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무도 없는 계단 모퉁이에 도토리를 올려놓는 마음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한 마음

by 글쓰는토마토


잘 살고 있다는 건,

어쩌면 내 마음에 이름 모를 타인이 들어올 한 뼘의 여유를 남겨두고 일일지도 모른다.




작년 가을, 구례에 있는 천년고찰 화엄사를 다녀왔습니다.

산속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화엄사를 거닐며 조용하지만 깊이 스며드는 휴식을 취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중, 화엄사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구례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연기암 표지판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옳다구나!' 차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가는 길이 생각보다 멀어서 중간에 '이 길이 맞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다행히 곳곳에 세워진 표지판 덕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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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암에서 내려다본 구례 전경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시간을 내서 올라오길 정말 잘했다, 싶을 정도로 탁 트인 전경을 보니 눈이 시원했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맑은 계곡물 소리, 상쾌한 바람에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까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속세에 찌든 마음이 깨끗해지는 듯했죠.

'이래서 사람들이 절을 찾는구나'하고 자연스레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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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콧노래를 부르며 절을 거닐던 중, 제 눈에 어떤 것이 들어왔습니다.

바로 도토리였습니다.

계단 기둥 끝에 올망졸망 놓인 귀여운 도토리들을 보니 저절로 제 입가에 미소가 맺히더군요.

스님들이 동물들을 위해 도토리를 올려두신 것 같았습니다.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 굶주린 동물들이 지나가다 발견하고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제가 굶주린 다람쥐가 된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그 마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 이 귀여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지금, 참 신기합니다.

그 이후로도 일상 속에서 종종 계단 위에 놓인 도토리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그 풍경이 화엄사의 매화 나무보다도, 연기암에서 내려다본 구례 전경보다도, 제 마음 속에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왜 그럴까. 너무 귀여웠기 때문일까요. 아마 그건 아닐테죠.

아마도 도토리에 담긴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들을 위한 그 따뜻한 마음이 도토리가 놓인 풍경에 고스란이 녹아있었기 때문이겠죠.



저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한 마음을 발견할 때 어쩐지 울컥하곤 합니다.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거나, 행동으로 배려하는 모습을 볼 때 어쩌면 이것이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작 도토리가 놓인 풍경에 유난스레 마음이 움직이는 건, 어쩌면 제 안에 저로만 가득 차있어서 그런걸까요?

빼앗기는 게 싫어서 남은 것도 남에게 내주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었던 부끄러운 손을 괜스레 주머니 속에 넣어봅니다.



나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마음 속 한뼘의 공간을 남겨두고 그들과 무언가를 주고받을 여유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내어줄 마음에 한뼘의 공간을 남겨둔다면, 그곳은 텅빈 공간이 아니라 언젠가 누군가의 온기로 가득 채워져 결국 나를 더 온전하게 만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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