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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의 어떤 순간을 기록하고 기억할 것인가

금쪽같이 소중한 존재라면서

by 토마

https://youtu.be/gimUloBtVRo?si=n_RHoeSjBLB90G4


감상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연주: 신창용)


저녁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면 시간 맞춰 나오는 TV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금요일 저녁 8시 10분에 방영하는 <금쪽같은 내 새끼>다. 양육자가 아닌 입장으로서, 그러나 두 조카를 둔 이모이자 여러 명의 어린이들과 교육 현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어른의 입장으로서 어린이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어린이들을 대하는 좋은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싶어서 매주 챙겨보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몇 년 전, 이 프로그램을 처음 봤을 때는 육아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좋은 취지를 가진 방송이라 생각했다. 전문가가 개입해서 난감한 아동 문제를 진단하고, 구체적인 솔루션을 제시하며, 온 가족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유익한 프로그램. 실제로 많은 부모들이 '내 아이라면 어땠을까', '저런 경우 어떻게 해야 맞을까'라고 자신의 일처럼 공감하고 고민하며, 아이들과 부모의 내밀한 속마음을 확인할 때는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으로서 위로받는다는 '힐링' 후기도 적지 않다.


그런데 몇 회를 보다 보니 자꾸만 불편한 마음이 생겨났다. 특히 음악학원에서 어린이들을 매일 만나는 내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금쪽이'라고 자막을 달지만 부모의 입에서는 아이의 실명이 거론되고, 아이들의 나이와 얼굴이 가감 없이 공개된다. 구체적인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사는 동네와 학교는 그 풍경을 통해 짐작할 수 있고, 무엇보다 '금쪽이'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 아이의 존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도록 특정화되어 있다. 화면 속 아이들을 보며 걱정이 되었다. 저 아이는 이 촬영에 동의했을까. 잊힐 권리를 박탈당한 어린이의 삶은 누가 책임져줄 것인가.


정신과 전문의가 진단하는 솔루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금쪽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금쪽이는 본래 금쪽같이 소중한 존재라는 예쁜 의미를 담은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아이들에게 사용되면서, 사실상 '문제아'의 완곡한 표현이 되었다.


심하게 떼를 쓰고, 사교성이 전혀 없고, 형제를 괴롭히고, 밥을 먹지 않는 아이. 몸에 자해를 하고, 부모에게 욕설을 내뱉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아이. 방송은 어린이의 문제 행동을 콘텐츠로 삼는다.


카메라는 아이가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순간을 클로즈업하고,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욕설을 내뱉는 자극적인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반복적으로 비춰준다. 부모의 곤란한 얼굴, 아이를 지켜보는 주변인들의 당황한 얼굴을 번갈아 보여주며 시청자가 혀를 내두르도록 부추긴다. 편집된 영상에는 자막이 달리고, 효과음이 들어가고, 때로는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기도 한다.


아이의 가장 힘든 순간, 가장 감추고 싶은 순간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반복 재생된다. 금쪽같이 소중한 존재라면서 그 아이의 가장 사랑스럽지 않은 모습을 전국에 방영하고 박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어른도 방송 출연을 결정할 때는 신중하게 고민한다. 내 얼굴이 공개되는 것, 내 사생활이 드러나는 것, 내 모습이 어떻게 편집될지 모르는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고,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출연을 결정한다. 어른은 스스로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고, 선택에 책임질 수 있다. 물론 각오를 했다 하더라도 방송 후 여론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통제할 수 없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아이들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오늘 방송은 금쪽이가 먼저 출연 신청을 했어요'라는 특별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모가 출연을 결정한다. 아이를 통제할 수 없는 부모는 "TV에 나가서 전문 선생님의 도움을 받자"라고 아이에게 말했을 것이다.


아이는 방송이 무엇인지, 전국에 내 모습이 방영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영상이 인터넷 세상에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어렴풋이 짐작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파급 효과를 가져올지까지 상상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린이에게도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통제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아이들은 그 권리를 행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부모의 동의만으로 아이의 얼굴, 이름, 일상, 심지어 문제 행동까지 모두 공개된다. 그것도 가장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법적으로 미성년자의 방송 출연은 법정대리인인 부모의 동의로 가능하다. 하지만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윤리적으로 옳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프로그램의 구조를 보면 더욱 씁쓸해진다. 먼저 가정에서 촬영한 아이의 일상 영상이 나온다. 문제 행동을 하는 장면들이 주를 이룬다. 그다음 스튜디오에서 부모가 그 영상을 보며 전문가와 대화를 나눈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거나 "제가 잘못 키운 걸까요?"라는 단골멘트를 하는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무력감을 토로한다. 전문가는 영상을 분석하며 부모의 양육 방식을 지적한다. "이렇게 대응하니까 아이가 더 심해지는 겁니다." 부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부모의 육아 실패를 증명하는 증거물처럼 다뤄진다. 후반부에 가서야 아이들의 속마음을 들어볼 시간이 허락되지만, 그 전까지는 다각도로 관찰되고 분석되는 대상일 뿐, 스스로 말하는 주체가 아니다. 정작 "나는 왜 이렇게 힘든지", "나는 무엇이 필요한지" 아이 자신의 목소리는 뒤로 밀려난다. 아이에게도 마이크를 쥐어준다면, 내 부모와 선생님, 이 사회를 어떻게 평가할까.


나 역시 학원에서 아이들과 연주 영상을 촬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절차다. 먼저 아이들에게 사전 촬영 동의를 받고,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리며, 결과물은 본인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게재 허락을 받는다. 모든 절차를 거친 후에야 인터넷에 공유한다.


가끔 아이들이 무방비한 상태에서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그 찰나의 소중한 순간들은 어떻게 해서든 사진이나 영상으로 담아서 간직하거나,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충동이 든다. 부모님께 보여드리거나 외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몰래 뒷모습을 촬영하거나 멀찍이 떨어져 찍었다가도, 이내 어린이들을 콘텐츠화하거나 학원 홍보에 이용하려는 안일한 모습으로 비춰질까 싶어 그만둔 적도 있다.


꼭 이 모습을 사람들에게 공유해야 할까? 나는 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이런 고민을 할 때마다 화면 속 '금쪽이'들이 떠오른다. 그 아이들의 가장 힘든 순간을 담은 영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방송을 통해 전문가를 만나 육아로 지친 부모를 돕는 것은 분명 유익한 일이다.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한 가정도 분명히 존재하며, 육아 솔루션이 많은 부모들에게 위로와 정보를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꼭 방송을 통해, 아이의 얼굴을 공개하며, 아이의 문제 행동을 편집해서 여러 번 반복 재생하는 방식이어야 할까? 상담은 사적인 공간에서도 가능하다. 전문가의 도움은 카메라 없이도 받을 수 있다. 육아 정보는 책이나 강연, 온라인 콘텐츠로도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예능은 그런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볼거리'가 되지 않고, 화제를 모으지 못하면 시청률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전문가의 솔루션보다 아이의 문제 행동이 전반부와 중반부까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족의 변화보다 극적인 순간이 더 강조된다.


결국 이 프로그램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이의 평안과 행복, 가족의 성장이 아니다. 아이의 문제는 해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소비되어야 할 콘텐츠가 된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점점 투명해진다. 금쪽같이 소중하다면 그 아이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금쪽같이 소중하다면 아이가 가장 힘들어하는 순간을 온 국민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금쪽같이 소중하다면 아이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존중해줘야 하지 않을까?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고, 서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이를 위한다는 진심도 믿는다. 용기내어 출연한 방송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로 연결된 사례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이유로,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아이의 동의 없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걸까?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부모의 결정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객체가 아니다. 독립적인 인격체이며, 존중받아야 할 권리의 주체다. 비록 어리고 미성숙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보호받아야 하고, 아이와 관련된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부디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자신의 과거를 떠올릴 때 상처가 아닌 추억으로 그 순간들이 남기를 바란다. '문제아'라는 뒤틀린 의미가 아닌, 그 본래적 의미에서 금쪽같이 소중한 존재로 대접받기를. 골칫거리 애물단지가 아닌 한 명의 인격체로,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나다운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어른들의 흥밋거리로 완성된 장면들이 어린이의 자존감과 삶을 흔드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린이가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실패의 흔적들이 낙인이 되지 않도록 어른들의 따뜻한 배려와 윤리의식이 더욱 필요하다.


서툴고 망설이고, 때로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파괴적인 모습도 온전히 존중받아야 할 삶의 일부다. 그것은 결코 쉽게 소비되어서는 안 되는 한 존재의 역사이고, 몸으로 버티며 쓰는 기록물이다. 우리가 어린이의 시간에 귀 기울여 들어줄 때, 이들은 비로소 자기만의 인생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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