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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환 Apr 12. 2021

퍼스의 가추법

퍼스의 추론: 가추법

 뇌가 내부모델을 바탕으로 "추론"을 한다는 것은 뇌는 외부자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울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외부자극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조작을 재생산해낸다. 이러한 의미 부여 과정의 기본적인 논리구조가 바로 퍼스가 말하는 가설적 추론 (hypothetical inference) 혹은 가추(abduction)다. 

붉은 색의 부드러운 꽃 잎으로 이루어진 꽃 한송이를 보고 "장미꽃"이라고 지각하는 과정에도 가추가 필요하며, 꽃을 "꽃"이라 지각하는 것이나 혹은 붉은 색을 "붉은 색"이라 지각하는 과정 자체에도 가추가 필요하다. 가추는 기존의 지식 (과거의 경험들에 의해 주어지는 원칙들)과 주어진 자극에 의해 "아 이것은 붉은 색이겠구나"하는 적극적 추론의 과정을 말한다(Peirce, 1994). 확률론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베이지안 추론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고 듣는다는 것은 사실 우리의 뇌가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예측해낸 결과다. 셜록 홈스가 범죄 현장의 "단서"를 기호로 파악하고 그것의 의미를 해석해서 범인을 추리해내는 것도 가추고, 우리가 장미꽃을 보고 장미꽃이라고 지각하는 것도 가추며, 나아가 누군가 이 장미꽃을 통해 "열정적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도 가추다(Eco & Sebeok, 1983). 메를로뽕티가 강조하는 것처럼 지각(perception)은 수동적 받아들임이라기보다는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인 행위다(Merleau-Ponty, 2013).

이제 퍼스의 논의를 통해 가추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퍼스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의 삼단논법의 여러가지 형태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다가 가장 전형적인 세가지 논증형태인 연역법, 귀납법, 가추법을 비교하면서 가추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CP 2.619).  연역법은 규칙 → 사례 → 결과의 순서로 진행되는 논리구조다. 우리에게 익숙한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규칙이 있고, 에녹은 사람이다라는 사례가 있는 경우, 그 결과로서 에녹은 죽는다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CP 2.620). 이어서 퍼스는 유명한 콩 주머니 예를 통해서 연역, 귀납, 가추(가설)의 세가지 논증 형태를 비교한다 (CP 2.623). 


연역(Deduction)

규칙: 이 주머니 안에 있는 모든 콩은 하얗다.

사례: 이 콩은 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결과: 이 콩은 하얗다. 


귀납(Induction)

사례: 이 콩은 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결과: 이 콩은 하얗다.

규칙: 이 주머니 안에 있는 모든 콩은 하얗다.


가설(Hypothesis)

규칙: 이 주머니 안에 있는 모든 콩은 하얗다.

결과: 이 콩은 하얗다. 

사례: 이 콩은 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퍼스는 아직 "abduction"이라는 용어를 제안하지 않은 상태였고 대신 가설(hypothesis)이라고 부르고 있다. 퍼스의 저술을 보면 가추법을 가설 혹은 추론(inference), 가설적 추론(hypothetical inference), 가정(presumption) 등의 다양한 용어로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세번째 논증법을 "abduction"이라고 부르자는 제안을 한다(CP 2.774). 퍼스는 이 세번째 논증 형태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분석론 전서(Prior Analytics) 제2권 25장에서 아파고게 (apagögé)라는 이름으로 불완전하게 묘사했던 논증형태와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히고 있다(CP 2.776).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파고게라는 논증법은 그동안 인류 역사에서 사라져있다시피 했다. 퍼스에 따르면 이것은 전적으로 "멍청한 아펠리콘(the stupid Apellicon)"때문이다(CP 5.144).   

아리스토텔레스가 죽고 그의 유고는 200년 넘게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거액을 주고 사들인 것이 테오스의 부자이자 책수집가였던 아펠리콘이었다. 그는 여기저기 손상된 텍스트를 보완하는 등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대한 저술에 대한 최초의 편집자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퍼스에 의하면 "이 멍청한 아펠리콘이 알아볼 수 없게된 단어 대신에 자기 마음대로 엉뚱한 단어를 넣어버리는 바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파고게에 관한 설명이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들은 로마로 옮겨지고 유명한 소요학파 학자였던 티라니온에게 전달되었는데 뛰어난 문법학자이기도 했던 티라니온 역시 "아펠리콘의 편집이 지나칠 정도로 엉터리(excessively bad)였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CP 7.234). 어쨌든 퍼스는 "내 추측이 혹시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파고게라는 이름으로 가설적 추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나는 이것을 영어로 "abduction"이라고 번역하겠다"고 밝히고 있다(CP 5.144).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의 여러 형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역법, 귀납법, 가추법이었는데 가추법만큼은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퍼스가 새로이 발굴하여 2,000년 이상 잠들어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세번째 논증 방법에 "가추법(abduction)"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와 토마스 세벅의 "The Sign of Three"(Eco & Sebeok, 1983)라는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옮긴이 해제에서 가추법에 대해 자세히 정리해놓은 바 있다(한역본 제목: 셜록 홈스, 기호학자를 만나다). 이 책의 한역본은 1994년도에 <논리와 추리의 기호학>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었고, 2015년에 다시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내 생애 첫 번역서여서 그런지 많은 애착과 추억이 느껴지는 책이다. 


퍼스 철학과 기호학에 있어서 핵심 개념인 "abduction"을 "가설적 추론" 혹은 줄여서 가추법이라고 번역하기까지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하던 1994년 당시만 하더라도 퍼스 철학은 우리나라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통일된 번역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퍼스의 기호학에 대해서는 1991년 이탈리아 정부 장학생으로 볼로냐대학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deduction"은 연역법, "induction"은 귀납법으로 확실한 용어가 있었지만 "abduction"만큼은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인터넷 검색엔진도 요즈음처럼 발달하기 전이어서 여러 문헌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찾아본 몇몇 번역서에서는 "abduction"이 역자마다 각자 다 다르게 번역되고 있었다. 예컨대 "발상법(發想法)" (하버마스, <인식과 관심>, 1988, 강영계 옮김, p.119 이하) 또는 "추리법"(에코, <기호학 이론>, 1985, 서우석 옮김, p. 148 이하; 에코, <기호학과 언어철학>, 1987, 서우석, 전지호 옮김p. 67 이하) 등. 그런데 왜 그렇게 번역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커다란 영한사전도 찾아보고 혹시 일본어로는 어떻게 번역되어 있나 궁금해서 영일, 불일 사전 등을 다 뒤져봤지만 여전히 적당한 번역어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 몇 개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설 설정(형성); 불가해(不可解)한 사상(事象)을 결론으로 하여 설명할 수 있을 만한 가설; 귀납, 연역과 함께 논증의 삼분법 중의 하나라고 퍼스가 명명" (Random House English Japanese Dictionary, 2nd edition, Shogakukan : New York, 1994). 

(2) "퍼스의 용어로서,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가설의 수를 사전에 미리 줄여가는 추론상의 조작" (Dictionnaire Francais-Japanais Royal, Obunsha: Tokyo, 1985). 

(3) "아파고게; 삼단 논법에서, 그 대전제는 확실하나 소전제가 개연적 (probable)인 것 (<영한 대사전>, 시사영어사/랜덤 하우스: 서울, 1991). 

(4) "1. 아파고게 apagoge (간접 환원법; 대전제가 진이며 소전제가 개연적으로 진인 삼단 논법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명) 2. 가설 설정(발상). 퍼스가 연역, 귀납과 함께 과학적 탐구의 3개의 발전 단계의 하나로 생각하여 명명한 것" (<금성판 영한 대사전>, 서울 : 금성출판사, 1992).

"가설 설정"이나 "추론상의 조작" 등의 용어는 "abduction"의 개념을 적절히 담아내지는 못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퍼스가 "abduction"을 설명하면서 가장 강조하는 두 개념이 가설(hypothesis)과 추론(inference)이다. 가설적 추론(hypothetical inference)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고 있다. 나는 "가설적 추론"이야말로 퍼스의 "abduction"의 개념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는 용어라고 생각했다. 퍼스 자신이 "abduction"을 연역법, 귀납법과 대비해서 설명하고 있으므로 "가설적추론법"을 세글자로 줄여서 가추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겠다고 판단했다. 1994년에 "abduction"이 "가추법(가설적추론법)"이라 최초로 번역된 이후 가추법이라는 용어는 이제 여러 저서와 학술논문 등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가추법의 구조

이제 셜록 홈즈의 추리과정을 통해 가추법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어느날 자신을 찾아온 한 여성을 보자마자 홈즈는 "당신은 타자수(typist)지요"라고 한번에 맞춘다. 여성은 깜짝 놀라면서 그렇다고 하면서 역시 소문대로 대단하신 분이라고 감탄을 한다. 코넌도일은 셜록 홈즈의 뛰어난 능력이 그의 "관찰력"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은 관찰력보다는 뛰어난 가추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홈즈는 "타자를 많이 치면 소매가 반들반들해진다"는 "규칙 (rule)"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여자의 소매가 반들반들해졌다"는 "결과 (result)"를 관찰하였다. 이러한 규칙과 결과로부터 홈즈는 "그 여자는 타자를 많이 치는 사람, 즉 타자수다"라는 "사례(case)"를 추측해 냈다. 이를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추법>

규칙 - 타자를 많이 치면 소매가 반들반들해진다.

결과 - 그 여자의 소매가 반들반들해져 있다.

사례 - 그 여자는 타자를 많이 쳤다 (따라서 타자수다).


이처럼 규칙과 결과로부터 사례에 도달하는 것이 가설적 추론법 (hypothetical inference) 또는 간단히 줄여서 가추법(假推法 : abduction)이다. 가추법이 규칙과 결과로부터 사례에 도달하는 반면, 연역법은 규칙과 사례로부터 결과에 도달한다. 연역법을 위의 경우에 적용시켜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연역법>

규칙 - 타자를 많이 치면 소매가 반들반들해진다.

사례 - 그 여자는 타자를 많이 쳤다 (타자수다).

결과 - 그 여자의 소매가 반들반들해졌다.


연역법의 특징은 그 결론("그 여자의 소매가 반들반들해졌다"는 것)이 두 전제 (규칙과 사례)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데 있다. 연역법은 틀릴 가능성이 없는 논리다. "규칙"이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또 그 "사례"를 관찰하게 된다면, 우리는 100%의 확신으로 그 결과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즉 타자를 많이 치면 소매가 반들반들해진다는 것을 일반적인 규칙으로서 받아 들이고, 구체적인 사례로 어떤 사람이 타자를 많이 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당연히 그 사람의 소매는 반들반들하리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연역법은 이처럼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논리구조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연역법은 우리에게 아무런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우리의 지식의 진보(evolution)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편, 귀납법은 사례와 결과로부터 규칙을 도출해 낸다. 


<귀납법>

사례 - 그 여자는 타자를 많이 쳤다.

결과 - 그 여자의 소매가 반들반들해졌다.

규칙 - 타자를 많이 치면 소매가 반들반들해진다.


귀납법은 근대 과학의 기본적인 논리 구조다.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사례와 결과를 발견함으로써 진리로서의 법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귀납법은 어느 정도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례와 결과가 있어도 100%의 확신으로 규칙을 생산해낼 수는 없다. 예컨대, 타자를 많이 친 A의 소매가 반들반들해졌고, B도 타자를 많이 치니 소매가 반들반들해졌고, 또 C도 그렇고, D 역시 그렇고…… N도 그렇다 해도, 그로부터 도출되는 규칙은 언제나 뒤집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포퍼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반증 가능성 (falsifiability)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귀납법은 연역법에 비해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낼 가능성은 높지만, 결론의 확실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한편 가추법은 결론의 확실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가장 형편없고 불확실한 논증 방법이다. "타자를 많이 치면 소매가 반들반들해진다"는 "규칙"을 받아들이고, "그 여자의 소매가 반들반들해졌다"는 "결과"를 관찰하였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여자는 타자를 많이 쳤다"라는 결론에 확실히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소매가 반들반들한 이유는 타자를 많이 쳐서가 아니라 강박증때문에 소매를 자꾸 어딘가에 문지르는 버릇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타자수인 사람의 옷을 잠시 빌려 입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추법의 정확성은 연역법은 말할 것도 없고 귀납법에도 전혀 미치지 못한다. 가추법은 가장 불확실하고 위험한 논증방법이다. 그러나 가추법에는 엄청난 장점이 있다. 바로 생산성이다. 퍼스에 따르면 모든 과학적 발견의 출발점이 바로 가추법이고 새로운 모든 과학적 지식은 가추법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관찰이나 연구하기 이전에 항상 가설들을 먼저 세우기 마련인데, 이러한 가설 세우기에 필수적인 것이 바로 가추법이다. 그렇기에 퍼스는 이를 "가설적 추론 (hypothetical inference)"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CP 2. 627; 640).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하고 있듯이, 케플러가 행성이 타원을 그리면서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한 것도 행성이 관찰된 여러 위치들을 부드럽고 아름답게 이을 수 있는 타원이라는 도형을 추측해 낸 결과이다(Eco & Sebeok, 1983). 실제로 관찰된 점들을 연결할 수 있는 도형의 수는 무한히 많았다. 마치 소매가 반들반들해진 이유가 무한히 많을 수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케플러는 놀랍게도 행성들이 타원의 궤도를 따라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가추법적으로 추측해냈다. 타원이라는 결론은 관찰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가추법은 연역법이나 귀납법과는 달리 논리학자나 과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연역이나 귀납적 논증을 수행하는 경우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가추를 하며 산다. 예컨대, 우리는 어느 식당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 그 식당 음식이 맛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침에 일어나 땅이 젖은 것을 본다면 간밤에 비가 왔다고 생각한다. 즉, 젖은 땅을 비가 왔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기호로, 식당 앞에 늘어선 긴 줄은 음식이 맛있다는 사실을 뜻하는 기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는 "규칙"과 "땅이 젖었다"는 "결과"로부터 "비가 왔을 것"이라는 "사례"를 가추해 낸다.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는 "규칙"을 바탕으로 실제 비가 오는 날 과연 땅이 젖었는지를 확인해보는 연역을 수행하지는 않는다. 비가 올 때마다 땅이 젖는다는 사실을 일일이 확인해가면서 훗날 과연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는 규칙을 귀납적으로 도출하려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식당 앞의 많은 사람들을 보고는 “아, 저 집 음식이 맛있나보구나”라고 자연스레 가추를 수행한다. 퍼스에 따르면 가추법은 우리의 미래를 이성적으로 다룰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고 자연스럽게 비가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가추이지 연역이나 귀납이 아니다. 연역이나 귀납으로는 그러한 단순한 추측마저도 할 수 없다.

퍼스는 자신의 실제 경험을 한 사례로 든다. "어느날 나는 터키 지방의 항구 도시에서 방문할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우연히 말을 탄 사람을 만났는데 네 명의 호위병들이 각자 말을 타고 커다란 캐노피를 그 사람의 머리 위로 떠받들고 있었다. 이렇게 귀인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은 그 지방을 다스리는 통치자 밖에 없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것이 가설(적 추론)이다." (CP 2.625) 퍼어스가 드는 또 다른 사례는 화석이다. 물고기 화석이 바다로부터 먼 내륙지방에서 발견되었을 경우, 우리는 한때 그 땅에 바닷물이 있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또한 가추법이다.  

물론 가추에는 항상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가추의 약점이자 매력이다. 음식점에 앞에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것은 맛집이어서가 아니라 알바생을 고용해서 세워놓은 것일 수도 있고, 땅이 젖은 것은 비가 와서가 아니라 살수차가 물을 뿌리고 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한다. 

퍼스에 따르면 우리 인간에게는 올바로 가추할 수 있는 천부적 능력이 있다. 그것은 마치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모이를 쪼아먹을 수 있는 능력이나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처럼 자연적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셜록 홈즈의 "놀라운" 추리력은 사실 그리 놀라운 것이 못 된다. 그것은 마치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일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셜록 홈즈처럼 가추를 하며 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하나의 장미꽃을 지각하는 과정에도 가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미꽃을 장미꽃이라 지각하기 위해서는 "장미꽃은 이러이러하게 생겼다"(규칙)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실제로 "이러이러하게 생긴 것"(결과)을 보았을 때, "아, 이것이 장미꽃이구나"(사례) 하고 가추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규칙에 대한 지식은 축적된 경험에 의해서 주어진다(CP 3.642). 만약 똑 같은 것을 보고 서로 다른 것을 느끼거나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주어진 "결과"에 서로 경험에 따른 상이한 "규칙"을 적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살아오면서 각자 서로 다른 경험을 겪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겪는 모든 오해의 근원이다.

지각 과정에 가추라는 추론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있게 마련이라는 퍼스의 통찰은 현대 뇌과학과 특히 인공지능 설계자들에게 많은 통찰력을 제공하였다(Aliseda, 2000). 감각 정보를 통해 대상을 "지각"한다는 것은 반드시 "추론"의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우리의 내부에는 어떤 가설 모델 (내부모델)이 존재하고 그것을 유입되는 감각정보에 투사하게 되는데 내부모델이 곧 "규칙"이고, 유입되는 감각정보는 "결과"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한 추론의 결과가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된다. 

16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쥬세뻬 아르침볼도의 아래 그림을 보자. 야채와 과일 바구니가 보일 것이다. 


이 그림들을 그대로 180도 돌려보자. 갑자기 사람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의 시각 정보 처리는 단순히 외부 사물이 주는 감각정보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적인 어떤 가설(규칙)에 의한 추론에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림에서 달라진 시각 정보는 없다. 그림으로부터 주어지는 시각 정보는 픽셀단위로 분석해보면 완전히 똑같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사람 얼굴이나 표정을 파악해내는 강력한 내부 모델을 갖고 있다. 이 채소와 과일 바구니들을 "얼굴"로 보이게 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생성모델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 눈을 통해 들어오는 시각정보로 부터 의미를 추론해서 무엇인가를 "보게"되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추론의 논리구조는 퍼스의 주장대로 가추법이다. 


헬름홀츠: 지각과정에서의 무의식적 추론

우리의 뇌가 무엇인가를 지각하는데에는 추론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는 퍼스보다 조금 앞서서 물리학자이자 생리학자인 헬름홀츠가 약 150년 전에 최초로 제시했다. 헬름홀츠는 열역학뿐만아니라 시지각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이론을 정립했다.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무의식적이고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메카니즘을 헬름홀츠는 "무의식적 추론 (unconscious inference)"이라 개념화했다(Helmholtz, 1925/1867).  무의식적 추론은 우리가 무엇을 보거나 들을 때마다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 착시 현상은 무의식적 추론의 대표적인 것이다. 

헬름홀츠에 따르면 시지각은 인간의 의식의 통제를 넘어서는 어떤 자체적인 룰을 갖고 있다. 우리 눈에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으로 보인다. 지구가 자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해도 그러한 지식이 우리의 시지각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을 우리 의식은 분명히 알고 있지만 그러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서쪽 하늘로 지는 태양이 갑자기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이고 대신 지구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추론이 자동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감각정보가 의식이나 우리의 마음에 의해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하위의 감각신경시스템에서 일어난다는 증거라고 헬름홀츠는 보았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실"이라고 지각하는 것은 감각시스템에 의해서 의식에 주어지는 것인데, 이 감각과정에 의식이 적극 개입하여 영향을 줄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추론 과정은 인간관계에서도 작동된다.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상대방의 비구어적 단서들을 무의시적으로 자동 해석하여 상대방의 의도나 감정을 파악해는 것이다. 

헬름홀츠는 이러한 무의식적 추론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귀납법적인 논리에 기반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퍼스는 지각의 과정에 있어서의 추론은 상당히 다른 논리구조를 가진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과연 "지각이 무의식적 추론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헬름홀츠의 아이디어에 대해 반론을 편다(Peirce, 1994: CP 8.62-90). 지각의 과정에 "추론"이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하되 그 추론의 논리적 구조는 귀납법이 아니라 가추법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퍼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모든 지각 과정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과 개인적인 기억까지도 가추법에 의해서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내가 어제 이러저러한 일을 겪었다고 "기억"하는 것은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기억의 파편들과 느낌들로부터 추론해낸 것이라고 본다(CP. 2. 625). 경험에 대한 기억과 사실에 대한 인식이 일종의 생성적(gnenrative) 모델의 탑-다운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헬름홀츠가 인간의 뇌의 작동방식의 핵심에는 무의식적인 추론의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이론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빨랐다. "추론은 의식만이 할수 있는 것"이라는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의 고정관념에 가로막혀 그의 아이디어는 100년 이상 외면 받아왔으며 오랜 세월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뇌의 본질을 "추론하는 기계"로서 파악했던 헬름홀츠의 아이디어는 1995년 다이얀과 힌튼 등의 "헬름홀츠 머신"이라는 논문을 통해 머신러닝을 위한 기본 알고리즘 하나로 부활했고 인공지능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Dayan et al., 1995). 재미있는 사실은 딥러닝의 알고리즘을 창안해낸 제프리 힌튼 역시 헬름홀츠와 마찬가지로 생리학자, 물리학, 심리학에 정통한 학자라는 사실이다. 

헬름홀츠 머신은 인간의 지각 시스템을 통계적 추론 엔진으로 보아 모델링한 것으로 인지(recognition)모델과 생성(generative)모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인지모델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감각정보를 바탕으로 그러한 감각정보를 불러일으키는 가능성있는 원인들의 확률분포를 추론하는 것이고, 생성모델은, 이것 또한 학습되는 것인데, 이러한 인지모델을 훈련시키는데 사용된다. 이러한 모델을 통해 헬름홀츠 머신은 유입되는 감각정보에 대해 "레이블"을 붙여주는 지도교사가 없어도 감각정보의 원인에 대해 확률적 추론을 할 수 있음을 보이고 있다. 

헬름홀츠 머신의 비지도학습의 알고리듬은 뉴런이 다층으로 이루어진 확률적 네트워크를 이룬고 전제한다. 인지연결망은 유입되는 감각정보에 반응하여 네트워크를 이루고 이러한 연결의 형태 정보는 숨겨진 윗단계의 네트워크로 올라간다. 반면에 생성연결망은 상위 단계내서 내려오는 형태정보를 바탕으로 이러한 연결 형태의 정보를 재구성해서 하위 단계로 내려보낸다. 

감각정보에 관한 네트워크를 윗단계로 계속 올리는 상향식 과정을 힌튼은 "각성상태(wake phase)"라 불렀는데, 이 때는 주로 인지연결망 중심의 뉴런들이 작동하여 생성연결망의 예측 확률을 높일수 있도록 재구성하고 변화시킨다. 한편, 내부모델을 바탕으로 계속 아랫단계로 영향을 주는 하향식 과정이 "수면상태(sleep phase)"인데 이 때는 주로 생성연결망 중심의 뉴런들이 작동하여 인지연결망의 예측 확률을 높을수 있도록 재구성하고 변화시킨다. 각성상태가 바텀-업의 상향 적응과정이고 (감각정보로부터 내부 모델을 구축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고), 수면상태가 탑-다운의 하향 적응과정이다 (내부모델에 기반해서 감각정보 처리하는 모델을 구축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생성모델이 유입되는 감각정보 처리 방식에 탑다운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아이디어는 헬름홀츠에 의해서 최초로 제시되었으므로 이러한 알고리듬을 "헬름홀츠 머신"으로 부르게된 것이다 (Hinton et al., 1995).


(부탁의 말씀: 이 글은 곧 출간될 예정인 책 원고의 일부이며, 수업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공개하는 것입니다. 아직 교정 전 원고이니 인용은 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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