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원>이란 소설은 상당히 개연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는 좋은 것도 많으나, 그렇지 못한 것도 제법 많다. 어떤 사건에 내가 관련될 수 있으나, 만일 가족이 관여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딜레마에 부딪힌다. 소설 <염원>은 바로 그런 개연적 요소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우리는 TV나 인터넷으로 통해 범죄나 각종 사건에 대한 뉴스를 접한다. 뉴스를 접하면서 그 일들이 나하고 전혀 상관없이 무관한 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남에게 일어난 불행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기만적 태도가 우리를 지배한다.
남의 비극은 분명 그들에겐 아픈 일이나, 그래도 나에게 닥친 일은 아니다. 그저 미디어라는 정보에 노출되어 우리의 시간 속에 흘러가는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어떤 범죄에 휘말리거나 사고에 얽매인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는데 말이죠.”라고 말이다. 물론 사건사고 피해 당사자가 본인이라면 어떻게든 혼자 감내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피해 당사자가 가족이고, 그중에서 자녀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염원>을 보면서 뜬금없이 세월호 사고에서 희생된 어린 학생들이 생각났다. <염원>에서 다다시군은 고등학생이고, 세월호 학생들도 고등학생이다. 제법 키는 성장하고 의지는 강하나 어른보다 몸과 마음이 작은 친구들이다. 하지만 꿈과 희망은 어른보다 더 웅장하고 거대하다. 그런 친구들이 세상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이대로 꺾이고 만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지만 다다시와 세월호의 아이들은 다른 차이점이 있었다. 세월호 희생자는 완벽한 피해자이나, 소설 <염원>에서 다다시는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소설을 읽으면서 가즈토와 기요미, 그리고 미야비라는 세 명의 가족이 큰 아들 다다시의 실종에서 겪던 심적 변화와 주변의 환경 등은 분명 그 가족에게 큰 시련으로 다가온다. 당연한 일이나 사실 그 일들은 피해 당사자에게 당연한 일들이 아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개인이나, 범죄에 따른 책임문제는 그 가족과 사회 일원에게 같이 분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다시의 실종과 살인사건이 보도되면서 그렇게 화목하면서도 화목하지 않았던 평범한 가정은 파탄에 이른다.
아들이 살인을 저지르면 그 자체가 삶의 파괴로 이어지고, 아들이 살인을 당하면 그 여파로 삶이 무너진다. 하지만 2가지 갈래에서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기대어할까? 아니면 주변 환경과 조건은 어떻게 만들어져 갈까? 작품에서 다다시가 살아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그 아이는 살인범이 되는 것이고, 만일 죽게 되면 살인 피해자가 되나 다다시는 남을 헤치는 사람이 아니게 된다. 가족이 만일 그런 일에 처해지면 참으로 곤란하게 될 것이다. 다다시가 정말 사람을 죽인 것도 판명되지 않았는데, 실종자가 곧 살해용의 후보자란 점에서 세간의 차가움은 피할 수 없었다.
집 현관에 계란을 던지고, 명패에 페인트를 칠한다. 사업과 관련하여 거래처가 끊기고, 주변에 같이 사업하던 사람들의 인맥까지 사라진다. 생계와 친구까지 없어진다. 인간관계 모두가 파탄 난다. 다다시란 인물은 전형적인 남자 고등학생 같다. 친구를 좋아하고, 친구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손해 봐도 참아주는 유형이다. 그래서 부모님의 간섭에도 그는 자신의 길을 간다. 또한 부모님의 기대감을 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절제하는 모습도 나온다. 삶의 구원에서 절망의 순간은 이렇게도 희비가 엇갈린다.
살인범이라도 세상 앞으로 같이 살아갈 건지, 아니면 죽음으로 통해 결백을 주장하던지 말이다. 물론 아들이 살아있으면 좋겠지만, 아들의 결백 역시 해명되는 것도 중요하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선택하기 어렵다. 만일 아들이 죽지 않았다면 가즈토의 인생은 사회적 매장당했을 것이고, 미야비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으며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 기요미는 가즈토와 미야비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가사 주부로 지내며 교정 일을 맡고 하고, 그 일은 회사와 미야비만의 비공개적으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업가 가즈토, 학생 미야비, 구원이란 형태는 최악의 상황으로 돌아왔다. 사업도 가족도 외면당한 가즈토에게 다다시의 죽음은 3 사람의 새 인생을 시작하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이 원동력은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소설 <염원>은 스토리 적으로 결론은 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과정을 중시하는 소설이다. 결과론으로 모든 것을 성과로 보는 세상에서 과정의 성찰은 우리 삶에 필요한 요소이다. 내 생각에게 가즈토 가족을 괴롭히는 요소에서 주변 이웃의 집단 괴롭힘과 인간관계 단절보다는 언론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 전화와 핸드폰이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 발신으로 가득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생활을 염탐한다. 하다못해 2층 딸의 방 안에까지 카메라가 주시하고 있다. 완벽한 감시, 그리고 말꼬리를 잡아 악의적인 보도로 나간다. 개를 데리고 밖에 산책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내보내 죄책감이 없는 부모로 묘사한다. 특종에 눈이 멀어 가족들을 마치 구경거리 조롱 대상으로 만든 언론을 보면서 가즈토 가족들은 더 힘든 시기를 보낸다. 그뿐만 아니라 범죄와의 문제는 단순히 조롱과 비난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징역이 얼마나 나올지도 모르고, 상대방에 대한 배상책임도 어디까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남은 것은 오명과 어둠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구원이 다다시의 죽음이고, 그 죽음을 바라야 하는 것이 진정한 <염원>일지 아니면 살아오는 게 <염원>일지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성적으로 보면 다다시의 죽음이 많은 것들을 지켜준다. 하지만 우리는 머리보단 마음 안에 숨겨진 무의식 내지 감정에 더 많이 마음이 간다. 다다시처럼 가족이 살인사건에 얽혀 들어가면 우리는 분명 직접적으로 살인과 무관하고 별 탈 없이 살아 돌아오면 좋겠지만, 현실이 그게 아니라면 어떤 것을 택하고 만족해야 하는가? 어떤 선택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