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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환 May 16. 2016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인터넷


하이데거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우주나 세계 전체, 즉 동물, 식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의 총합이 곧 세계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Heidegger, 1988, p. 165). 왜냐하면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세계내부적” (innerweltlich; intraworldly) 사물이며 따라서 세계 “안에” 있는 것이지 세계 자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세계내부적 사물들은 이미 “세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총체가 곧 세계가 될 수는 없다. 하이데거는 세계의 현상학적 개념은 일반적 개념의 세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과연 “세계”란 무엇인가? 

   

세계는 "눈 앞에 있는 외재적인 (vorhanden; extant)" 실체들의 총합이 아니다. 세계는 결코 외재적이지 않다. 세계는 세계-내적-존재의 결정체이며 현존재의 존재양식 구조내에서의 한 계기다. 세계는 무엇인가 현존재와 관련된 것이다. 세계는 사물과 같은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 (Dasein)처럼 그곳에 던져저서 (da) 여기 그리고 저기에 실존하는 것들 (das Da-sein)이며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와 같은 차원의 것이다. 말하자면 세계는 인간들처럼 실존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같은 이러한 존재의, 바로 현존재의, 존재 양식을 실존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러한 사실이 함축하는 바는 세계는 외재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것이며 바로 현존재의 존재 양식을 지닌다는 것이다 (Heidegger, 1988, p. 166).


세계는 마치 현존재처럼 실존하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인터넷 상에서 구현된 다양한 웹사이트나 소셜미디어 등은 바로 현존재의 존재 양식을 지니는 세계의 일부다. 예컨대 페이스북은 바로 우리 눈 앞에 있으면서도 외재적인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외재적이지 않다. 디지털 존재로서의 웹사이트들은 “그곳에 던져저서 여기 그리고 저기”에서 실존하는 현존재와도 같은 것이다.


인터넷은 현존재의 실존적 공간성의 지평을 열어 놓는다. 하나의 세계-내적-존재 (being-in-the-world; In-der-Welt-sein)로서 현존재는 세계를 배려 (Besorge; taking care of) 한다. 다양한 웹사이트 들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세계를 배려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사물을 배려하는 세계-내적-존재는 그것이 배려하는 세계 안으로 편입된다” (Heidegger, 1996, p. 57).


나는 인터넷을 통해서 뉴스도 읽고,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쇼핑도 하고, 다른 사람(현존재)와 대화도하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글도 쓴다. 물론 다양한 정보와 지식도 얻는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바 처럼,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세계-내적-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Heidegger, 1996, p. 57). 

여러가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한 개인으로서의 나는, 슈츠(Schutz, 1973, p. 141)가 말하는 바의 “전체로서의 완성된 개인 (Gesamtperson)"이 되며 “공유된 삶을 사는 공동체 (community based on life shared; Lebensgemeinschaft)”속에서 하나의 집합적 개인이 된다.


인터넷을 통해서 나는 환상적이 게임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온라인 게임 속에서 한 왕국의 왕이 되기도 한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지만 그 꿈은 이 전지구적 공동체 속에 실존하는 다른 이들과 함께 공동으로 체험하는 꿈아닌 꿈, “집단적인 꿈”인 것이다. (꿈은 원래 순수하게 개인적인 “경험”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나는 다른 이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이 세계의 일부를 이루며 그들과 함께 이 세계 속에 거주하는 세계-내적-존재가 된다. 나는 웹을 통해서, 웹으로 만든 세계 안에서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지닌다. 인터넷은 이제 우리의 한 존재 방식이다. 나는 월드와이드웹 안에 존재하기에 세계-내적-존재이다. 웹을 통해서 나는 많은 사물들을, 다른 현존재들을, 따라서 이 세계를 배려한다.  


“배려한다 (taking care; Besorge)”는 말의 뜻은 학술적 의미 이전의 여러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행한다는 것, 무엇인가를 보살핀다는 것,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한다는 것 등의 뜻을 가진다. 그것은 또한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배려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자면, 현존재는 염려 (Sorge; care)이다. 왜냐하면 세계-내적-존재는 본질적으로 현존재에 속하며 그것이 세계로 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배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Heidegger, 1996, p. 53).


인터넷에서 나는 다른 현존재와 함께 있을 수 있다. 하이데거가 지적한 것처럼, “함께 있는다는 것”은 물리적 근접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의자는 책상과 “함께 있을” 수 없다. 비록 의자와 책상 사이에 아무런 공간이 없다 하더라도 의자가 책상을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Heidegger, 1996, p. 52). 존재론적으로 말해서, 의자와 책상은 동일한 세계 안에 "있을 수 (in-Sein; be in)" 없다. 왜냐하면 의자와 책상은 동일한 세계에 “거주”하거나 “머무는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와 함께 있는 것 (being together with the world)은 “안에 있음” (in-Sein; being-in)에 기초한다. 하나의 실존범주 (existenzial; existential)로서, 세계와 “함께 있음 (being with; Mitsein)"은 결코 객관적 사물이 물리적으로 같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존재가 ”세계“라고 불리우는 존재와 함께 있다는 것은 결코 물리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Heidegger, 1996, p. 51).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웹을 통해서 만나는 다른 현존재와 “함께 있을” 수 있고 또 웹을 통해서 배려하는 이 세계와 “안에”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의 “안에 있음 (in-Sein; being-in)”과 “함께 있다”는 것은 결국 서로 “배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Heidegger, 1996, p. 53).


비록 내가 원하지 않는 이메일 광고나 게시판의 무의미한 장난 메시지를 무시할 때라도 나는 다른 현존재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배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락하고, 무시하고 비난하고 저항하는 것들은, 비록 그것이 최소한의 배려이긴 하지만 모두 무엇인가를 배려하는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Heidegger, 1996, p. 53).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세계-내적-존재라 정의 내리는데, 여기서 “내적 (In-Sein; being-in)"이란 것은 마치 물 컵 안에 물이 담겨 있고 옷장 안에 옷이 걸려 있는 것처럼 무엇이 무엇인가의 안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Heidegger, 1996, p. 50). 오직 물질적 대상만이 세계-공간 안에 (within) 있는 것인 반면, 현존재의 ”안에 있음“은 실존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디지털 존재는 모든 형태의 지각대상을 재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전복제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 존재의 생산, 복제, 교환, 소비가 일어나는 월드와이드웹은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정화열 (Jung, 1977, p. 6)이 지적하였던 것처럼 “인간이 된다는 것은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 (To be human is to be interhuman)”이고 “인간의 실존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적인 것이다 (Human existence is relational through and through)". 사실 한자 “人間”은 바로 “interhuman"을 뜻한다. 


현존재를 세계-내적-존재로 이해하는 하이데거 역시 현존재간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다른 현존재와 공존할 가능성을 늘 열어놓고 있다. 사실적 현존재는 명시적으로든 아니든간에 “서로-어울려-함께-존재할-수-있기-위한 (for-the-sake-of-being-able-to-be-with-one- another)"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현존재는 처음부터 “타자와 함께 있는” 존재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Heidegger, 1988, p. 296).


인터넷은 시공간의 제한을 넘어 현존재로 하여금 타자와 “서로-어울려-함께-존재할-수-있기-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며 “타자와 함께 존재하기”의 새로운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의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며 또 그 세계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세계”에는 4가지 차원의 개념이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 1998, p. 96)


첫째, 세계는 “존재적 (ontischer)” 개념으로 사용되며 이 경우 세계 내부 [눈 앞에] 존재할 수 있는 “존재자의 총체 (das All des Seienden)”를 의미한다. 

둘째 의미에서의 세계는 "존재론적 (ontologischer)" 개념인데 이것은 존재자의 존재와 연관된 것이다. 예컨대 수학자의 “세계”가 수학의  가능한 대상들의 영역을 의미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셋째 차원에서의 세계는 현존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존재적"인 의미에서 살고 있는 곳이다. 공적인 세계 또는 가까운 (가정적인) 주위세계가 이에 포함된다. 

네 번째 의미의 세계는 ”세계성 (Weltlichkeit)이라는 존재론적-실존론적 (ontologisch-existenzialen) 개념“을 가리키며 세계-내적-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존재양식의 기반이 되는 세계이다. 

이 세계야말로 현존재가 다른 현존재와의 관계를 수립하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함께 있음으로서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이렇게 볼 때 월드와이드 웹은 세 번째 차원의 “주위세계 (Umwelt)"와 네 번째 차원의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세계”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잡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Note: 이글은 졸고 (Kim, 2001)의 일부를 참고하고 수정하였음을 밝혀둔다.

Kim, J. (2001). Phenomenology of digital-being. Human Studies. 24. 87-111.  


References

Heidegger, M. (1988). The basic problems of phenomenology. Translated by Albert Hofstadter. Bloomington, IN: Indiana University Press.

Heidegger, M. (1996). Being and time: A translation of Sein und zeit  Trans. Joan Stambaugh, . Albany, 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Jung, H. Y. (1997). Taking responsibility seriously. In L. Embree & K. Thompson (Eds.), Phenomenology of the political . Dordrecht: Kluwer.

Schutz, A. (1973). Collected papers vol. 1: The problem of social reality. (ed. by Maurice Natanson). Hague: Martinus Hijh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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