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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환 Jan 01. 2023

내재적 질서와 내면소통

기계론적 세계관을 벗어나야 내면소통이 보인다 

기계론적 세계관과 우주의 기본질서


내면소통은 개인 간의 대화나 매스커뮤니케이션 등과 같은 ‘외적인 소통’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그것을 포괄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기반이 되는 개념이다. 즉 외적인 소통은 내면소통의 특수한 한 가지 형태다. 내면소통은 결코 여러 종류의 소통 중의 하나가 아니다. 내면소통은 단지 모든 소통의 본질적인 특성이 ‘내면적’임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내면적’이라 함은 의식의 본질적인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며, 또 우주의 기본 작동원리와 직결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내면소통이 ‘우주의 작동원리’와 직결된다는 주장은 얼핏 소통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는 한 커뮤니케이션 학자의 과대망상적 발언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부터 살펴볼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의 기본 개념들을 차근차근 들여다보면 이것이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면소통에 있어서 ‘내면(inner)’은 여러 가지 뜻이 함축된 단어지만,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봄(David Bohm)의 핵심 개념인 ‘내재적 질서(implicate order)’와 ‘내향적 펼쳐짐(enfolding)’이다. ‘펼쳐짐’이란 ‘널찍하게 퍼지다’라는 뜻이다. 내향적으로(안으로) 펼쳐진다는 것은 얼핏 모순처럼 들리는데, 사실 그것은 우리가 기계론적 세계관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에서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내향적 펼쳐짐이 아닌 ‘외향적 펼쳐짐(unfolding)’으로 본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바라본다고 하자. 은하계나 태양계여도 좋고, 하나의 원자 알갱이든 혹은 한 사람이나 한 국가이든 어떤 대상이든 상관없다. 이 모든 대상은 그것의 더 작은 구성요소들로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기계론적 세계관의 핵심이다. 그러한 구성요소들이 외부적으로 상호작용해서 더 큰 조직이나 실체를 만들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의 모든 현상은 더 작은 알갱이들의 외향적 펼쳐짐이 된다. 


외향적 펼쳐짐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기본 관점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의 관점은 실재하는 것이나 본질적인 것은 모두 더 작은 구성요소이며, 부분이 모여서 전체를 만들어낸다고 본다. 그래서 항상 중요한 것은 부분이고 구성요소이다. 전체는 항상 부분을 통해 설명된다. 그래서 요소들 간의 관계를 밝혀내는 분석이 과학의 핵심이 된다.  부분이 실재하는 것이고 전체는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추상적인 개념 틀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가령 태양, 지구, 금성 등등이 실재하는 것이고 태양계는 인간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이라는 식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부분과 요소들이고, 부분들의 인과관계와 요소들의 상호작용이다. 따라서 부분들의 인관관계를 통해서 전체 현상을 설명해내는 것이 모든 과학의 임무가 된다. 


봄은 이러한 기계론적 관점을 근본적으로 뒤집어엎고자 한다. 양자역학이나 그 밖의 여러 현대물리학이 보여주는 우주의 모습과 작동원리는 기계론적 세계관과으로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봄에 따르면 구체적인 실체는 부분이 아니라 항상 ‘전체로서의 우주’이다. ‘부분’이 오히려 인간이 자의적으로 나눈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재하는 것은 태양계지 태양과 행성이 아니다. 태양과 행성이라는 구분 자체가 인간의 자의성이 반영된 개념적 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전체로서의 우주를 이해하는 것이다. 부분이 모여서 전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는 본래 하나로서의 전체다. 부분으로 나뉠 수 없고, 구성요소들로 환원될 수도 없는 것이 우주다. 


우주의 기본질서는 부분들이 외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바깥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우주가 내향적으로 펼쳐져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전체로서의 우주는 ‘외향적 펼쳐짐’을 하지 않고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 접혀 들어가는 ‘내향적 펼쳐짐’을 한다. 양자역학이나 홀로그래피 우주론 등 현대물리학이 보여주는 다양한 우주의 모습은 우주의 기본질서가 내향적 펼쳐짐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나아가 봄은 인간의 의식 역시 내향적 펼쳐짐의 대표적인 사례로 본다. 내면소통 이론 역시 모든 소통을 인간의 의식에 내향적으로 펼쳐져 들어가는 질서로 파악한다.


고전물리학의 세계관이 쉽게 느껴지는 이유


내면소통의 개념적 기반이 되는 봄의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전물리학의 토대가 되는 기계론적 세계관의 한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봄은 고전물리학이 바탕을 두는 기계론적 세계관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내재적 질서와 전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뉴턴 물리학’이라 불리는 고전물리학이 보여주는 세계는 이해하기 쉬운 데 반해 양자역학을 포함한 여러 현대물리학의 이론이 제시하는 우주의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현대물리학은 이론 자체가 어렵고 그 바탕이 되는 수학이 어려워서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이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을 설명하는 수학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뉴턴의 물리학이나 중력의 법칙도 수학적으로 이해하기에 그리 녹록치 않다. 사람들이 고전물리학이 상대적으로 ‘쉽다’고 느끼는 그 기반이 되는 복잡한 방정식을 수학적으로 모두 이해해서가 아니다. 가시광선의 특성을 설명하는 뉴턴의 광학 이론을 수학적으로 모두 이해하기에 빛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고전물리학이 쉽게 느껴지는 이유는 고전물리학이 그려내는 우주의 모습과 움직임의 법칙이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내용과 직관적으로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버스가 급정거할 때 몸이 앞뒤로 심하게 움직일 때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관성의 법칙을 경험한다. 또 하늘 높이 던진 공이 정점까지 올라갔다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는 중력가속도를 실감한다.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의 수학적 증명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그것이 설명하는 우주와 만물의 작동방식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내용과 직관적으로 잘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입자가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든지, 알갱이 하나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든지, 서로 멀리 떨어진 입자끼리 정보 교환 없이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든지, 인간의 관찰에 의해서 입자의 상태가 변한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일상적인 사물들의 특성과는 거리가 멀다. 또 중력에 의해서 공간이 휜다든지, 속도에 의해서 질량이 더 커진다든지, 속도가 빨라질수록 시간이 느려진다든지, 질량이 곧 에너지라든지 하는 것 역시 일상적인 경험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상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현대물리학이 고전물리학보다는 우주의 실제 작동 방식을 훨씬 더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전물리학과 양자역학은 마치 천동설과 지동설처럼 서로 양립할 수 없다. 사실을 더 잘 설명하는 세계관을 원한다면 양자역학의 설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물론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이 완벽한 이론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전히 풀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은 허점투성이 이론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고전물리학보다는 훨씬 더 설명력이 뛰어난 이론이다. 여기서 설명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현실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경험을 합리적으로 잘 설명해준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뛰어난 설명력 때문에 양자역학이 보여주는 세계는 이상하고, 기묘하고,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이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고전물리학이 보여주는 세계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진짜 더 사실과 잘 부합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식'이라 불리는 우리의 비합리적이고 왜곡된 세계관과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전물리학만 갖고도 축구공이 어떻게 날아갈지, 비행기나 미사일이 어떻게 날아갈지, 대포나 미사일을 어떤 각도와 힘으로 쏘아야 할지 등의 문제는 모두 충분히 계산해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어느 정도 ‘대충’ 계산해도 되는 문제들이어서 그렇다. 축구공이나 미사일을 구성하는 미립자들의 작동방식까지 면밀하게 고려하자면 고전물리학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 축구공을 발로 차는 순간 이 우주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고전물리학만으로는 부족하다. 양자역학이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전물리학보다는 분명히 더 정확하고 옳은 이론이다. 고전물리학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설명해내지 못하는 많은 것들도 더 잘 설명해낼 수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느끼는 고전물리학의 세상은 상당히 '왜곡'된 현실이다. 헬름홀츠의 말처럼 일상생활에서는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일상적 '현실'이지만 지구의 자전이라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왜곡된 현실인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제기해야 할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왜 잘못된 고전물리학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 잘 부합하는 데 반해서 세계를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질까? 왜 인간의 감각과 경험의 방식은 과학적 사실보다는 왜곡된 환상을 더 편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걸까? 그것은 우리 뇌가 구현해내는 일상적인 세계의 모습은 실제 세계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이다. 감각시스템을 통해 우리 의식에 전달되는 세계의 모습은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허구다. 전도몽상이다. 일상적인 경험이 주는 세계의 모습이 허구이기 때문에 그러한 허구의 모습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고전물리학도 허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의 상식과 직관에는 잘 부합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의 기본 전제들


우리 뇌가 구현하는 세계의 모습은 왜곡된 허구이긴 하지만 무작위적인 허구는 아니다. 우리 뇌는 아무렇게나 멋대로 왜곡하지는 않는다. 뇌는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현실을 왜곡한다. 눈 앞에 보이는 나무에 내 몸에 열량을 공급할 수 있는 열매가 열려 있으면 그것을 얼른 알아보고, 손을 뻗어서 딴 다음, 냄새를 맡아 상하지 않았나 확인하고, 맛있다고 느끼면서 먹을 수 있도록 뇌는 진화했다. 나의 신체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맹수는 피하고 사냥감에는 돌도끼를 던져 사냥할 수 있도록 최적화된 것이 우리 뇌의 인식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의 완성본이 고전물리학이다. 양자역학은 우주의 본 모습을 훨씬 더 정확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실제 모습'으로서의 우주를 파악하는 것은 사실 토끼 사냥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레이저 광선을 만든다든가, 반도체와 컴퓨터를 만든다든가, 와이파이와 인터넷을 구축한다든가 하는 데 있어서는 양자역학이 필수적이다. 


전통적인 고전물리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오늘날 여전히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인문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거의 모든 학문 분야가 암묵적으로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는 이 기계론적 세계관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전제들을 공유하고 있다.


•       이상 분해되지 않는 독립적인 입자들이 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이러한 외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입자들은 다양한 현상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외적인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은 사물들이 자기 자신의 실체성과 고정성을 유지한 채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치 서로 부딪히며 움직이는 당구공과 같은 입자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온갖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다. 생명현상이든 물리현상이든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의 어떤 현상이든 그 바탕에는 변치않는 독립적인 구성 요소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이러한 세계관은 그대로 적용된다.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고립되고 독립된 단위로서의 개인들이 상호작용해서 사회를 이룬다고 보는 것이 그 예다. 학문과 분석단위에 따라 그 입자는 미립자일 수도 있고 분자일 수도 있으며 세포일 수도 있다. 개인일 수도 있고, 조직이나 국가일 수도 있고 혹은 우주의 항성일 수도 있다.


•      독립적인 입자들의 상호작용은 인과관계로 설명될  있다시간의 축에 따라 하나의 입자가 다른 입자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인과관계의 기본구조다. 인간의 언어 구조 자체가 이미 인과관계적 설명에 최적화돼 있다. 자연과학이든 인문사회과학이든 ‘무엇이 무엇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가 연구 문제의 기본 패턴이다. 인과관계의 바탕이 되는 시공간은 칸트의 주장대로 인간의 의식이나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본다. 사물들의 상호작용을 경험하는 인간의 의식과 기억을 통해 시간이라는 개념이 사후적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봐야 타당하지만, 기계론적 세계관은 시간을 인간의 모든 경험에 앞서서 인간의 경험과는 상관없이 객관적이고도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      전체는 부분의 모임이다사물의 본질은 그것을 이루는 구성요소에 있다고 본다. 구성요소로서 독립적인 입자들의 특성과 그것들의 상호작용 방식이 완벽하게 기술될 수 있다면 전체에 대해서는 별도의 개념화가 필요 없다고 본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것은 입자들의 특성과 상호작용의 방식이 모두 파악되지 않았을 때만 타당한 말이 된다.


이러한 기본 전제를 지닌 기계론적 세계관의 핵심은 독립적인 입자, 즉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을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는 데 있다. 전체는 작은 원소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전체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구성하는 작은 알갱이들의 특성과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 방식(주로 인과관계)을 이해하면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실체나 본질은 어디까지나 구성요소인 원소에 있는 것이고, 그것들이 모여서 이뤄낸 전체는 인간의 인식작용이 만들어낸 일종의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양자역학은 이러한 기계론적인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양자역학적 상태에서 독립적인 입자란 것은 없다. 일시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만 있을 뿐이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미립자들까지도 서로 얽혀있고 중첩상태에 있으므로 인과관계로 설명하기 어렵다. 입자들은 고유한 자기만의 위치나 특성을 유지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현재 상태가 과거 상태에 영향을 미치기도 해서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인과관계(?)를 보이기도 한다. 


봄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우주가 독립적인 알갱이들이 모여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i] 봄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도 고정된 실체 중심의 사고보다는 유기적이고 과정중심적인 사고가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더 정확한 방식이라고 본다. ‘어떤 항구적인 고정된 실체가 있고 그 실체들이 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이 세계의 기본질서’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양자‘역학(mechanics)’이라는 말에도 이미 기계론적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봄은 양자역학보다는 양자‘유기학(organics)’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사실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내재적 질서로서 이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사유의 단위가 ‘입자’나 ‘실체’가 아니라 ‘사건’이나 ‘과정’이 돼야 한다.[ii] 주어진 고정된 실체들이 먼저 존재하고 나서 그들이 상호작용을 해서 일련의 과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과정 자체가 더 본질적이다. 우주의 본래 모습은 전체적인 하나의 과정임에도 인간의 추상화, 개념화, 언어화가 구성 요소로서의 ‘부분’과 고정된 실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전체적인 과정 속에서의 일정한 부분들을 인간이 자의적으로 분리하여 추상화하고 개념화해서 이러저러한 사물들로 구분하고 그 사물들간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기존 뇌과학 역시 기계론적 세계관 갇혀 있다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을 직교좌표계(Cartesian coordinates)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17세기에 데카르트가 고안해낸 2차원의 직교좌표계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배웠던 x축과 y축으로 이루어진 그래프가 대표적인 직교좌표계다. 이 ‘그래프’는 우리의 삶과 의식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주식시세, 바이러스 확진자 추세,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지지율 변화, 기후의 변화, 기업의 매출이나 영업실적 등 여러 가지 통계 자료와 트렌드 정보가 직교좌표계를 통해 표현된다. 지구상 어디에 있든 나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정확하게 표시해주는 GPS 내비게이션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 축을 하나 더한 3차원의 직교좌표계는 우주의 객관적인 공간이라고 가정된다. 3차원 직교좌표계는 프리스턴의 뇌 영상 통계분석 프로그램인 SPM의 기본적 세계관이기도 하다. 3차원의 직교좌표계로 표시되는 뇌 공간에서 복셀이라는 단위로 표시되는 작은 알갱이들이 어떻게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되는가(산소농도가 일시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곧 fMRI 분석이다. 활성화되는 복셀의 위치가 뇌의 특정 해부학적 부위에 해당하면 그 부위가 특정 조건에서 활성화되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은 보통 가로세로 높이가 각각 2밀리로 설정되는 fMRI 이미지에서의 복셀(voxel=볼륨+픽셀)이라는 것은 전체로서의 뇌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나눈 것이라는 사실이다. MRI 기계가 2초에 한 번씩 뇌 전체를 빠르게 스캐닝할 때 구분할 수 있는 최소 단위가 2밀리 내외이기 때문에 그러한 크기의 복셀이 설정된 것뿐이지 무슨 이론적이나 실체적인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뇌는 복셀이라는 단위가 모여서 이뤄진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전체로서 하나인 뇌를 우리가 자의적으로 2×2×2밀리의 자그마한 정육면체로 나누고 추상화해서 복셀이라는 개념으로 구분하는 것뿐이다. 


전체로서의 뇌가 구체적인 실체이며 부분으로서의 복셀은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그런데 복셀들의 상관관계나 기능적 연결성 등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복셀(혹은 뇌의 특정 부위나 신경연결망의 노드들)이 고정된 실체이며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인 양 착각하게 된다. 대부분의 현대 뇌과학 연구는 다양한 뇌 부위들의 연결성(상호작용성)을 중요한 분석 대상으로 보는데, 이는 분명 기계론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뇌를 바라보는 것이고, 인간이 자의적으로 나눈 부분들 간의 상관관계 혹은 인과관계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뇌과학에서 기계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우선 기능적 실체로서의 뇌를 봄이 말하는 ‘전체성(wholeness)’을 지닌 하나의 ‘바다’와 같은 존재로 보고 복셀들을 ‘물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전체로서 하나인 인간과 사회를 자의적으로 나누고는 그렇게 나뉜 부분들을 마치 본래적인 실체인 양 다룬다. 원래 전체로서 하나인 부분들을 자의적으로 나누고 개념화한 후에 그 부분들의 상호관계와 인과관계를 밝히려는 것이 대부분의 사회과학들이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한참을 하다보면 인간의 자의적으로 나눈 부분들을 마치 선험적이고도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구성요소이자 본래적 실체로 착각하게 된다. 


직교좌표계와 해석기하학을 창안해낸 데카르트는 기계론적 세계관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나는 인식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그의 유명한 명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인간의 본성을 ‘인식하는 주체’라 보았다. 17세기에 등장한 데카르트의 이 명제를 통해서 우주는 인식의 대상인 ‘사물’과 인식의 주체인 ‘정신’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뉘게 되었다. 주관과 객관이 명확하게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인간만이 인식주체이고 다른 모든 우주와 자연은 인간의 인식대상이 되었다. 이로부터 과학주의가 탄생하면서 모든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기술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과학주의는 인간 이외에는 어떠한 존재도 정신이나 의식을 지니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류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문화권에 상관없이 세상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태양이든 달이든 산이든 바위든 나무든 호랑이든 모두 영혼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데카르트 이후 ‘영혼을 지닌 세계(animated world)’는 갑자기 사라지고 영혼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모든 자연물은 영혼을 잃어버리고 한낱 사물들로 전락했다. 동물들도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지 영혼을 지닌 존재는 아니었다. 여기서 자연물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폭력적인 인간중심주의가 탄생했다. 


인간의 몸 역시 사물의 일부로 전락했다. 인간의 본성은 몸이 아니라 정신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데카르트 철학의 필연적 결과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존재가 있다. 하나는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로서의 연장체(res extensa)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정신이자 인식의 주체인 인식체(res cogitans)이다. 몸은 연장체의 일부로서 인간이 소유한 어떤 것이 되었다. 인간의 정신만이 인간의 본성이고 몸은 그저 물건과도 같은 것기에 ‘고귀한’ 이념이나 가치를 위해서는 내 몸을 희생하거나 타인의 몸을 파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전도된 가치관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어떠한 이념이든, 국가를 포함한 어떠한 조직이든 모두 인간의 몸을 위해 봉사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몸은 최우선의 가치여야 한다. 몸이야말로 인간성의 기반이고, 정신은 몸의 어떤 기능에 불과하다. 인간의 몸을 희생해서 얻을 더 귀한 가치란 없다. 


데카르트에 의해 확립된 기계론적 세계관은 보편적이고도 당연한 세계관이라기보다는 17세기에 등장했다가 20세기 들어서 과학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빠르게 사라져가는 세계관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현대물리학에 의해서 폐기되었고, 직교좌표계는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공간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양자역학에서 직교좌표계는 별 유용성이 없다. 몸과 마음의 이원론은 바렐라 등의 생물학자, 메를로퐁티 등의 철학자, 다마지오나 프리스턴 등 여러 뇌과학자에 의해 폐기처분되고 있다. 그런데도 '평균적인 민주시민'을 길러낸다는 세계 각국의 의무교육에서는 여전히 칸트나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까닭에 여전히 우리의 ‘상식’은 기계론적 세계관에 머물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앞으로 살펴볼 내면소통 이론은 기계론적 세계관과 몸-마음의 이분법적인 관점을 지양하고 몸과의 내면소통의 중요성을 최대한 강조할 것이다. 


전체로서의 우주와 내재적 질서

상대성이론을 극복하는 전체성


상대성이론은 거대한 우주를 설명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미시적인 세계의 미립자를 설명하는 데는 적절치 않다. 상대성이론 역시 기계론적 세계관 영향 아래서 엄격한 연속성, 엄격한 결정주의, 엄격한 국지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다음과 같은 불연속성 ․ 비결정성 ․ 비국지성을 전제하고 있다.[iii] 


•      불연속성 : 원자핵의 주변을 도는 전자는 특정한 궤도들을 따라 돈다. 따라서 한 궤도와 다른 궤도 사이에 전자가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런데 전자가 궤도를 바꿀 때는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바로 ‘점프’해버린다. 즉 궤도와 궤도 사이를 ‘지나가지도 않은 채’ 궤도를 바꾸는 것이다.[iv] 이러한 불연속성은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      비결정성 :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지니며 주변 환경(실험이나 관찰 여부)이라는 맥락에 따라 입자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파동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이 역시 기계론적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왜냐면 기계론적 세계관에서는 특정 입자나 사물들이 주변 맥락에 따라 자신의 본질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의 입자들은 마치 생명체들처럼 환경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v] 즉 입자들은 두 가지 상태를 확률적으로 모두 지닌 중첩상태(superposition)에 놓여있으며, 그 본성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      비국지성 : 양자역학에서 입자들은 비국지적 연결성을 갖는다. ‘국지성(locality)’이라 함은 특정 사물이 특정한 공간적 위치에 있다는 것인데, 미립자들에게는 이러한 특성을 부여하기 어렵다. 하나의 입자가 두 곳에 동시에 있을 수도 있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자들이 서로 강하게 얽혀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에서는 서로 가까이 있는 것들끼리만 영향을 주고받기에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이러한 입자들의 특성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세계관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뜻한다. 입자들이 확실히 보여주는 것은 “모든 것은 서로 보이지 않는 연결성에 의해서 한 덩어리로 짜여 있다(woven together)”라는 사실이다.[vi]


봄은 미시세계의 양자역학과 거시세계의 상대성이론 사이의 이러한 간극을 어떻게 극복하고 두 이론적 틀을 통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는 두 이론체계의 차이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먼저 두 이론체계의 공통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공통점은 우주 전체의 ‘깨어지지 않는 전체성(unbroken wholeness)’이다.[vii] 


봄에 따르면 기존의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 모두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입자나 부분을 실체로 보면서 정작 전체는 ‘잉여’ 개념으로 본다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봄은 ‘전체라는 개념은 없어도 되는데 생각하기 편하니까 추상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은 ‘전체’가 아니라 오히려 ‘부분’이다. 양자역학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봄이 제안하는 우주의 모습은 ‘하나의 유기적 전체(organic whole)’다. 


우주는 본래부터 본질적으로 전체로서의 한 덩어리인데, 인간이 자의적으로 구분하고 나누고 개념화해서 부분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의 기반이 되는 구성요소들이야말로 인간의 인식작용이 가해져 구분된 일종의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원래 한 덩어리인 우주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부분으로 나누고 개념화해 인과관계를 통해 설명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접근으로는 우주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봄의 입장이다. 


봄에 따르면 우주는 처음부터 ‘전체로서의 하나’ 혹은 ‘하나로서의 전체’이다. 인간이 인식하는 개별적인 사물이란 그 전체로서의 하나에 어떤 국지적인 에너지 흐름이나 뭉침이 발생하고(마치 바람이 불면 잔잔한 수면에 파도가 이는 것처럼), 그러한 뭉침(일어섬 혹은 구성된 파도) 하나하나를 개별적인 것으로 추상화(개념화)한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커다란 사물(은하계)에서부터 작은 사물(미립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대한 바다를 이루는 한 덩어리에서 나온 크고 작은 파도들에 불과하다. 


인간이 자의적으로 거대한 바다의 일부인 ‘파도’를 독립적인 실체라고 따로 떼어서 보고, 파도들의 상호작용과 인과관계를 설명하려 한 것이 지금까지의 기계론적 세계관이다.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파도들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진정한 이유는 그 파도들이 모두 거대한 바다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파도들의 집합체로 바다를 이해하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파도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바다 전체를 봐야 한다. 전체로서의 바다를 이해해야 부분으로서의 파도를 이해할 수 있다. 부분은 전체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파도를 통해서 바다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체로서의 바다를 보아야 파도를 이해할 수 있다. 부분들의 상호작용이나 인과관계를 통해서만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고전물리학의 세계관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내재적 질서와 외재적 질서 


봄은 기계론적 관점에서 개별적인 사물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기본 틀을 ‘외재적 질서(explicate order)’라 부른다. 외재적 질서에서 부분으로서의 사물들은 외적으로 전개되고 펼쳐져 나간다. 한편 우주를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전체성 관점에서는 개별적인 사물들이 외적인 상관관계를 갖기보다는 내적으로 전개되고 펼쳐져 들어가는 ‘내재적 질서’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물들이 마치 당구공처럼 독립적이고 고유한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전체를 구성하고 외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외재적 질서라 한다면, 사물들이 마치 끊임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파도들처럼 거대한 바다의 부분으로서 서로 내재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곧 내재적 질서다. 당구공들은 당구대 위에서 ‘외향적 펼쳐짐’을 하지만 파도들은 다시 바다로 펼쳐져 들어가는 ‘내향적 펼쳐짐’을 한다. 


봄은 외재적 질서로도 어느 정도 우주의 작동원리를 설명할 수는 있으나 (당구공이나 로켓의 움직임을 고전물리학으로 예측하는 것 등) 이러한 경우는 어디까지나 본질적으로 내재적 질서인 우주의 특수한 상황에 불과하다고 본다.  외재적 질서는 내재적 질서에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내내적 질서의 한 특수한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개별적인 사물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 서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마치 물결이나 파도처럼 표면적인 것일 뿐 사실 우주는 ‘하나로서의 전체’다. 표면 아래에서 드러나지 않는 전체로서의 질서가 바로 내재적 질서고, 내재적 질서의 일부가 표면에 드러나는 것이 외재적 질서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세상의 본질적 모습이라 착각하는 것이 바로 외재적 질서인데, 사실 외재적 질서는 내재적 질서의 극히 일부이며 특수한 항 형태에 불과하다.[viii] 마치 수면 위의 물결이라는 외재적 질서가 바다 전체라는 내재적 질서의 극히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다. 외재적 질서에서 사물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외향적 펼쳐짐인데, 이 역시 내재적 질서의 작동방식인 내향적 펼쳐짐의 한 특수한 형태다. 


끊임없이 안으로 펼쳐져 들어가는 내재적 질서가 우주의 보편적인 모습이며 본래적인 실체다. 외재적 질서 혹은 외향적 펼쳐짐은 추상화된 관점에서의 기술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슈뢰딩거의 파동함수가 내재적 질서의 기술이며, 입자들의 인과적 상호작용에 대한 논의는 외재적 질서 차원에서의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unifield field theory)’은 어느 정도 내재적 질서와 전체성의 관점을 받아들인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입자와 그것의 배경이 되는 공간과 에너지까지를 모두 우주에 연속적으로 분포된 하나의 덩어리(field)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력까지 포함시키면 그야말로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이 된다. 이 공간이라는 배경과 에너지나 입자라는 실체를 하나의 동일한 덩어리로 본다는 것은 파도 하나하나를 독립된 입자가 아닌 거대한 바다라는 배경(장)의 일부로 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처럼 배경과 현상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 전체성(wholeness)의 관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배경자아와 경험자아 역시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실체라기보다는 하나의 전체성을 지니는 개념이다. 바다와도 같은 본래적 실체가 배경자아고, 물결처럼 특정한 맥락에서 일시적으로 드러나곤 하는 것이 경험자아다. 마음근력 향상을 위한 내면소통 훈련은 일상생활에서 늘 느껴지는 경험자아를 넘어 그 뒤에 배경처럼 존재하는 본래 모습으로서의 배경자아를 알아차리고 그것과 하나되기 위한 수행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유기론적 세계관과 전체적 움직임 

내향적 펼쳐짐 : 테일러-쿠에트 실험


봄은 안으로 향하는 내향적 펼쳐짐(enfoldment)과 바깥으로 향하는 외향적 펼쳐짐(unfoldment)의 총합을 ‘전체적 움직임(holomovement)’으로 개념화한다. 내향적으로 펼쳐져 들어왔다가 다시 외향적으로 펼쳐져 나가는 움직임의 총합이 곧 우주의 ‘근본적인 실체(primary reality)’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인간이 인식하는 사물, 대상, 형태, 입자 등등은 이러한 전체적 움직임의 결과에 따라 떠오르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ix] 어떤 물질적 실체나 독립적 입자로 드러나는 모든 것의 본질은 사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전체적 움직임이다. 이러한 ‘흐름’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일 때에는 미립자나 사물 등 고정된 실체로 우리에게 드러난다. 그것은 마치 소용돌이(vortex)가 하나의 고정된 ‘실체’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은데, 사실 그 본질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전체로서의 ‘유체의 흐름’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지나스가 말한 ‘소용돌이로서의 나(I of the vortex)’의 개념은 의미심장하다. 앞에서 살펴본 의식 역시 일종의 소용돌이와 같다.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용돌이의 본질은 내향적으로 끊임없이 펼쳐지는 내재적 질서다.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하나의 고정된 실체처럼 느끼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내향적으로 펼쳐지며 흘러가는 내재적 질서다. 하나의 별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미립자도 그렇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그렇다. 


우주의 기본질서는 내향적 펼쳐짐인데, 봄은 이를 ‘내재적 질서’라 부른다. 여기서 ‘내재적(implicate)’은 라틴어에 뿌리를 둔 말로 ‘안으로 접혀 들어간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 속으로 접혀 들어간다. 전체로서의 우주가 하나의 부분으로 접혀 들어가며, 다시 하나의 부분이 전체로서의 우주로 접혀 들어가면서 펼쳐진다. 외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사물들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는 이러한 깊은 내재적 질서로부터 생겨난다. 한편 서로 외적인 관계를 지닌 독자적인 사물로 된 세계는 외향적 펼쳐짐을 하는 세계이며, 이를 외재적 질서(explicate order)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외재적 질서는 본질적으로 내재적 질서인 전체적 움직임의 일시적이고도 특수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자는 특정한 위치에서 에너지 덩어리인 배경으로부터 외향적 펼쳐짐을 통해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내향적 펼쳐짐을 통해 배경으로 들어갔다가 또다시 근처 다른 곳으로 펼쳐져 나왔다가 다시 배경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이때 드러나는 존재에만 초점을 맞춰서 그 미립자를 하나의 독립적 실체로 바라본다면 마치 하나의 전자가 궤도를 따라 돌다가 중간 이동 없이 다른 궤도로 마술처럼 건너뛰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이것이 전자의 ‘불연속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체가 아닌 미립자에 불과한 전자도 내향적-외향적 펼쳐짐의 반복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재생산’ 또는 ‘자가복제’를 한다고 봐야 한다.[x] 이러한 관점이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비되는 유기론적 세계관이다.


유기론적 세계관은 우주를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전체로 파악한다. 그 덩어리는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암흑물질이나 암흑에너지를 포함한 전체다. 밤하늘에 보이는 수많은 별이나 우리가 보거나 만질 수 있는 물질들은 우주라는 커다란 에너지 덩어리에 군데군데 생겨난 예외적인 구멍에 불과하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은 ‘현상(figure)’에 불과하고, 그것들을 존재하게끔 하는 전체로서의 ‘배경(background)’이 존재한다. 가령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수면 위의 물결뿐이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바다가 존재하는 것과도 같다. 우주 만물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들의 총합이 아니다. 인간이 인식하는 부분으로서의 실체들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분류하고 개념화해서 추상화한 것들에 불과하다. 나아가 이러한 부분으로서의 실체들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서로 외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체를 이루는 부분이기 때문에 상관관계나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태양이라는 하나의 실체가 지구라는 또 다른 하나의 실체를 중력으로 끌어당기며 상호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태양이나 지구 모두 거대한 전체로서의 우주라는 바다 표면에 드러난 작은 파도들에 불과하다. 파도가 하나 일면 그 옆에 또 다른 파도의 물결이 생겨나고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물결과 물결이 상호작용하며 파도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물결들 모두가 전체로서의 바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봄이 제시하는 전체성과 내재적 질서의 개념은 기계론적 세계관에 푹 젖어있는 사람들로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봄은 유체역학의 테일러-쿠에트(Taylor-Couette) 실험을 통해서 내재적 질서의 개념을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그림 6-1처럼 투명한 큰 실린더 안에 작은 실린더를 넣은 후에 작은 실린더가 큰 실린더 안에서 회전할 수 있도록 한다. 작은 실린더와 큰 실린더 사이의 공간에 점성이 높고 투명한 액체를 가득 채운다. 투명한 글리세린도 좋고 옥수수 시럽도 좋다. 이것이 테일러-쿠에트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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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1] 테일러-쿠에트 실험을 위한 장치


* 투명한 큰 실린더 안에 작은 실린더를 넣은 후에 작은 실린더가 큰 실린더 안에서 회전할 수 있도록 한다. 작은 실린더와 큰 실린더 사이 공간에 점성이 높고 투명한 액체를 가득 채운다. 작은 실린더를 돌리면 점성이 높은 액체도 따라 돌게되는데 작은 실린더 표면에 가까울수록 상대적으로 더 빨리 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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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기다란 스포이드로 잉크 한 방울을 투명한 액체 속에 떨어트린다. 잉크는 투명한 액체에 섞이지 않은 채 마치 하나의 알갱이처럼 떠 있게 된다. 이제 서서히 작은 실린더를 왼쪽으로 회전시킨다. 그러면 회전하는 작은 실린더 표면에 가까운 액체는 실린더를 따라 많이 움직이고, 고정된 바깥쪽 큰 실린더에 가까운 액체일수록 덜 움직이게 된다. 계속 돌리면 잉크는 점점 옆으로 퍼진다. 대여섯 바퀴 돌리면 완전히 퍼져서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하나의 알갱이처럼 보이던 잉크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실린더를 반대 방향인 오른쪽으로 서서히 돌리면 원래처럼 잉크 방울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투명한 액체에서 입자가 갑자기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xi] 유체역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테일러-쿠에트 흐름(flow)’이라고 한다. 이는 중심을 공유하는 두 실린더 사이 공간에 점성이 높은 액체를 채우고 안쪽 실린더를 회전시킬 때 나타난다.


이제 그림 6-2의 1번 그림처럼 빨간색, 녹색, 파란색 잉크 각각 한 방울씩 넣고 돌려보자. 그러면 2번 그림과 같이 독립된 입자처럼 보이던 세 개의 잉크 방울들이 완전히 섞이게 된다. 입자가 마치 에너지처럼 공간에 퍼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3번 그림처럼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다시 독립적인 잉크 방울들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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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2]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잉크 방울

* 1번 – 스포이드를 사용해서 빨간색, 녹색, 파란색 잉크를 각각 한 방울씩 점성이 높은 투명한 액체 속에 넣는다. 

2번 – 가운데 작은 실린더를 여러번 돌리면 독립된 입자처럼 보이던 세 개의 잉크 방울들이 완전히 퍼져서 형태를 잃게 된다. 

3번 – 실린더를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여러번 돌리면 다시 독립적인 잉크 방울들이 나타난다.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57IMufyoCnQ

https://youtu.be/j2_dJY_mI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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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엄청나게 거대한 실린더에 점성이 높은 투명한 액체를 가득 채우고 수많은 잉크 방울을 넣은 후에 돌리면 어떻게 될까? 잉크 방울들은 액체 속으로 퍼져들어가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액체의 양이 충분하다면 완전히 투명하게 보이게 되어 잉크 방울들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투명한 액체 속에서 갑자기 잉크방울들이 나타나게 된다. 


만약 처음에 몇 방울 넣고 한 바퀴 돌리고 다시 또 몇 방울 넣고 한 바퀴 더 돌리고 하는 식으로 반복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렇게 n번을 회전시켰다면 어떤 잉크 방울은 n번, 어떤 잉크 방울은 n+1번, 또 다른 잉크 방울은 n+2번… 하는 식으로 각기 다른 ‘퍼짐 상태’가 된다. 그러고 나서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가 또 한 번 방향을 바꿔서 돌린다면? 수많은 잉크 방울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이러한 잉크 방울들을 하나의 실체 혹은 입자라고 보는 것이다. 잉크 방울 입자들을 각기 독립적인 실체로 보고 그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면 분명히 일정한 상관관계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1번 입자가 나온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2번 입자가 나타난다든지, 3번 입자가 나타날 때마다 4번과 5번 입자는 사라진다든지, 혹은 6번 입자와 7번 입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항상 동시에 나타난다든지 하는 다양한 관계가 관측될 것이다. 마치 입자들은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중첩이든 얽힘이든 불연속성이든 무엇이라고 부르든 아무튼 입자들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가 관측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입자들 모두 투명한 액체라는 거대한 장(field)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것뿐이다. 이때 전체로서의 투명한 액체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관찰되는 것은 잉크 방울뿐이다. 마치 관찰되는 것이 미립자나 전자일 뿐이듯이.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잉크 방울이 투명한 액체 속으로 펼쳐지는 것이 곧 내향적 펼쳐짐을 하는 내재적 질서라 할 수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입자나 사물들은 전체로서의 우주라는 커다란 실린더에 든 잉크 방울들과 같은 것이다. 드넓은 바다 수면에 그때그때 일렁이며 나타나는 물결들과도 같은 것이다. 잉크 방울이나 물결을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로 간주하고 그들 사이의 외재적 질서(잉크 방울이나 물결의 탄생과 소멸, 인과관계, 상호작용 패턴) 등도 얼마든지 계산할 수 있고 모델링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틀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상생활의 일정한 한도 내에서는 그렇게 기계론적으로 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주의 본질적 모습인 것은 아니다. 봄은 이러한 외재적 질서는 내재적 질서의 일부 현상을 특수한 방식으로 추상화해 인과론적으로 개념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 실험이 의미하는 바를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우주는 커다란 전체로서의 투명한 젤리 덩어리이고 입자나 사물은 그 젤리에 묻은 티끌이나 작은 흠집과도 같다. 티끌들의 움직임 혹은 상호작용은 젤리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물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외적으로 상호작용하고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우주가 그 자신 안으로 펼쳐져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안으로 펼쳐져 들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극히 부분적인 현상에 대해 기계론적 관점에서 관찰하고 설명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고전물리학이 해온 일들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외재적 질서는 내재적 질서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내재적 질서는 외재적 질서처럼 보이는 것들의 본질적인 모습이며 외재적 질서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내면소통은 외면소통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내면소통은 모든 외면소통의 본질적인 모습이며 모든 형태의 소통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내면소통의 개념에 대해서는 제7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어항 속의 물고기와 홀로그래프 


우주를 투명한 젤리나 점성이 높은 액체로 보는 것에는 단순한 비유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접목하려는 노력에서 탄생한 양자장이론(quantum field theory)은 우주를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장(field)으로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우주의 텅 빈 공간에 입자들이 떠다니는 것이 아니다. 우주는 ‘텅 비어 있음으로 꽉 찬’ 공간이다. 우주의 에너지 일부가 뭉친 ‘들뜬 상태(excited modes)’가 광자나 전자와 같은 입자처럼 보이는 것이고, 반대로 에너지가 흩어져 약한 부분이 ‘진공상태(vacuum modes)’인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다.[xii] 


입자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필드의 일부분으로 존재한다. 마치 거대한 투명한 젤리의 살짝 뭉친 부분이 입자이고 옅은 부분이 공간인 것과도 같다. 같은 필드의 일부분이기에 에너지 상태가 같은 같은 종류의 입자는 완벽하게 똑같다. 예컨대 지금 막 탄생한 뮤온과 일 년이 지난 뮤온은 똑같다. 구분할 수 없다. 남은 평균 수명 역시 정확히 같다. 입자는 시간에서 자유롭다. 완벽하게 동일하기 때문에 뮤온이라는 입자에는 시간성이 없다. 마치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가 없는 완전복제성을 지닌 디지털 정보와 비슷하다. 디지털 정보에도 시간성은 없다. 뮤온이나 디지털 정보는 시간이 흘러간다고 해서 낡지 않는다. 완벽하게 동일하기 때문이다.  


공간은 미립자들이 얽혀있는 정도에 따라서 결정된다. 강하게 얽혀있을수록 거리가 더 가까워진다. 거리나 공간은 양자얽힘에서 도출되며, 얽힘으로부터 3차원이든 5차원이든 공간도 정의될 수 있다. 에너지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공간과 에너지는 일정한 관계를 갖는다. 이것은 자연스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도 연결된다. 시공간이 중력에 의해서 왜곡되는 것은 파동함수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통합될 수 있다.[xiii] 이러한 관점을 더 확장하면 순수한 양자 개념에서 출발해 파동함수와 양자얽힘을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성이론과 나아가 고전역학 이론까지 도출해낼 수 있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외재적 질서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전체로서 하나인 우주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나누고 그 나눈 부분들을 각각의 독립적인 실체로 파악해서 그것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살펴본다는 뜻이다. 봄은 이러한 상황을 또 다른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xiv] 그림 6-3에서 보는 것처럼 커다란 직육면체의 어항 안에 물고기가 한 마리 있다고 가정하자. 이 어항 속의 물고기는 측면에서 비추는 카메라 A와 정면에서 비추는 카메라 B에 의해서 관측되고 있다. 옆 방에는 두 대의 모니터가 놓여 있고 각각 카메라 A와 카메라 B가 송출하는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두뇌라는 방에 갇혀서 의식에 비치는 감각정보(모니터에 비치는 영상)를 통해서 우주의 본모습(옆방에 있는 어항)을 추론해내야만 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두 모니터에 나타나는 물고기를 서로 다른 독립적인 실체로 보는 관점이다. 실제로 달라 보일 것이다. A 모니터에는 옆모습이 보이고 B 모니터에는 앞모습이 보일 테니까. 이때 모니터 A와 B에 비치는 두 물고기의 움직임 사이에는 분명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A 영상의 물고기가 꼬리를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B 영상의 물고기 머리 움직임이 결정되는 것이 ‘발견’될 것이고 이에 관한 인과론적 이론이 수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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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3] 어항 속의 물고기 차원의 축소

* 어항 속의 있는 물고기를 두 대의 카메라와 모니터에 의해서 보여주는 것은 3차원에 있는 하나의 실체를 2차원의 두 개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는 것과도 같다. 이 때 두 대에 모니터에 등장하는 물고기의 두 개의 이미지 사이에는 항상 특정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만약 모니터를 순차적으로 관찰하는 상황이라면 두 개의 이미지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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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물고기가 두 화면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상황은 3차원의 2차원적 표현이다. 이 두 이미지 사이에는 분명 상관관계가 있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3차원의 세계에서 관찰하고 측정하는 모든 사물이나 입자들은 사실 더 상위 차원에 존재하는 실체의 3차원적인 투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우리에게 익숙한 3차원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여러 실체들은 사실 상위 차원에 존재하는 동일한 실체의 여러 그림자들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여러 실체가 서로 상관관계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상위 차원의 모습을 차원을 낮춰서 3차원에서 보면 각각 별개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홀로그래프 우주론’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다. 


전체를 부분으로 나눠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전체로서 기록하는 기술의 대표적인 것이 가보르(Dennis Gabor)가 발명한 ‘홀로그래프(holograph)’다. 홀로(holo)는 그리스어로 전체(whole)라는 뜻이고, 그래프(graph)는 ‘기록한다’ 혹은 ‘기술한다’는 뜻이다. 즉 홀로그래프는 ‘전체를 다 기록하는 도구’라는 뜻이다. 


가보르가 발명한 홀로그래프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홀로그래프에서는 레이저 빛이 사용된다. 일반적인 빛은 무질서한 데 반해 레이저 빛은 규칙적이고 질서가 잡힌 빛이다. 반투명한 거울에 레이저 광선을 쏘면 절반은 반사되고 나머지 절반은 반투명 거울 뒤에 있는 사물에 부딪혀 산란한 다음 반투명 거울에 있는 원래 반사된 빛과 합쳐져 상호 간섭을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합쳐진 이미지는 저장될 수는 있으나 원래 사물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라 보이거나 알아보기조차 힘든 이미지가 된다. 그러나 이 이미지에 원래 쏘였던 것과 비슷한 레이저 광선을 또다시 투과시키면 마치 사물에 의해서 반사되었던 빛과 같은 파동을 생산해낸다. 이것이 우리 눈에는 3차원의 입체적 이미지로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홀로그래프의 모든 부분이 전체 사물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인 포토그래프 사진은 사물의 한 부분과 사진의 한 부분이 일대일로 대응한다. 즉 사진의 픽셀 하나는 사물의 한 부분에 대응한다. 그러나 홀로그래프는 일부만을 떼어서 봐도 전체 사물의 이미지가 다 담겨있다. 다만 좀 흐릿하고 볼 수 있는 각도가 제한될 뿐이다. 그러한 흐릿한 개개의 전체 정보가 모여서 더 분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홀로그래프에서는 모든 부분이 전체에 대한 정보를 다 담고 있다. 마치 나의 세포 하나에 나의 모든 유전자 정보가 들어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홀로그래프의 특성은 전체가 부분에 들어있는 ‘부분의 전체성’과 전체가 부분으로 드러나는 ‘전체의 부분성’이다.[xv] 홀로그래프의 전체에 대한 정보는 모든 부분으로 내적으로 펼쳐진다 


전체가 부분에 흐릿하게나마 모두 들어있는 상황은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그러나 우주는 마치 홀로그래프와도 같다. 세포 하나에 개체를 이루는 전체 정보가 다 들어있고, 물 한 방울에 바다가 다 들어있으며, 한 사람의 의식에 그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언어와 문화 정보 전체가 다 들어있고,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우주를 이루는 원자의 구성 비율 그대로 다 들어가 있다. 이것이 우주의 본 모습이다. 전체가 부분으로 내향적 펼쳐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홀로그래프적인 세계는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방 안에 있을 때 방 전체의 모든 부분이 반사하는 빛은 우리 눈에서 망막으로 다시 시신경을 통해 내향적으로 펼쳐져 들어가며, 그 결과가 방 전체에 대한 지각과 인식이 되어 외향적으로 펼쳐져 나온다. 물결은 바다 전체로 내향적으로 펼쳐져 들어갔다가 다시 또 다른 물결로 외향적으로 펼쳐져 나온다. TV에서는 빛과 소리의 정보가 전파라는 신호로 내향적 펼쳐짐을 했다가 다시 TV 화면과 스피커를 통해 외향적으로 펼쳐지면서 영상과 소리로 나타난다.[xvi]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찰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주 전체의 시공간 정보가 빛으로 내향적 펼쳐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마찬가지의 현상이 입자를 관찰할 때도 나타난다. 우주 전체의 움직임이 입자라는 한 부분에 투영되어 내향적 펼쳐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홀로그래프의 이러한 특성은 특히 ‘소리’에 잘 나타난다. 소리는 흔히 파동에 비유된다. 하지만 음향물리학 연구자인 리드(John Stuart Reid)는 파동보다는 차라리 비눗방울이나 풍선과도 같은 커다란 ‘버블(bubble)’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비유라고 설명한다.[xvii] 커다란 공과도 같은 둥그런 공간에 가득 차 있는 정보 전체는 그 공간의 경계를 이루는 어느 특정한 부분에서 발견되는 정보와 같다. 말하자면 고무풍선 어디에나 그 고무풍선이 전체로서 지닌 모든 정보가 들어있다는 것이 바로 ‘홀로그래픽 원칙’이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소리는 마치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고무풍선과도 같다(그림 6-4). 그 경계에 존재하는 분자 하나의 진동에 전체 진동 정보가 모두 들어있다. 소리가 퍼져나가는 음향 공간 (버블) 전체에 존재하는 각각의 진동들에는 모두 똑같은 정보가 들어있다. 예컨대 무대 위의 한 연주자가 악기를 연주한다고 하자. 이때 악기 소리는 커다란 고무풍선처럼 구형으로 펼쳐지면서 콘서트홀의 전체 공간으로 펼쳐져 들어간다. 덕분에 우리는 악기로부터 어떤 방향에 있든 같은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이렇게 펼쳐져 나가는 악기 연주 소리를 음파로든 전자기파로든 측정하면 어느 지점에서 측정하든 똑같은 정보가 들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풀어 오른 고무풍선의 내부와 표면 어느 곳에서든 똑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현상 역시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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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4] 홀로그래프의 특성을 지닌 소리

* 소리는 음원에서부터 구형으로 펼쳐지면서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간다. 마치 부풀어오르는 풍선과도 같다. 콘서트홀에서의 악기의 연주 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소리의 풍선 내부나 표면 어느 곳에서든 소리 전체의 정보가 담겨있다. 덕분에 우리는 어느 방향에서든 같은 연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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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안쪽 귀에는 돌돌 말려 있는 달팽이관이 있다. 내부에는 림프액이 채워져 있고 그 액체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섬모 모양의 청각 신경이 분포해 있다. 소리를 듣는 핵심 기관이다. 달팽이관은 쭉 펴도 길이가 3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달팽이관이 듣는 소리의 음파 길이는 이보다 훨씬 길다. 피아노의 제일 저음(27.5 Hz)만 해도 그 파장(wavelength)이 약 12.4미터에 이른다. 어떻게 3센티밖에 안 되는 달팽이관이 10미터도 넘는 파동에 담긴 소리 정보들을 구분해낼 수 있는 걸까? 기계론적 세계관이나 고전물리학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소리 정보는 파동에 실려서 전달되는 것은 맞지만 파동의 각 부위에 서로 다른 정보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달팽이관은 피아노의 다양한 음들을 구분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소리 정보는 한 파동의 모든 부위에 고르고 동일하게 실려 있다. 다만 데이터의 밀도가 다를 뿐이다. 약간 흐릿하게 전체의 정보가 부분에 다 담겨있다는 뜻이다. 


피아노의 특정한 음이 공기 분자의 움직임을 통해 고막을 흔들고, 그 흔들림이 달팽이관 속의 림프액을 진동시킨다. 림프액을 통해 전달된 떨림의 정보가 청각세포의 섬모를 흔들 때 림프액 분자 하나하나의 움직임에는 파동 전체의 정보가 모두 들어있다. 다시 말해 소리 정보를 실어 나르는 모든 공기와 림프액 분자의 움직임에는 그 소리 전체의 진동에 관한 정보가 흐릿하게나마 모두 다 담겨있다. 그러한 흐릿한 하나하나의 떨림이 모여서 밀도가 높은 보다 선명한 소리의 정보가 된다. 이처럼 소리와 물은 자신의 정보를 공기나 액체 분자에 모두 고르게 실어 전달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홀로그래픽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xviii] 연주자의 연주를 통해 발생하는 소리 정보 전체가 공기 분자 하나하나의 움직임 속으로 펼쳐져 들어가는 것이 바로 내향적 펼쳐짐의 전형적인 한 예이다. 


소리뿐만 아니라 음악도 내재적 질서를 갖는다. 봄은 음악 역시 홀로그래픽한 성질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음악을 내재적 질서의 한 예로 들고 있다. 우리가 연주를 들을 때면 지금 이 순간 연주되는 음뿐만 아니라 그 직전이나 조금 더 전에 연주되었던 음도 함께 듣기 마련이다. 피아노 연주를 예로 들자면 연주자가 건반을 두드리는 순간의 음뿐만 아니라 조금 전에 연주되었던 여러 음의 여운도 함께 듣게 된다. 연주되는 순간의 음과 그전에 연주되었던 음들의 초기 반사음과 소리의 잔향이 모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xix] 이러한 것이 우리 감각기관에 주어지는 외부로부터의 청각정보다. 이 청각정보는 자유에너지 원칙에 따른 능동적 추론에 의해 내적 모델과 결합해 청각이라는 지각편린으로 생산되고, 이는 다시 감정이나 기억 등의 생성모델과 상호작용하며 우리 의식으로 펼쳐져 들어간다. 이는 수많은 파동이 하나의 홀로그래프로 펼쳐져 들어가는 구조와 매우 비슷하다.


내재적 질서와 물질-마음 이원론의 문제 

물질과 마음은 본질적으로 내재적 질서다


전체로서의 우주는 내향적으로 펼쳐지는 전체로서의 내재적 질서다. 내재적 질서의 대표적인 것이 인간의 의식이다. 우주의 다른 모든 에너지처럼 의식도 일종의 ‘흐름(in flux)’이다.[xx] 물론 의식도 외재적 질서의 형태를 가질 수 있다. 구체적인 생각이나 감정 혹은 기억이 그러한 예이다. 그런데 생각이나 감정 뒤에는 언제나 그것을 알아차리는 배경자아가 있다. 사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공간이라는 배경이 있어야 하고, 소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요함이라는 배경이 있어야 하며, 물결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바다라는 배경이 있어야 하듯이 생각과 감정과 기억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배경자아가 있어야 한다. 즉 구체적인 생각이나 감정에는 항상 그것이 내포(imply) 하고 있는 전체로서의 내재적(implicate) 질서인 배경자아가 있게 된다. 


봄의 이론을 따르자면 의식의 본질이야말로 전체로서의 내재적 질서다. 실제로 생각의 구조, 기능, 작동, 내용 등이 모두 내재적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 생각의 외재적-내재적 질서 사이의 관계는 사물들의 외재적-내재적 질서 사이의 관계와 유사하다. 외재적 질서는 내재적 질서의 특수하고도 부분적인 존재일뿐이다. 생각이나 감정이나 기억은 배경자아의 일부가 뭉치거나 들뜸상태(excited mode)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치 물결은 바다 전체의 극히 일부가 잠시 들뜸상태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알아차림의 주체로서의 배경자아는 생각, 감정, 기억 등의 마음작용의 일종의 장(field)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봄은 마음과 물질이 둘 다 내재적 질서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구별되는 물질들은 마음의 내재적 질서로부터 외향적으로 펼쳐져 나오는 것이다. 마음과 물질은 공통된 바탕으로부터 나오며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은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섞여서 짜여(interweave)’ 있다. 물질과 마음이 모두 내재적 질서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몸-마음의 이원론에 빠지지 않으면서 둘의 차이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xxi]


기계론적 세계관을 정립한 대표적인 철학자인 데카르는 물질과 마음을 철저하게 구별했다. 데카르트가 직면했던 문제는 마음(인식체)이 도대체 어떻게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인 물질(연장체)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어쩔 수 없이 신(God)을 끌어들였다. 신은 연장체와 인식체를 모두 창조한 창조주이므로 오직 신만이 둘 사이의 연관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신으로서의 인간이 물질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신이라는 존재 덕분이고, 나아가 인간이 이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물질과 마음의 이원론은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이원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또 다른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가 우주의 전체성을 논한다 하더라도, 즉 우주를 ‘하나의 전체’로 본다 하더라도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구분하는 한 관찰자는 그 전체성에서 벗어나 있을 수밖에 없다. 우주를 ‘하나의 전체’로 바라보는 관찰자는 관찰대상인 그 우주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또 관찰자가 여럿 있을 수밖에 없는데, 각각의 관찰자는 다른 관찰자에게 관찰대상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문제도 발생한다. 더군다나 데카르트의 논리를 따르자면 우리는 신의 존재를 깨닫고, 신의 뜻을 이해하고,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신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인간의 인식대상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인식의 주체와 대상을 통합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봄에 따르면 물질과 마음의 이원론 문제는 내재적 질서의 관점으로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 내재적 질서의 관점에 따르자면 물질과 마음은 원래 ‘전체로서 하나의 실체(one reality)’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하다. 내재적 질서가 직접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의식이다.[xxii] 각 인간의 의식은 전체로서의 존재가 내향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각 개인은 내재적 질서의 일부로서 우주 전체와 다른 인간들 전체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질과 마음의 통합성을 나타내는 소마-시그니피컨스


물질과 마음이 근원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봄은 소마-시그니피컨스 (soma-significance)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소마(soma)는 그리스어로 ‘몸’이라는 뜻으로 물질적인 것을 나타낸다. 소마-시그니피컨스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통합성을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나타내는 말이다.[xxiii] 봄이 굳이 이렇게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는 이유는 ‘물질과 마음’이라는 두 단어에는 이미 대비적이고 이분법적인 개념이 너무나도 깊게 뿌리박혀 있어서 이 두 단어를 사용해서는 통합성의 관점을 위한 논의를 진전시키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이래 지난 수백 년간 물질과 마음은 완전히 구분되는 별개의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많은 사람에게 자리 잡고 있기에 ‘물질’과 ‘마음’이라는 단어 대신 새로운 개념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에 ‘소마-시그니피컨스’는 물질과 마음을 하나로 보는 통합적 관점을 전개하기 위한 개념적인 틀이라 할 수 있다.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개념이 함축하는 것은 소마(물질적인 것)와 그것의 의미인 시그니피컨스(정신적인 것)는 하나의 실체(reality)의 두 측면이지 분리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xxiv] 말하자면 이것은 전체로서의 실체가 드러나는 (외적으로 펼쳐지는) 두 형태인데, 인간 몸의 감각 작용에 의해 지각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물질이고, 인간의 의식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의미다. 이 둘은 서로를 내포하고 있다. 모든 물질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모든 의미는 결국 특정한 사물이나 대상에 관한 것이다. 본질적으로 같은 물질과 의미가 구분되는 것은 인간의 몸과 의식에 의해서다.


그림 6-5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관계는 여러 층위(level)에서 작동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프리스턴의 심층(deep) 능동적 추론 시스템에서 상향하는 감각정보와 하향하는 예측오류 시스템이 위계적인 구조를 갖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xx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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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5소마-시그니피컨스의 위계적 구조

*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관계는 프리스턴의 능동적 추론 시스템의 심층 구조와 비슷하다. 위계적 구조 속에서 상향하는 감각정보가 소마와 관련된 것(‘somatic’)이고, 하향하는 예측오류 시스템이 시그니피컨스와 관련된 것(‘significant’)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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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봄은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 반대인 기호-소마(signa-somatic)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본다.[xxvi] 몸이 받아들이는 감각정보가 올라가는 상향(bottom-up)의 과정은 소마-시그니피컨스라 할 수 있고, 생성 모델에서 비롯하는 예측오류가 내려오는 하향(top-down)의 과정은 기호-소마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적 유사성은 프리스턴의 자유에너지 원칙과 능동적 추론의 모델이 봄의 내향적 펼쳐짐과 내재적 질서의 개념을 통해 새롭게 재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현재 프리스턴의 능동적 추론  모델이나 마코프 블랭킷 등의 개념들은 봄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전히 기계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측오류의 업데이트 과정이나 생성모델의 작동 등을 내면적 펼쳐짐으로 재해석 하는 과정이 앞으로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접점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내면소통의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이론적 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BOX]--------------------------------------------------------------------------------------------------------------

소마-시그니피컨스 음역으로 표기하는 이유

‘soma-significance’를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고 ‘소마-시그니피컨스’라는 음역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몸-의미’ 등으로 번역할 경우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소마’는 물질적이면서 육체적인 몸을 의미한다기보다 주관성과 객관성이 통합된 존재로서의 몸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질과 정신의 통합성을 강조하려는 봄의 입장에서는 ‘body’보다는 ‘soma’를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다. 다만 우리말로는 ‘body’나 ‘soma’ 모두 ‘몸’으로 번역될 수밖에 없으므로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그냥 ‘소마’라고 표기했다. 


‘significance’도 마찬가지로 굳이 번역하자면 ‘의미’라 해야 한다. 그러나 봄은 곧 이어서 ‘soam-significance’의 관계를 ‘matter-meaning’의 관계와 비교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significance’도 ‘의미’라 번역하고 ‘meaning’도 의미라 번역한다면 독자들은 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significance’는 기호 ‘sign’에서 온 말이다. 기호작용의 결과로 생겨나는 의미가 곧 ‘signficance’이다. 기호는 물질과 의미의 결합체다. ‘soma’라는 단어에 이미 주관성과 객관성을 통합하는 뉘앙스가 담겨있는 것처럼 ‘significance’라는 단어에도 이미 물질과 의미를 통합하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봄은 소마-시그니피컨스가 물질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의 내향적 펼쳐짐을 의미한다면 그와 반대로 정신적인 것에서 물질적인 것으로의 외향적 펼쳐짐은 ‘기호- 소마(signa-somatic)’라 부른다. ‘signa’는 ‘sign’의 라틴어다. 이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soma-significance’에서의 ‘significance’는 기호에 관한 어떤 것 혹은 ‘기호작용으로서의 의미’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soma-significance’를 ‘소마-기호’ 혹은 ‘소마-기호의미’라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만족스러운 번역이라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독자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소마-시그니피컨스’라고 표기하는 것이 봄의 논지를 가장 정확하게 잘 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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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의미, 에너지의 삼자관계와 자아의 세가지 범주

기호로 가득  우주


봄의 소마-시그니피컨스는 기호학에서의 ‘기호(sign)’의 개념과 매우 비슷하다. 기호는 물질과 의미의 결합으로 정의된다. 기호는 의미를 실어나르는 물질인 동시에 물질화된 의미다. 봄이 소마-시그니피컨스 관계의 사례로 드는 것은 종이 위의 인쇄된 잉크 자국이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나, 텔레비전 화면을 구성하는 화소들이 시청자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 등이다. 이것은 모두 ‘기호현상(semiosis)’이다. 봄은 비록 ‘기호’라는 용어는 직접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관련성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면 결국 우주의 모든 것을 기호현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봄의 이러한 관점은 퍼스와 매우 비슷하다. 퍼스 역시 우주가 물질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물질과 의미로 이뤄져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이 우주는 기호로 가득 차 있다”라고 본 것이다. 퍼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결국 이 우주 전체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우주 전체는, 단지 물질적 존재들의 집합으로서의 우주뿐 아니라 물질적 존재의 우주를 포함해서 우리가 흔히 ‘진리’라고 부르는 모든 비물질적 존재까지를 아우르는 전체로서의 이 우주는, 전적으로 기호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기호로 가득 차 있다.”[xxvii]  


봄의 소마(물질)와 시그니피컨스(의미)의 관계는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기의’와 ‘기표’의 관계와 매우 비슷하다. 기표는 의미를 실어나르는 기호의 물질적 측면이며, 기의는 기표라는 물질을 통해서 드러나는 의미이다. 얼핏 보면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관계는 소쉬르의 기의-기표 개념과 마찬가지로 양자(dyadic)관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봄은 소마와 시그니피컨스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소마, 기호, 에너지라는 세 요소가 삼자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소마와 기호의 관계는 물질과 의미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 물질과 의미는 서로 내향적으로 펼쳐져 들어가고 또 외향적으로 펼쳐져 나오는데 이때 에너지가 늘 관여한다. 물질과 에너지는 근원적으로 같은 것이고 그것을 연결해주는 것이 의미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공간의 물리학적 의미에 대해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질을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에서는 시공간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변하지 않는 것이며 물질과는 상관없이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본다. 이것이 17세기 이래 데카르트, 칸트, 뉴턴을 거쳐서 우리의 상식이 되어버린 ‘시공간의 절대성’이다. 시공간의 절대성은 이미 수백 년이 되어버린 낡은 개념이고, 아인슈타인이 이미 100여 년 전에 상대성이론을 통해 폐기처분한 개념이다. 그런데도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은 확고한 고정관념으로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시공간은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존재가 아니라 에너지와 물질에 의해서 생성되고 변화되는 존재이다. 시공간이 물질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에너지와 물질이 시공간의 전제조건이다. 이것이 물리학적 사실이다. 상대성이론의 핵심은 시공간의 절대성을 폐기하는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의 뉴턴 물리학과 아인슈타인 물리학의 결정적 차이가 바로 시공간의 절대성이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공간은 중력 등의 에너지에 의해서 얼마든지 생성되고 변형되는 일종의 에너지 장(field)이어서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우주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시간도 공간도 아니고 오직 빛의 속도뿐이다. 


우주에는 빛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다. 물질을 이루고 있는 전자나 중성자 같은 미립자들이다. 전자는 빛처럼 한 방향으로 쭉 가는 것이 아니라 반사되어 앞뒤로 움직인다. 이러한 좌충우돌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며 에너지를 물질 상태로 바꾼다. 물질은 에너지가 응축된 것이다. 이러한 에너지의 응축이 곧 ‘들뜸(excited)’ 상태이다. 좌충우돌의 상태가 멈추면 다시 에너지로 돌아간다. 우주의 모든 물질의 기본 상태는 에너지다. 전자의 좌충우돌 상태가 일정한 패턴을 지니게 되면 물질이 탄생한다.[xxviii] 이처럼 물질과 에너지는 본질적 측면에서 같은 것이다. 에너지의 응축이 곧 물질이 되고 시간과 공간을 탄생시킨다. 따라서 순수한 에너지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xxix] 


사람의 몸 역시 물질로 이뤄져 있다. 인간도 에너지로 이뤄진 존재다.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부분도 에너지이며 생명현상 자체도 에너지의 작용이다. 의식도 마찬가지다. 의식은 물질이 아닌 순수한 에너지다. 따라서 의식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의식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시간과 공간에 의식이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것이 의식의 기본적인 특성이다. 의식은 우주 전체에 편재할 수 있다. 순수한 의식은 곧 순수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에너지의 흐름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의미다. 의미와 스토리의 생성 과정인 내면소통 역시 에너지의 흐름이다. 봄은 물질, 에너지, 의미가 삼자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xxx]  물질을 에너지로 변화시키고 다시 에너지를 물질로 변화시키는 매개체가 바로 ‘의미’라는 것이다. 


우주의 거의 모든 것이 다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퍼스 역시 기호현상을 삼자관계로 본다. 이 삼자관계는 양자관계로 압축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기호현상의 기본적인 세 가지 요소로 돼 있다. 퍼스에 따르면 기호현상은 대상과 주체 또는 두 개의 사물 혹은 두 사람 등 두 개체 사이의 양자관계가 아니다. 여기서 기호현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현대 기호학의 창시자라 일컬어지는 퍼스는 기호를 “인간의 정신에 대해 어떤 대상을 대신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 정의한다. 이미 이 정의에 기호현상의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정신 혹은 의미, 어떤 대상, 그리고 그 대상을 가리키는 기호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개’라는 글자가 있다고 하자. ‘개’라는 글자(문자)는 기호다. 그것은 종이에 잉크로 인쇄되어 있을 수도 있고, 캔버스에 그림물감으로 그려져 있을 수도 있으며, TV 화면에 자막으로 처리되어 있을 수도 있다. 어떠한 물질적 기반을 갖든 모두 다 기호다. 종이에 잉크로 인쇄된 ‘개’라는 기호는 인쇄매체를 기반으로 하고, TV 화면에 자막으로 나타난 ‘개’라는 기호는 TV라는 전자영상매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동일한 기호 ‘개’는 다양한 매체, 즉 다양한 물질적 기반 위에 존재할 수 있다. 


기호는 반드시 물질적 기반을 필요로 한다. 기호는 지각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기반이 없는 것은 우리 몸에 의해 지각될 수 없으며, 지각될 수 없는 것은 기호가 될 수 없다. 순수한 아이디어나 의미 자체는 그것이 지각될 수 있는 사물에 의해 표현되지 않는 한 기호가 될 수 없다.[xxxi]


이처럼 기호현상은 언제나 세 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지시체(object 혹은 referent), 기호체(sign vehicle 혹은 representamen), 그리고 해석체(interpretant 혹은 sense)다. 여기서 ‘해석체’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기호에 대한 생각일 수도 있고 혹은 기호의 의미일 수도 있다. (1)기호가 가리키는 사물로서의 대상 (2)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 (3)대상과 기호를 한데 묶어내는 의미의 세 가지 요소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기호현상을 만들어낸다. 이 삼자관계에서 각각의 존재는 나머지 둘에 의존한다.[xxxii] 예를 들자면 (1)실제 세상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동물로서의 ‘개’가 대상이며 (2)그 대상을 가리키는 ‘개’라는 글자나 단어가 기호체이고 (3)네발 달린 충성심 가득한 반려동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추상적 존재로서의 ‘개’가 해석체이다. 이러한 삼자관계는 봄의 물질, 의미, 에너지의 삼자관계와 매우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봄의 소마-시그니피컨스 관점에 따른 물질-의미-에너지(matter-meaning-energy)의 관계는 퍼스의 기호현상에서 지시체-기호체-해석체(referent-representamen-interpretant)의 관계와 정확한 대응을 이룬다(그림 6-6 참조). 또 이러한 삼자관계는 퍼스의 세 가지 기본 범주인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firstness : secondness: thirdness)과도 대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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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6물질-에너지-의미의 삼자관계와 기호현상의 삼자관계

*봄의 물질-의미-에너지(matter-meaning-energy)의 관계는 퍼스의 기호현상에서의 지시체-해석체-기호체(referent-interpretant-representamen)의 관계와 정확한 대응을 이룬다. 지시체는 기호체가 가리키는 구체적인 대상이자 물질이며, 해석체는 기호체의 의미다. 에너지로서의 기호체는 대상과 의미를 묶어주어 역동적인 삼자관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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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가지 범주


내면소통의 관점에서 보자면 구체적이고도 물질과도 같은 존재가 기억자아고, 그것의 배경이 되는 순수의식이 배경자아이며, 그 둘을 연결해주는 것이 경험자아라 할 수 있다. 봄과 퍼스의 삼자관계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아(self)에는 크게 보아 세 가지 범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기억자아(remebering self) :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나’라고 칭하는 것이다. 기억자아의 다른 이름이 바로 에고(ego)인데 이는 다른 사람과의 구분과 비교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나’이다. 특정한 성향과 성격을 가진 존재이며, 특정한 이력과 개인사를 지닌 존재다. 그래서 개별자아(seperated self)라고도 불리운다. 다른 사람과의 구별을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기억자아가 지닌 것이 바로 자의식이며, 끊임없이 주변 환경이나 사람들에 대해 ‘반응’하고 ‘저항’한다. 저항함으로써 구분 짓고 반응한다. 끊임없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우월감을 느낌으로써 존재 의의를 찾고자 한다. 생각이나 감정의 에너지가 뭉쳐지고 들떠서 기억의 덩어리로 집적된 존재다. 늘 과거에 얽매이고 과거를 미래에 투사함으로써 미래에 대해 불안해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을 해나가기 위해서 발달된 몸의 움직임과 그에 관한 의도의 메커니즘이 과도하게 강화된 결과로 생겨난 존재라 할 수 있다. 


•      경험자아(experiencing self) : 지금 현재 벌어지는 일을 경험할 때 작동하는 자아다. 캐니먼이 직장내시경 실험 등 여러 연구를 통해서 그 존재를 밝혀낸 ‘경험하는 자아’는 현재의 고통이나 즐거움을 경험하는 경험자아다.[xxxiii] 경험자아는 항상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몸의 통증을 느끼거나 혹은 편안함을 느낄 때, 또는 즐거운 일로 행복감을 느낄 때 경험자아는 전면에 드러난다. 행복감은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가 이야기하는 ‘몰입(flow)’의 경험이 대표적인 사례다. 격렬한 운동, 공연예술, 엄청난 자연, 깊은 대화, 진정한 사랑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매슬로우가 말하는 절정경험(peak experience)의 주체가 바로 경험자아다.[xxxiv] 


•      배경자아(background self) : 기억자아나 경험자아를 알아차리는 존재다. 배경자아는 순수한 에너지의 흐름과 같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존재다. 순수한 의식으로서 배경자아는 알아차림의 주체일 뿐 대상이 아니다. 모든 사물 뒤에 그것이 점유하는 텅 빈 공간이 있고, 모든 소리 뒤에 그것이 점유하는 고요한 침묵이 있는 것처럼 모든 기억자아나 경험자아 뒤에는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배경자아가 있다. 기억자아는 내가 가진 어떠한 것들의 총합에 불과하고 나 자신이 아님을 깨닫는 존재가 배경자아다. 경험자아가 어떤 것을 경험하는 순간에 ‘아, 내가 지금 이러한 경험을 하고 있구나’를 알아차리는 존재가 배경자아다. 기억자아가 실체로서의 자아라면 배경자아는 순수한 에너지로서의 자아다.


순수에너지의 형태로 우리의 내면을 가득 채우는 투명한 존재가 바로 순수의식이며 배경자아라 할 수 있다. 에너지 일부가 좌충우돌하여 뭉치고 들뜨는 것이 입자가 되는 것처럼, 의식의 일부가 뭉치고 들뜸으로써 마치 입자처럼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곧 생각과 감정이고, 이러한 생각과 감정의 흐름이 경험자아를 이룬다. 이러한 생각들이 스토리텔링이 되어 일화기억으로 쌓이는 것이 ‘자의식’이고 그것의 집적물이 ‘기억자아(ego)’다. 


에너지와 물질을 연결해주는 것이 의미인 것처럼, 배경자아와 기억자아를 연결해주는 것이 경험자아다. 물질이 에너지에서 나오는 것이고 에너지의 한 특별한 형태인 것처럼, 기억자아 역시 배경자아에서 나오는 것이고 배경자아의 한 특별한 형태다. 물질-의미-에너지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우주의 다양한 현상이고, 대상-기호-해석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다양한 기호현상이듯이, 기억자아-경험자아-배경자아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내면소통 현상이다. 


내면소통 훈련의 목표는 기억자아를 부정하거나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잘 이해하는 데 있다. 세 가지 범주로서의 자아는 하나의 에너지의 세 가지 측면일 뿐이다.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문제는 기억자아만 존재한다고 확신하거나 기억자아가 곧 나의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데 있다. 기억자아(ego)가 곧 나라고 믿는 데서 온갖 고통과 번뇌와 괴로움이 비롯된다. 그렇다고 해서 기억자아를 완전히 부정해버릴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기억자아는 우리가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진화한 결과로 탄생한 매우 유용한 기제다. 다만 기억자아는 배경자아의 특수한 한 형태이고, 에너지가 뭉치고 들뜬 일시적인 상태이며, 끊임없이 변해가는 나라는 존재의 한 측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본래적 의미의 나는 순수의식으로서의 배경자아다. 기억자아와 배경자아를 연결해주는 것이 경험자아다. 배경자아는 경험자아를 통해서 지금 여기에 알아차림의 주체로서 등장한다. 경험자아를 통해서 우리는 배경자아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다. 내면소통 훈련의 목표는 기억자아, 경험자아, 배경자아가 모두 하나의 에너지 흐름의 세 가지 측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자아의 세 측면이 조화롭게 잘 어우러지도록 하는 데 있다. 지금까지 논의된 삼자관계는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는데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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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의미: 에너지 (matter: meaning : energy)

= 지시체: 해석체: 기호체 (referent: interpretant: representamen)

=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 (firstness : secondness: thirdness)

= 개별자아: 경험자아: 배경자아 (separate self: experiencing self: background 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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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프리스턴: 능동적 정보와 능동적 추론

능동적 정보와 정보의 행위


내면소통과 관련해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봄의 ‘정보(information)’ 개념이다. 봄이 말하는 ‘information’은 일반적 의미의 ‘정보’라는 뜻을 포함하면서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정보 개념에 관한 봄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1952년에 발표된 ‘숨겨진 변인(hidden variables)’에 관한 논문에서 나타난다.[xxxv] 


봄은 전자가 실체를 지닌 입자이긴 하지만 양자잠재력(quantum potential)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힘에 의해서 ‘안내(guide)’되는 것이라 보았다. 물리학에서 잠재력(potential)은 대개 힘의 세기나 크기에 의해서 효과가 결정되는데, 양자잠재력은 힘의 크기가 아니라 오직 ‘형태(form)’에 의해서만 효과가 결정된다.


봄은 두 개의 슬릿 실험에 대해서도 파동함수의 붕괴라는 전통적인 코펜하겐 해석 대신에 양자잠재력이라는 능동적 정보(active information)의 개념을 사용해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입자는 두 슬릿 중 하나를 지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전자는 하나의 슬릿만 선택한다. 그런데 양자잠재력은 두 슬릿에 대한 정보를 모두 갖고 있다. 일종의 잠재력으로서 이러한 정보는 활성화(active)된 것이지만, 일단 전자가 하나의 통로를 선택해서 특정한 통로로 지나가는 순간 다른 통로에 대한 정보는 비활성화(inactive)된다. 이것이 마치 ‘인간 의식의 관찰자 효과’에 의한 것처럼 나타나는 것뿐이다. 실제로는 실험 조건에 대한 정보가 직접 전자 사이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봄의 이러한 가설은 수십 년 뒤 실험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전자는 파동이었다가 입자이었다가 하면서 상태를 바꾼다기보다는 ‘능동적 정보’에 의해서 가이드되는 입자로 볼 수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xxxvi] 슈뢰딩거의 파동함수는 능동적 정보로서 입자 운동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xxxvii] 


봄은 물리적 실체로서의 전자를 고정된 입자라기보다는 하나의 ‘과정’으로 본다. 지속적으로 내부의 구체적인 방향을 향해서 붕괴되어 가면서 동시에 바깥으로는 확장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양자잠재력에 의해서 가이드된다. 양자입자나 양자사건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양자잠재력 혹은 ‘정보의 행위(activity of information)’가 필요하다. 정보가 ‘행위’를 한다는 말은 단순한 메타포가 아니다. 실제로 물리적 실체로서의 정보는 일정한 ‘행위’를 한다. 무엇인가 행위를 하는 능동적 실체다.[xxxviii]


‘정보의 행위’라는 개념이 생소하게 들릴 수밖에 없으리란 점은 봄 자신도 인정한다.[xxxix]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행위’는 물리적 실체에만 적용되는 개념이었기에 물리적 실체가 아닌 ‘정보’가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개념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물리학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물질과 마음은 모두 에너지로서 그 본질적 측면에서는 같은 실체다. 따라서 ‘능동적 정보(active information)’ 또한 물질과 정신의 이론적 통합의 고리를 제시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xl]


‘정보의 행위’라는 개념에서 ‘정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정보와 매우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섀넌(Claude Shannon)이 제안했던 정보이론에서 다뤄지는 ‘정보’는 인간을 위한 주관적(subjective) 정보다.[xli] 즉 인간에게 의미를 지니고 영향을 미치는 경우의 정보다. 물리학 관점에서의 정보는 인간이 아닌 입자를 위한 것으로 객관적(objective) 정보다. 상당히 다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봄의 오랜 공동연구자였던 하일리(Basil Hiley)는 섀넌의 정보이론에서 말하는 ‘주관적’ 정보를 위해서도 물리학 관점에서의 ‘객관적’ 정보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본다.[xlii] 섀넌의 정보이론이 물리학 관점의 능동적 정보라는 개념을 통해 보완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봄은 양자잠재력 혹은 능동적 정보의 작동방식을 커다란 배가 레이더 신호로 방향을 찾아가는 것에 비유한다. 레이더 신호는 분명히 배의 진행 여부와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결코 ‘힘’으로 배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다. 배의 움직임은 엔진 힘과 주변 환경인 파도와 바람의 힘으로 움직일 뿐이다. 다만 배는 레이더 신호의 ‘가이드’를 받아서 따라간다. 배는 레이더 신호라는 ‘정보’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때 레이더 신호는 분명 물리학적 실체지만, 한편으론 지속적으로 배의 진행 방향을 ‘형성시키는 과정에 있는(in-form)' 잠재력이기도 하다. 이러한 잠재력이 정보의 본질이다. 정보(information)는 곧 ‘형성시키는 과정(in-formation)’인 것이다.[xliii] 


양자잠재력은 전자를 입자와 장(field)의 분리할 수 없는 결합으로 본다. 내재적 질서로서의 장(field)은 능동적 정보로서 입자의 행동을 가이드한다. 이러한 장(field) 개념이야말로 양자물리학과 고전적 뉴턴 물리학을 구분 짓는 핵심이다. 능동적 정보의 개념은 ‘나뉠 수 없는 전체로서의 우주’와 양자물리학의 ‘비국지성’의 기반이 된다. 또 능동적 정보의 개념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지 않는 새로운 이론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여기에서의 핵심 개념은 독립된 실체들 사이의 외적인 상호작용이 아니라 전체로서 하나인 다양한 요소들의 ‘내향적 펼쳐짐’과 ‘참여’다.[xliv]


봄은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관계 속에서 의식이 몸을 가이드하듯이 능동적 정보가 물질의 형성과 작동을 가이드한다고 본다.[xlv] 봄의 능동적 정보 개념은 인간의 의식적 생각 자체가 지닌 힘을 양자영학적 정보 개념을 통해서 이론화할 수 있게 한다. 나아가 다양한 인지적 현상과 심리학적 현상, 집단적 의식과 행동, 생명체 안에서의 신체 현상과 정신 현상의 연결성 등에 대한 수학적 설명 역시도 가능하다. 지금까지 뇌과학이나 인지신경과학 분야에서는 신경세포의 작동방식과 관련해 양자물리학적 효과를 제대로 고려해본 적이 없다. 펜로즈와 같은 극소수의 물리학자들이 신경인지 과정과 관련해 양자물리학 관점의 가설을 제시했을 뿐이다. 인지와 의식의 근본적인 작동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경세포들 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양자물리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봄의 능동적 정보의 개념은 신경세포의 시냅스 연결과 작동방식을 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 뇌의 작동에 의해서 생겨난 자아(self)가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생각하고, 스토리텔링하여 자신의 기반이 되는 뇌의 작동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고전물리학의 ‘에너지보존의 법칙’에 어긋난다. 그러나 전자의 파동이 자신의 에너지 수준보다 더 높은 수준의 에너지 장벽을 투과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양자터널효과(quantum tunnelling)는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시냅스에서의 세포외 연결작용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xlvi] 신경세포들간의 상호작용이 의식과 인지작용을 생성해내는 과정을 고전물리학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하지만 봄의 능동적 정보와 양자잠재력 에너지의 개념은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뇌의 작동방식을 설명할 수 있다. 


프리스턴과 봄의 만남 능동적 추론과 능동적 정보 개념 통합 가능성


봄은 우리가 과연 “의식에서 내재적 질서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를 묻는다.[xlvii] 의식은 생각의 흐름이다. 모든 생각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함축한다는 것은 하나의 생각(단어, 문장)이 그 자체의 의미를 지니면서도 그것을 넘어서서 더 넓고 깊은 뜻으로 펼쳐져 나간다는 뜻이다. ‘함축하다(implicit)’라는 말은 ‘내재적(implicate)’이란 말과 어원이 같다. 의미는 항상 생각이나 언어적 표현에 함축된다. 의미의 본질은 그래서 내향적으로 펼쳐지는 내재적 질서다. 


하나의 기호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넘어서서 내재적 질서에 편입됨으로써 다른 의미를 함축할 수 있다. 이것이 곧 가추법적 의미에서의 추론이다. 봄의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구조가 퍼스의 기호생산 모델과 유사성을 갖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봄의 말대로 “함축이라는 것은 논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추론”이기 때문이다.[xlviii] 앞에서 살펴봤던 사례를 통해 설명하자면, ‘닳아서 반들반들해진 소매’는 그 옷을 입은 사람이 타자수라는 사실을 ‘함축’하는 기호이고, 이러한 기호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 곧 추론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추론’은 프리스턴의 자유에너지 원칙과 능동적 추론 모델에서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뇌는 기본적으로 능동적 추론을 해내는 시스템이며 그러한 추론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것이 ‘의식’이다. 의식은 능동적 추론 과정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이면서 동시에 추론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생겨난 뇌의 기능이다. 기호학자인 퍼스, 뇌과학자인 프리스턴, 물리학자인 봄이 모두 인간 의식작용의 핵심에 ‘추론’이 있다고 본다. 추론과 예측오류는 모두 ‘형성시키는 과정(in-formation)’으로서의 특성을 가졌다. 그것은 배를 움직이는 엔진의 힘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엔진의 힘을 일정한 방향으로 가이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능동적’이다. 봄의 핵심적인 개념인 ‘능동적 정보’와 프리스턴의 핵심적인 개념인 ‘능동적 추론’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는 ‘능동적(active)’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다.


첫째는 피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라는 뜻이다. 자유에너지 원칙에서 뇌의 추론 과정은 주어진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역동적 균형상태인 알로스태시스를 향해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예측하고 자신의 모형에 따라 조절을 한다. 그렇기에 동일한 자극에 대해서도 뇌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 봄의 능동적 정보 역시 양자잠재력으로서 능동적으로 입자를 형성(formation)시키고 가이드한다. 


둘째는 ‘행위’와 관련된다는 뜻이다. 생명이란 움직임이다. 신경시스템 자체가 움직임을 위해 존재하고, 동시에 움직임은 감각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움직임을 전제로 지각하며, 지각된 것을 바탕으로 움직인다. 마코프 블랭킷 모형에서의 감각상태가 추론을 통해 생산해내는 것이 지각(perception)이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내부상태가 추론을 통해 생산해내는 것이 개념(conception)이다. 이것이 의식의 기반이다. 프리스턴의 능동적 추론은 하나의 생명체가 주어진 환경에서 움직임을 통해 살아남기 위한 시스템이다. 이것이 뇌의 존재 이유다. 


봄의 능동적 정보 역시 마찬가지다. 봄은 ‘정보의 행위’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정보 자체에는 질량이 없으나 에너지에 변화를 주어 질량을 지닌 입자를 형성하는 ‘행위’를 한다. 특히 형성시키는 과정으로서의 정보의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이다. 한 사람의 내부상태인 의식이 형성하는 의미와 생각이 일종의 에너지 흐름으로 다른 사람의 의식으로 펼쳐져 들어가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이다. 봄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내재적 질서와 내향적 펼쳐짐의 대표적인 사례로 본다.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는 ‘전체로서의 우주’의 작동방식 자체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장(field)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텅 비어 있음으로 꽉 차 있다.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지각할 수 없기에 암흑물질 혹은 암흑에너지로 불리는 이 배경으로서의 텅 빈 우주는 하나의 온전한 전체다. 거기에 약간의 흠집이나 구멍이 난 것들이 물질이다. 혹은 에너지 일부가 들뜬 상태로 진동하면서 뭉친 것이 곧 물질이다. 물질의 본 모습은 암흑물질이고 순수한 에너지다. 인간의 의식 역시 순수한 에너지의 일종이다. 에너지로서 의식의 흐름이 일부 들뜨고 뭉쳐진 것이 생각이고 감정이고 개념이고 이야기다. 따라서 생각이나 감정이나 개념은 순수의식 자체와 본질적으로 같다. 모든 물질적 실체가 에너지와 본질적 측면에서 같은 것처럼 말이다.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구성요소들이 외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집합체로서의 전체를 구성한다는 고전물리학의 관점은 프리스턴의 자유에너지 원칙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예측오류의 최소화를 위한 시스템으로 뇌를 파악하는 능동적 추론 모델 역시 기본적으로 기계론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다. 


감각기관을 통해 유입되는 감각자료는 고정된 실체로 간주된다. 감각자료를 평가하는 생성모델이나 그로부터 ‘계산되어’ 나오는 ‘예측오류’ 역시 특정한 값을 지닌 개별적인 실체들로 간주된다. 신경세포들 역시 마찬가지다. 전체로서의 바다에 파도처럼 신경세포가 존재한다기보다는 신경세포라는 고정적 실체로서의 입자들이 모여서 뇌라는 전체 구조물을 이룬다고 보는 것이다. 내부상태도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이고 외부 환경도 그러하며 그사이에 경계로서 존재하는 마코프 블랭킷도 그러하다. 모두 다 고정된 실체다.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의 ‘정보’ 역시 일종의 입자처럼 간주된다. 정보는 내부상태의 일부도 아니고 감각상태의 부분도 아니며 단지 감각상태에서 내부상태로 전달되는 어떤 실체일 뿐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정확한 ‘지각’을 생산해내는 것이 능동적 추론 시스템의 임무다. 행위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만 이러한 요소들 간의 관계가 작동하는 것이지, 정보 자체가 그 시스템의 일부를 이루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우주나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것에는 늘 한계가 있다. 언젠가는 모순에 부딪힌다. 예컨대 능동적 추론 모델에서는 추론의 결과로서 의식이 생긴다고 본다. 하지만 능동적 추론이라는 개념 자체가 예측오류의 최소화를 ‘의도’하는 일종의 선험적인 에이전트를 전제하고 있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고 만다. 의식의 작동방식이나 특징에 대해서는 자유에너지 원칙이 효율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생아에게도 훌륭하게 작동하는 마코프 블랭킷이 있고 능동적 추론 시스템도 있다. 하지만 자의식은 없다. 만 1세와 4세 사이에 도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나길래 자의식이 생겨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자유에너지 원칙이나 마코프 블랭킷 모델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의식과 자의식의 문제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극복해야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해진다. 의식을 독립적인 부분적 실체들이 외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내는 현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관점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xlix] 봄의 능동적 정보와 내재적 질서의 개념은 우주에 대한 관점뿐 아니라 의식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준다. 프리스턴의 자유에너지 원칙과 능동적 추론 모델이 봄의 내재적 질서, 전체성, 내향적 펼쳐짐 등의 개념을 적극 수용한다면 이론적 설명력에서 그야말로 퀀텀 점프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자유에너지 원칙도 에너지에 관한 물리학적 개념을 빌린 것이고, 능동적 추론 역시 봄의 능동적 정보와 개념적으로 매우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내재적 질서와 내향적 펼쳐짐 개념을 통해 능동적 추론으로서의 의식작용이나 생성모델의 작동방식을 개념화하는 작업은 상당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특히 프리스턴의 능동적 추론 모델을 봄의 능동적 정보 개념과 결합한다면 뇌의 거시적 작동방식과 미시적 작동방식에 관한 새로운 통합적 모델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봄의 내재적 질서와 프리스턴의 자유에너지 원칙의 이론적 통합의 출발점은 아마도 생성질서 혹은 생성모델의 개념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생성질서와 내면소통

생성질서와 인과관계


기계론적 세계관의 핵심은 인과관계다. 사물들의 관계를 원인과 결과로 파악하는 것이 인과론이다. 인과론의 핵심적 아이디어는 라이프니츠의 시공간에 대한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시간이나 공간이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 사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상대적인 것이라 보았다. 시간은 ‘연속적인 사건들의 질서(the order of sequences)’에서 나오는 것이고 공간은 ‘동시에 존재하는 것들의 질서(the order of coexistence)’에서 비롯된 것이다.[l] 시간이나 공간은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건과 사물들에 의해서 개념적으로 구성되는 질서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들은 철저한 외재적 질서에 입각한 기계론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사건들을 전제하고 있다. 공간 속에 흩어져 동시에 존재하는 ‘공존’의 개념 역시 개별적이고 구분되는 독립적 사물을 전제한다. 당구대에 공들이 여럿 놓여 있는 것처럼 여러 사물이 공존할 때 공간이 구성되고, 공 하나를 쳐서 다른 공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처럼 연속적인 사건들에 의해 인과관계가 생겨나며 그에 따라 시간이라는 개념도 생겨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는 이러한 기계론적 관점으로 살아가는 것에 별 문제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당구를 치거나 탁구나 골프를 치거나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사물들 간의 외재적 질서와 인과관계를 통해서도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은 실체의 모습이나 우주의 근본적인 작동원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때에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한계를 노출하기 마련이다. 


특히 인간의 의식작용이나 소통과 같은 현상은 외재적 질서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우주의 근본 질서나 양자세계 혹은 인간 내면과 의식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재적 질서를 포괄하는 내재적 질서의 개념이 필요하다. 내면소통 훈련을 통한 마음근력 키우기와 관련해서도 내재적 질서의 관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뇌의 작동방식이나 의식과 감정의 문제는 고정된 실체들의 인과적 질서로는 도저히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작동방식을 인과론적으로 이해한다. 예컨대 병에 걸리는 것은 외부적인 어떤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침투에 의한 것이고, 소통을 잘해서 설득이 이뤄지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유입되는 어떤 메시지에 의한 것이라는 식이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바이러스’나 ‘메시지’는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이 또 다른 고정된 실체인 인간의 몸이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말하자면 바이러스나 메시지는 원인이고, 질병이나 설득은 결과라는 식이다. 하얀색 당구공이 붉은색 당구공과 충돌할 때 먼저 움직이는 하얀색 당구공이 원인이고, 그것에 의해 움직이게 된 붉은색 당구공이 결과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과론만으로는 내면소통의 작동방식을 충분히 설명해내기 어렵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은 독극물에 중독되는 것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어떠한 메세지에 의해서 설득되는 것 역시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려 물의 색깔을 변하게 하는 것과는 성질이 다르다. 봄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인과관계를 대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생성질서(generative order)’를 제안한다. 생성질서는 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기보다는 능동적 정보의 영향을 받아 이에 반응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생성’해낸다는 의미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폐렴을 앓게 되거나 소통에 의해 설득이 되어 생각이 바뀌는 것은 인과관계적 관점보다는 생성질서의 관점에서 설명해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인과적 사고방식은 어떤 문제나 현상이 있을 때 그것을 낳은 ‘원인’을 찾으려 한다. 어느 도시에 공해가 심각한 수준이라면 언제 공장이 세워지기 시작했는지 묻고, 누군가 암에 걸렸다면 어떤 유전자가 문제인지 묻고, 트라우마나 불안장애가 발생하면 어떤 충격이나 사건이 그러한 정신적 문제를 가져왔는지 묻는 식이다. 봄은 이러한 연속적 사건들의 외재적 질서와 인과적 사고방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개념적 틀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생성질서’이다. 


어느 도시에 공장이 처음 세워진 것이 공해의 계기가 된 것은 맞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 ‘원인’이라고 보긴 어렵다. 한 공장이 처음 세워지고 난 후에 계속해서 여러 공장이 더 들어서고, 그러한 공장들을 지금까지 가동하고 있다는 총체적 사실이 공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과거의 어떤 특정 계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계속 ‘생성’되는 질서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암의 경우에도 유전자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암이 생겼다기보다는 그러한 유전자를 갖고 있으면서도 건강하지 않은 특정한 생활습관을 계속 유지해왔다는 사실이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봐야 한다. 특정 유전자가 어떠한 조건에서든 항상 암을 일으키는 경우란 없기 때문이다. 유전자든, 발암물질이든, 환경이든, 생활습관이든, 무엇이든 간에 암을 유발하는 ‘원인’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과거의 불행한 일이 트라우마나 정신장애의 한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거의 불행한 일 자체보다는 그 불행한 일이 유발했던 고통이나 부정적 정서를 차단하고 억누르는 메커니즘을 계속 작동시키는 현재의 습관이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불행했던 일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부정적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증폭시켜서 강박적 사고를 하는 등 불행한 일 이후의 지속적인 행동, 사고, 인지 패턴의 습관화가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해서 모두 PTSD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트라우마를 겪었으나 PTSD 환자가 되지 않는 사람의 비율이 훨씬 더 높다. 공해, 암, PTSD 등의 공통점은 그것을 유발하는 데 관여한 ‘계기’는 분명 있으나, 그 계기를 사태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은 전체적인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생성질서는 이러한 ‘계기’뿐 아니라 그러한 계기가 촉발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되는 어떠한 지속적인 과정까지 전체적으로 살펴봐야 함을 시사하는 개념이다. 생성질서야말로 봄이 계속 강조하는 전체로서의 우주, 즉 ‘전체성’에 입각한 개념이다. 


생성질서의 대표적인 사례는 바이러스 감염이다. 인류를 팬데믹의 공포로 몰아넣는 바이러스 감염 역시 인과관계보다는 생성질서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는 것은 바이러스가 독립적이고 외적인 실체로서 우리 몸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바이러스는 일종의 DNA 파편들에 불과하다.[li] 그것이 우리 몸 세포 속의 유전자를 교란해 바이러스를 증식시키도록 유도한다. 바이러스는 우리 몸 세포의 복제 시스템을 이용한다. 외부에서 오는 바이러스는 일종의 ‘능동적 정보’다. 그것의 ‘가이드’를 받아서 우리의 몸이 스스로 에너지와 단백질을 공급하고 화학작용과 대사작용을 통해서 바이러스들을 계속 증식시키는 것이다. 바이러스 감염은 그 자체로서 질병이라기보다는 몸으로 하여금 염증을 비롯한 여러가지 질병을 만들어내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생성질서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바이러스가 증식할 수 있는 환경을 우리 몸이 스스로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바이러스야말로 능동적 정보로서의 '인-포메이션(in-formation)'인 것이다. 


바이러스는 마치 배의 진행 방향을 알려주는 무선라디오 신호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배를 움직이는 힘 자체는 라디오 신호에서 오지 않는다. 라디오 신호는 다만 능동적 정보로서만 작동한다. 실제 배를 움직이는 힘은 배 자체의 엔진에서 나온다. 바이러스는 일종의 능동적 정보인 셈이다. 마치 입자 상태에 영향을 주는 양자잠재력과도 같다. 바이러스는 우리 몸 안으로 내향적 펼쳐짐을 하는 것이다. 


바이러스 감염병은 숙주인 사람의 몸이 바이러스에 ‘협조해서’ 생성해내는 생성질서의 대표적인 예이다. 숙주의 입장에서는 바이러스에 저항하고 말고 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 세포 자체의 복제 프로그램 등 단백질 작동방식을 바이러스가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면역력이 있는 경우에는 다르다. 대부분 사람은 코로나바이러스를 이겨낸다. 그러나 소수는 위험한 상황까지도 간다. 중증환자가 되거나 폐와 혈관을 비롯해 여러 장기를 파괴하는 것 역시 바이러스 자체가 아니라 우리 몸의 면역시스템이다. 즉 바이러스에 의한 면역시스템의 교란으로 인해 몸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능동적 정보인 바이러스는 우리 몸을 직접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가도록 방향만 제시한다. 따라서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현상은 기계론적 인과론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바이러스는 생성질서에 따라 작동하는 능동적 정보다. 


하나의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는 것을 생각해보자. 씨앗 하나에는 DNA 정보와 약간의 영양분만 들어있을 뿐이다. 그것이 나무로 자라나려면 공기, 물, 영양분, 햇빛 등 다양한 요소와 에너지가 주어져야 한다. 씨앗에 담겨있는 DNA는 일종의 능동적 정보일 뿐이다. 하나의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는 것 역시 외적인 인과관계보다는 능동적 정보의 내향적 펼쳐짐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바이러스가 몸속에서 증식하는 것이나, 씨앗이 자라나서 나무가 되는 것이나, 수정란이 성체로 성장하는 것 모두 인과관계라기보다는 생성질서다.


앞에서 살펴본 프리스턴의 능동적 추론의 과정 역시 본질적으로 생성질서다. 헬름홀츠나 프리스턴의 감각 경험에 대한 예측 모델에 따르면, 마코프 블랭킷으로서 인간의 감각시스템은 외부자극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적 시스템이 아니라 내부의 생성모델을 바탕으로 추론하는 능동적 시스템이다. 감각자료는 인간의 뇌가 생산해내는 지각편린의 외부적 ‘원인’이 아니다. 뇌가 세상 사물을 지각하는 것은 인과론적 과정이 아니다. 뇌는 예측오류를 바탕으로 생성모델 자체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한다. 즉 시각, 청각, 촉각 등의 감각 경험은 외부 감각자료와 내부의 생성모델이 지속해서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생성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인과관계 모델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프리스턴은 ‘역동적 인과관계 모델(dynamic causal modelling, DCM)’을 제안하기도 한다.[lii]역동적 인과관계 모델은 fMRI 분석을 하는 데 있어서 외부자극이 뇌에 미치는 단선적인 인과적 영향뿐 아니라 뇌의 내적인 생성모델(마코프 블랭킷 내부상태 간의 상관관계 등)의 베이지안 추론 과정까지를 고려하는 모델이다. 시간에 따른 연속적이고 선형적인 질서 모델이 아니라는 점에서 봄의 생성질서와 프리스턴의 역동적 인과관계 모델은 상당한 공통점을 지닌다.


생성질서로서의 의식


환경을 지각하고 인식하는 과정뿐 아니라 내부상태의 핵심인 생성모델 역시 생성질서의 일종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특정한 외부 사건이 원인이 되어 생각이라는 결과가 생겨나는 것처럼 느낀다. 게다가 특정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일어날 때는 더욱더 그 생각에 특정한 외부 ‘원인’이 있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생각은 특정한 외부 사건을 원인으로 생겨나는 결과가 아니다. 생각은 의식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외부 사건은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능동적 정보로서 우리 의식에 특정 계기와 방향을 제시할 뿐이다. 생각을 만들어내고 지속해가는 것은 의식이라는 내부상태다. 바이러스를 계속 증폭시키는 것이 우리 몸이듯이 생각이 생각을 낳도록 하는 것 역시 우리의 의식이다. 그렇기에 생각은 강박적으로 반복되기도 하고 강화되거나 확장되기도 한다. 의식에는 여러 생각이 동시에 공존할 수도 있다. 생각뿐 아니라 기억이나 감정 등은 모두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연속적 질서(the order of sequences)’와 ‘공존적 질서(the order of coexistence)’의 성격을 모두 가지면서 그 본질은 생성질서다. 사실 모든 생성질서는 연속성과 공존성을 모두 다 구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다. 


봄은 분노와 같은 특정한 감정 상태 역시 생성질서로 본다.[liii] 기분 나쁜 일이나 모욕적인 언사에 의해 분노가 생기는 것은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외부 원인에 의한 감정의 유발은 결코 인과관계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분노의 계기가 되는 사건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외부에서 주어지지만 그러한 자극으로부터 분노라는 감정을 만들어내고 키워가는 것은 내부상태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기분 상했던 일을 반복해서 되뇌이고, 스스로의 분노를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비난하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증폭시킴으로써 분노라는 감정은 계속 유지되거나 점차 강화되기 마련이다. 


분노뿐 아니라 불안이나 우울 등 다른 부정적 정서를 유지하고 증폭시키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 본질적으로 생성질서다. 특정한 부정적 사건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우리 마음에 작용한다. 생성질서로서 특정한 부정적 생각은 우리 마음에서 증폭된다. 그러한 부정적 생각에 에너지와 영양분을 공급해서 계속 키워나가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한편 면역시스템이 바이러스 감염 상태를 이겨내듯이 마음의 면역력, 즉 마음근력이 강한 사람은 부정적 사건이 마음을 숙주로 삼아 확산되는 것을 스스로 막을 수 있다. 마음근력은 곧 ‘감정적 면역력’이기도 하다. 감정적 면역력이 약한 사람에게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부정적 사건이나 트라우마도 커다란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 


몸의 면역력을 키우는 것은 외부 바이러스에 반응하는 몸의 새로운 생성질서를 만드는 것이고, 마음근력을 키우는 것은 외부의 부정적 사건에 반응하는 마음의 새로운 생성질서를 건강한 방향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특히 부정적 사건이나 실패, 역경 혹은 좌절 등에 잘 대처하고 일종의 ‘마음의 항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회복탄력성을 강화하는 훈련이라 할 수 있다. 회복탄력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마음근력을 발달시키는 것은 새로운 생성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외부자극이 의식 속에서 내향적 펼쳐짐을 하는 패턴을 바꿔나가는 것이다. 물론 생성질서의 자동화된 반응 방식을 바꿔나가는 것은 체계적이고도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에 겪은 부정적 사건 자체가 트라우마 스트레스를 유발한다고 보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 그보다는 지금 현재 계속해서 부정적 정서를 재생하고 있는 생성질서가 더 큰 문제인 것이다. 과거의 나쁜 경험 자체가 현재 몸과 마음이 아픈 ‘원인’이 아니다. 과거의 사건은 단지 하나의 계기만을 제공할 뿐이다.[liv]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단순한 인과관계적 틀에서 벗어나 생성질서의 관점에서 부정적 정서나 트라우마를 바라봐야만 제대로 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다. 만약에 과거의 경험이 확정적 원인이라면 과거를 바꿀 방법은 없으니 원인 치료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고 다만 대증요법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의 전통처럼 과거의 특정한 경험에 대해 집중하기보다는 지금 현재 몸과 마음이 어떻게 스스로 병을 키우고 유지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lv] 병을 유지하고 확대시키는 것은 지금 현재 작동하고 있는 생성질서다. 따라서 과거의 부정적 사건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그러한 일이 미래에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예방적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다. 과거의 ‘원인’에 집착하기보다는 현재의 생성질서를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올바른 방법이다. 


[BOX]--------------------------------------------------------------------------------------------------------------

내재적 질서의 언어 : 레오모드

우리가 ‘실체’ 중심적인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언어다. 대부분의 현대 언어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따라 ‘명사’ 중심적으로 발전해왔다. 대부분의 서술에는 주어와 목적어가 있다. 많은 경우 이 서술의 순서는 인과관계의 순서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봄은 새로운 방식의 언어 사용을 제안한다. 그것이 바로 ‘레오모드(rheomode)’다. 레오(rheo-)는 그리스어로 ‘흐름(flow)’이라는 뜻이다. 명사보다는 동사에 더 기본적인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과정’ 중심의 사유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 언어의 레오모드다. 사실 한국어는 유럽어들과 비교해 주어의 사용이 강조되지도 않고, 시제나 성, 수의 구별이 뚜렷하지도 않기에 상대적으로 더 과정 중심적인의 레오모드 언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봄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예로 든다. ‘It is raining’. 여기서 주어는 물론 ‘it’이다. 그는 묻는다. 도대체 ‘비 내리기’라는 행위를 하는 주어로서의 ‘비 내리는 자(rainer)’를 반드시 상정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주어가 곧 ‘비 내리기’라는 사건을 유발한 원인이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더 정확하게 서술하려면 문장은 이렇게 돼야 한다. ‘rain is going on.’ 봄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어가 영어나 다른 유럽 언어들보다는 사태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다. 한국말로는 정확히 봄이 제안하는 것처럼 ‘비가 오고 있다’라고 하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입자들이 상호작용한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전체로서의 우주라는 장(field)에서 상대적으로 일정한 움직임의 형태를 보이는 것들을 추상화한 것이 입자”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또한 “관찰자가 하나의 대상을 관찰한다”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인간과 대상이라고 불리는 두 개의 추상화된 존재들 사이에 분리되지 않는 움직임으로서의 관찰이 진행된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lvi] 내면소통의 언어가 본질적 측면에서 레오모드 언어임을 설명하는 일은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므로 추후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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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i] Bohm, 2002

[ii] Bohm, 2002

[iii] Bohm, 2005, p.8

[iv] Bohm, 2005, p.6

[v] Bohm, 2005, p.6

[vi] Bohm, 2005, p.7

[vii] Bohm, 2005, p.8

[viii] Bohm, 2002

[ix] Bohm, 2005, p.12

[x] Bohm, 2005, p.15

[xi] Fonda & Sreenivasan, 2017

[xii] Carroll, 2019

[xiii] Carroll, 2019.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두 입자를 일종의 ‘행위자(agent)’로 보고 그 행위자들의 사이에 상호작용이 곧 실체라는 ‘행위자 사실주의(agential realism)’를 주장하는 입장도 있다. 바라드에 따르면 우주는 서로 내적인 상호작용 혹은 ‘내면작용(intra-activity)’을 하는 ‘행위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내면작용이 곧 공간-시간-물질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작용의 관계를 맺고 있는 구성요소들이 곧 얽힘(entanglement)상태에 있게 된다. 바라드는 이러한 얽힘이 양자역학의 자연적인 영역에서뿐만아니라 사회적인 영역에서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양자얽힘의 개념을 그대로 사회적 행위자들간의 역동성에도 확장 적용하고자 하는 시도다(Barad, 2007). 창의적이고, 문학적이며 정치적인 주장이긴하나, 혹은 그럴듯한 시적(poetic) 주장일수는 있겠으나, 과학적인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양자역학의 입장에서는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현상 자체를 물리적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주를, 나아가 학문 전반을,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양분해서 보는 입장은 전형적인 인문사회학자들의 몫일 뿐이기 때문이다. 


[xiv] Bohm, 2002

[xv] Bohm, 2005, p. 22

[xvi] Bohm, 2005

[xvii] Reid, 2017

[xviii] Sheldrake & Sheldrake, 2017; Reid, 2017

[xix] Bohm, 2002, p. 18

[xx] Bohm, 2002

[xxi] Bohm, 2005, p.19

[xxii] Bohm, 2005, p. 21

[xxiii] Bohm, 2005, p. 72

[xxiv] Bohm, 2005, p. 73

[xxv] Ramstead, Badcock & Friston, 2018


[xxvi] Bohm, 2005, p. 76 봄의 소마-시그니피컨스와 기호-소마의 관계의 개념은 생명기호학(biosemiotics)의 기본적인 관점과도 유사하다(Hoffmeyer, 2008a). 예컨대 호프마이어의 개념인 ‘기호학적 발판(semiotic scaffolding)’은 기호를 생명체가 해석하여 그 의미에 맞는 반응이나 행동을 하는 전반적인 생명과정을 일컫는다(Hoffmeyer, 2008b). 기호생산과정 자체가 생명 현상의 필수적 요소임을 개념화한 것이다. 특정한 자극을 받아들이는 생명체가 자신의 맥락과 환경과 상황에 따라 ‘해석’하는 기호학적 조절을 한다는 의미다. 비록 ‘세미오틱’이란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과정을 ‘무의식적 추론’으로 이론화한 것이 바로 헬름홀츠이고, 이를 발전시킨 것이 프리스턴의 능동적 추론 이론과 마코프 블랭킷 모델이다. 넓게 보면 봄도 프리스턴도 모두 다 일종의 생명기호학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봄의 개념 뿐만아니라 호프하이머의 기호학적 발판의 개념, 싸이매틱스, 양자역학의 의식에 관한 논의 등을 종합하여 의미와 마인드의 문제를 물리학적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조셉슨의 일련의 논의도 주목해볼만 하다(Josephson, 2019a; Josephson, 2019b; Josephson, 2018).


[xxvii] CP. 5.448

[xxviii] Bohm, 2005, p123

[xxix] Bohm, 2005, p124

[xxx] Bohm, 2005, p124

[xxxi] Kim, 2000; Eco & Sebeok, 2015/1983 – 역자 해제

[xxxii] CP 5.484

[xxxiii] Kahneman, 2011

[xxxiv] Maslow, 2013

[xxxv] Bohm, 1952. 비유적으로 말해서 우주 전체를 한 덩어리로 연결시키고 있는 보이는 않는 차원의 투명한 액체(에너지 필드 혹은 배경에너지)를 봄은 ‘숨겨진 변인’으로 부르고 이론화했다. 1952년 브라질로 정치적 망명을 가 있던 젊은 시절에 봄은 ‘숨겨진 변인’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기존의 양자물리학 이론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자신의 논문이 물리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이 논문에 대해서는 출간 이후 아무도 비판하거나 논박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 논문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기존의 권위 있는 물리학자들은 이 논문이 출간되자 내심 당황했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던 코펜하겐 해석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해석이었으나 수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논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특히 봄의 지도교수였던 오펜하이머는 동료 물리학자들에게 “우리는 이 논문을 논박하든지 아니면 (논박이 어렵다면) 그냥 무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랬는지 어쨌든 아무도 이 논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고 결국 봄의 새로운 이론은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수십 년 뒤에야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Peat, 1997).


[xxxvi] Bohm & Hiley, 1984

[xxxvii] Bohm & Kelly, 1990

[xxxviii] 여기서 ‘active information’은 ‘능동적 정보’라 번역했고, ‘activity of information’은 ‘정보의 행위’라 번역했다. 같은 영어 단어가 한번은 ‘능동적’으로 한번은 ‘행위’로 번역된 것이다. 이는 영어와 한국어 단어가 일대일 대응을 하지 않기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영어 ‘active’에는 능동적이란 뜻도 있고 행위적이란 뜻도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를 한 단어로 표현해내는 한국어는 없다. 따라서 번역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정보가 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해낸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할 때에는 ‘능동적 정보’라고 번역했고, 또 정보가 무언가 행위나 작용을 하는 것이라는 측면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때는 ‘정보의 행위’라고 번역했다. 비슷한 고민은 앞에서 프리스턴의 ‘active inference’를 ‘능동적 추론’이라고 번역할 때에도 반복되었다. 사실 이 개념은 행위적 추론이라 번역해도 된다. 추론 과정에서의 ‘행위’적 측면이 강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자유에너지 원칙과 예측 모형의 이론적 맥락을 고려할 때, 추론은 뇌가 주어진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해석해내는 과정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능동적 추론’이라는 번역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처럼 번역에서의 어려운 선택에 직면할 때마다 독자들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괄호에 원래 영어 단어를 표기해 두었다.


[xxxix] Bohm, 2005

[xl] Pylkkänen, 2016

[xli] Shannon, 1948

[xlii] Hiley, 2002

[xliii] Bohm & Hiley, 1995

[xliv] Bohm, 1990

[xlv] Bohm, 2005. 능동적 정보의 개념을 조금 더 확장하면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를 정보처리에 관한 수학적 모델을 통해서 이론화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대 크레니코프에 따르면 멘털 공간의 p진수 표현을 통해서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이 가능하다(Khrennikov, 2000). 인간의 잠재의식 레벨에서의 정보처리 과정은 고전물리학을 통해 모델링할 수 있으며 의식의 정보처리 과정은 봄의 능동적 정보의 개념(숨겨진 변인 모델과 파일럿 웨이브 모델)을 통해 모델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다른 별도의 작동방식을 갖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봄의 내재적 질서와 전체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인위적인 구별을 하려는 것 자체가 기계론적 세계관의 잔재라 할 수 있다.  


[xlvi] Hiley & Pylkkanen, 2005

[xlvii] Bohm, 2005, p.12; 폴라니의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도 내재적 질서의 좋은 예다(Polanyi, 2009). 자전거 타기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넘어지려는 방향으로 핸들을 틀어야 한다. 넘어지려는 정도나 틀어야하는 각도 사이에는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관관계 자체를 학습해서 그것을 적용하려 하면 자전거 타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중요한 것은 자전거와 몸의 전체적인 움직임의 조화다. 거기에는 자전거의 무게나 속도 뿐만아니라 타는 사람의 근육, 관절, 고유감각, 균형감각, 운동신경, 시각, 두뇌작용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전체성을 이루게 되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움직임이다. 이러한 모든 움직임을 하나 하나 명시적(explicit)으로 기술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전거를 탈 수 있으려면 폴라니가 말하는 "암묵적 지식"이 필요하다. 이것은 일종의 내재적 질서다. 이것이 자전가 타기라는 전체적인 움직임 속으로 펼쳐져 들어갔을 때 비로소 자전거를 탄 사람의 움직임에 따른 자전거의 움직임이라는 외향적 펼쳐짐이 드러나게 되고, 그래야 비로소 자전거를 탄 사람의 움직임과 자전거의 굴러감이라는 관계에 대한 외재적 질서에 대한 외적인 묘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확인되지만, 외재적 질서는 항상 훨씬 더 근본적이고 폭넓은 내재적 질서의 일정한 측면에 대한 제한적인 추상화에 불과한 것이다. 


[xlviii] Bohm, 2005, p.16

[xlix] 이러한 관점의 전환과 관련해서 주목해볼 만한 개념이 ‘정합역학(coordination dynamics)’이다(Kelso, 2013). 부분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전체를 위한 의미있는 정보가 생성된다는 것인데 생명 현상 뿐만아니라 생명체의 움직임이나 인간의 사회적 행위까지를 아우를 수 있는 유용한 관점이다(Tognoli et al., 2020). 미시적인 세계에서 거시적인 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발견되는 자발적인 자기조직화 과정을 이론화하는데도 유용하다(Kelso, 1994). 뇌의 능동적 추론과정이나 자의식의 탄생, 인간의 행동 상태 등은 모두 정합역학을 공유함으로써 생겨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Kelso, 2014).


[l] Evangelidis, 2018

[li] 바이러스는 살아있는 생명체라기보다는 RNA 유전자 정보를 담고 있는 단백질 부스러기에 가깝다. 코로나바이러스 하나의 무게는 0.85아토그램이다. 1아토그램은 10의 마이너스 18승분의 1그램이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증상도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는 환자가 되려면 몸 속에서 바이러스가 700억 개 이상으로 증식돼야 한다. 그래 봐야 한 사람을 환자로 만드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전체량은 0.0000005그램에 불과하다(Ganapathy, 2020). 우리나라 코로나바이러스 환자가 천만 명이라고 가정해보자. 가벼운 증상을 보인 경우가 훨씬 더 많겠지만, 모두 어느 정도라도 증상을 보이는 환자라고 가정한다 해도, 즉 천만 명의 환자가 모두 700억 개의 바이러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전국을 팬데믹의 공포로 몰아넣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총량은 겨우 5그램에 불과할 것이다. 


[lii] Friston, Harrison & Penny, 2003.

[liii] Bohm, 1987.

[liv] Bohm&Kelly, 1990.

[lv] Maté, 2011.

[lvi] Bohm, 2002.


참고 사항: 이 글은 곧 출간될 책 원고의 일부이며, 인용이나 복제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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