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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in Sep 23. 2023

우즈벡 남편과 신축 아파트에 가면 생기는 일

어렸을 때 집에 대한 기억으로

눈물의 아파트 입성!


6년 전 지인의 소개로 엄마와 모델하우스에 갔다가 덜컥 사버린 지역주택 조합 아파트.

지역주택조합이 뭔지도 모르는 부린이도 아닌 나부랭이? 인 나는 공장과 인력사무실을 직원처럼 나가며 남편이 모은 돈과 시엄마와 함께 살면서 나가 번 내 전재산을 넣어 집에 투자했는데


3년이 지나도 터파기조차 않던 아파트가 드디어 다음 달이면 입주를 한다.


그동안 남편은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지만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작은 식당을 하고 싶은 꿈이 있다는 걸 알아서 나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그렇게나 속 썩이던 아파트가 지어져 너무나도 기뻤고 집에 대한 큰 애착이 없던 남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며 가며 아파트 올라가는 것을 흘끔흘끔 보던 남편도 내심 기다린 듯하다.

입주를 한 달여 정도 앞두고 우리는 오늘 사전점검을 다녀왔는데 들어가는 입구부터 정장을 입은 분들의 인사와 함께 지하 주차장까지 바닥에 깔려있는 레드카펫은 곰팡이 냄새가 나는 우리 집 주차장과는 너무나 다른 낯선 이곳이었다.

담당 안내원의 입주를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집안을 들어서는데, 집보다도 집을 들어가며 행복해하는 남편의 모습이 내 마음에 더 깊숙이 들어온 것 같다.


사전점검 방식은 집을 둘러보면서 하자가 있는 부분은 사진을 찍어 전송하면 바로 수리가 가능한 부분은 직원분들이 와서 고쳐주었는데 여기저기 큰 눈으로 잘도 찾는 우즈베키스탄 남편,

요즘 아파트는 처음이라 수납장을 여는 것도 어설픈 나와는 달리 쫌 살아본 사람처럼 내게 이것저것 말하는 게 이것이 아파트 현장에서 일했던 짬바인가? 싶었다.


남편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시댁 가족들에게도 보내주었는데 한국이라고만 해도 늘 신기해하고 좋아해 주는 시댁 가족들은 우리보다 더 기뻐하며 새로 가는 집에서도 좋은 기운 많이 받고 행복하라고 덕담해 주셨다.


사전점검에 우리 부부보다 내심 더 기다린 듯한 엄마 아빠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설비 기술자인 아빠는 보일러실로, 전기기술자인 엄마는 전기 콘센트와 전기를 찾아 검사하듯 살펴보셨는데 좋으면서 무심해 보이는 아빠는 베란다를 보며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빠를 보며 어렸을 때 기억이 스치듯 떠올랐는데,


내가 지금 우리 딸내미 나이만 할 때 정도였나

여름 장마가 시작되면 쓰래트로 지어진 우리 집은 늘 물에 잠겨 이럴 때면 아빠의 트럭을 타고 동네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로 피신하여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었는데

어떨 때는 자다가 나간 적이 있어 미처 옷도 챙겨 입지 못해 옷이 다 젖으면 엄마는 감기에 걸릴까 싶어 아파트 의류함에 있는 옷을 꺼내 오빠와 내게 입혀주기도 했다.

 

나는 못 봤지만 언젠가 오빠는 물을 퍼내면서 슬피 우는 엄마를 보았다고 했는데 이런 엄마를 두 번 슬프게 했던 건 학원차가 집에 데려다주면 친구들이 놀릴까 봐 집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아파트에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엄마에게 들켰을 때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도 이재민에게 학교에서 잠자리도 제공해 주고 새 노트와 팬을 나눠주면 그때는 또 그게 뭐가 그리 신나던지.

신나던 것도 잠시 또 그 와중엔 식중독에 걸려 고모집에 머무르게 되었고 뉴스에서 쓸려나간 우리 집이 나온 건 너무 신기해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이런 어렸을 때의 기억 탓일까.

부모님도 나도 시골 그 어디라도 안전한 보금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 같다.


사람들은, 지금은 집을 사면 된다 안된다를 말하며 전세와 월세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무조건 서울에 살아야 한다는 사람과 지방이어도 쾌적한 곳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 등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어쩌면 이들도 자신만의 어떠한 사연과 이야기로 사로잡힌 기억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많이 못해준 미안함 탓인지 생활이 예전보다 좀 나아진 부모님은 우리 아이들에게 만큼은 묻고 따지지도 않고 다 사주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고, 엄마가 되고서야 그때를 기억해 보면 그런 집이었어도 오빠가 좋아하던 삼겹살과 내가 좋아하는 양념통닭을 매일 같이 사줬던 기억,  늘 어디를 데리고 다니며 여기저기 보여주고 싶어 하던 게, 부모님의 사랑만큼은 늘 풍요로웠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안전한 나의 집에 대한 집착,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앞으로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의 생활은 타지에서 온 외국인 남편에겐 고향이 그립지 않을 만큼의 따뜻한 보금자리를, 아이들에게는 사랑을 가득 줄 수 있는 아내이자 엄마가 되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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