드 (샤로프든, 아버지 돌아가셨다)


시아버지는 한참 코로나 때 몸이 약해지셨는데 우리에겐 그냥 감기기운이라 하셨지만 평소 심장이 좋지 않으셨던 아버님은 그날 일찍이 잠이 드셨고 잠든 사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잘 때 깊이 자는 나인데도 그날은 작은 어머님의 목소리에 잠이 깼고 모르는 단어였음에도 발작하듯 일어난 나는 이상하게 우즈벡어가 들렸던 것이다.

옆에 있던 남편은 심장이 떨어진 듯 일어나 입을 막고 우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버님과 안 시간 고작 4년,

나는 이게 전부인데 남편은 오죽할까.

한국에 있어 아버지 가는 길 보지 못하고 아이를 봐준다는 이유로 시어머니마저도 한국에 계셨으니 넓은 집에서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하는 마음에 이게 어쩌면 한국인 며느리인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까지 들어 시댁 가족들에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종교가 있어서였을까, 내게 소리 내 울면 안 된다는 남편은 기도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 되자 남편에게 이럴 때일수록 나가서 일하라는 시어머니 말에 남편은 공장에 출근을 했다.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기어코 나간 우즈베크 남편은 출근하고 힘들었는지 사장님께 사정을 이야기하고 다시 들어와 기도를 했는데

늘 힘들 때 기도하던 남편, 이날은 기도의 힘을 얻지 못하였는지 조용히 계속 울고만 있었다.


아버님께 잘해드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울며 미안하다 하는 내게 미안할 거 없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는데 이 와중에도 나는 남편에게 위로를 받고 있는 입장이 되었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외에는 가족들이나 주변에 돌아가신 분이 없어 죽음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던 나는 아버님의 죽음이 임신 중인 내게 큰 충격과 무서움이었는데 그 슬픔이 가시기도 전.

1년 후 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여러 아들 중에 아버님을 가장 예뻐하셨고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바로 전 사우디에도 기도하러 함께 다녀왔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다음 해 그것도 아버님 생일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의 대가족 문화, 가족이 많아서라고 하기엔 너무도 슬픔 죽음이 그 해 겨울 또다시 찾아왔다.


사촌형의 췌장암 선고.

사촌형은 남편이 타슈켄트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함께 방을 구해 지냈는데 형은 열심히 공부해 검사가 되었고 그 덕에 우즈베키스탄에서 체류 서류를 늦게 제출해 벌금을 낼 뻔했을 때 사촌형의 도움으로 벌금 없이 서류를 받기도 했는데 그 이후 아프다는 소식에 나는 한국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나 방법을 알아본 적이 있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 검사 특성상 보안 문제로 비자발급이 늦어져 결국 손 쓸 시간도 없었고 그렇게 네 명의 어린 자식을 두고 삼십 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사촌형은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가족들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

얼마 전 이모님이 돌아가셨다.

사촌형이 아플 때 먼 길까지 달려가 간호해 주며 사촌형이 죽었을 때 슬피 울던 이모님 모습이  엊그제 일 같은데 믿기지 않는 이모의 죽음.


내겐 시어미니보다 가까운 이모님 두 분이 계신다.

한국에 오래 살아 나를 잘 이해해주시고 우리가 결혼할 때 반대하는 시어머니에 든든하게 내편 들어주신 큰이모.

한국사랑이 대단해 한국인 며느리인 나를 연예인처럼 대해주며 잘해주시는 막내이모.

 돌아가신 막내 이모는 우즈베크에 갈 때마다  어딜 가도 꼭 나를 데리고 가려 하고 결혼식에 가도 이모는 자신의 며느리처럼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키곤 했는데 한국에서 가져온 내 짐을 보며  드릴 수 있는 물건을 선물로 드리면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10시간이 넘는 공항까지 매번 마중을 나오시고 데려다주시고 하시면서 시어머니보다 내겐 더 편하고 좋았던 이모님.

그런 이모님이 재작년 우즈베크에 갔을 때 안색이 어두워 어디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아 병원에 가보셔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씀드렸는데 가족들은 병원에 다니고 있다고 걱정 말라고만 하셨다.

병원에도 알아서 잘 다니시는구나 싶어 안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려는데 이모님께 신세를 많이 진 나는 남편에게 이모님 비싼 옷 한 벌 사드리고 가자 했지만 다음에 사드리면 된다는 남편이었다.

무심한 남편에 나는 고마움과 빚짐 마음을 어찌할까 하다 환전했던 남은 돈을 이모님께 모두 드렸는데 한국으로 출발하기전 나도 한국 가고 싶다던 이모님.


음식을 너무 잘하시니 한국 와서 나중에 꼭 식당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왔는데


나중은 없었다.


이모는 간경화로 간이 점점 딱딱하게 굳고 복수가 차 호수를 꽂아 물을 빼기도 하고 피를 토하며 갑자기 사람을 못 알아보고 어린 아이처럼 되기도 했는데 병이 갑자기 악화되더니 그렇게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이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내겐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느껴져 처음엔 남편에게 화를 낸 적도 있다.

우즈벡어를 모르니 평소 가족들의 사소한 대화에 낄 수가 없어 내가 가족들의 건강을 미처 알지 못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왜 가족들 아픈걸 미리 말하지 않았냐 남편에게 따지기도 했는데 남편의 큰 슬픔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우즈베크 가족들의 죽음 이후 나의 삶은 많이 달라진 듯 하다.

죽음에 대해 매일 생각하게 되었고 갑자기 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반대로 내 삶에 감사함도 느끼고 있다.

지금 가족의 건강에 감사함, 아이들의 감사함, 부모님이 건강한 것에 감사함

친정엄마는 전화를 너무 자주드려 가끔 귀찮아 보이는 듯 하지만 나는 매일같이 엄마와 수다를 떨고, 아버지께 전화를 드리고 남편에게도 하루에 세네 번 문득 죽음이라는 단어가 떠오를때마다 옆에 잘 있어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는다.

처음엔 뜬금없어하던 남편도 지금은 그 단어 한마디에 좋아하고 우리가 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일이 잘 안풀리거나 하루하루 작은 일에도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이제는 이전과는 다른 여유라고 해야 할지, 이런 것들이 별 대수롭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둥바둥의 삶이 아닌

욕심은 내려놓고

작은 것에 감사한 마음

이것이 죽음을 매일 생각할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인듯하다


남편도 가족들의 죽음으로 많은 심경의 변화가 있는 듯 보였는데 다행히 이번에 어머님 뵈러 우즈벡에 한달간 다녀오면서 얼굴도 많이 좋아졌고 이럴때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종교가 있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편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요즘 이사 후 대출은 많아지고 나가는 돈이 많아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작하게 된 것이 하나 있다.

기부


하루에 천원씩 아기 분유통에 기부하능 남편을 보며 난 돈 많이 벌면 고아원을 지을거라고 말해왔는데 나중이 아닌 지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고 없을 때 하는 기부의 가치가 더 큰 거야

라고 말하는 남편에 용기를 얻어

기부로 내가 더 행복해져야겠다는 어쩌면 이기적인 마음으로 작지만 정기후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남편 귀국 하자마자 외가댁 식구들과 산천어 축제 다녀왔어요!

건강하게 살아있는 지금,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봐야지

하루 하루를 감사히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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