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놀라운 치유 효과
여섯 가지 긍정적 내면소통 명상
자기참조과정으로서의 내면소통 명상은 전전두피질 신경망을 활성화하는 효과적인 마음근력 훈련이며, 어떠한 종교적 의미나 신비주의적 환상과도 관련이 없는 과학적인 훈련방법이다. 한편 자기참조과정 훈련 이상으로 전전두피질 활성화에 직접 도움이 되는 것이 나와 타인에 대한 긍정적 내면소통이다. 나 자신에 관한 정보처리와 다른 사람에 관한 정보처리는 거의 비슷한 신경망을 통해 이루어지며, 둘 다 mPFC를 중심으로 한 전전두피질과 관련이 깊다.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긍정적 내면소통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나 특히 효과가 입증된 대표적인 것에는 용서 ․ 연민 ․ 사랑 ․ 수용 ․ 감사 ․ 존중 등이 있다. 이것은 모두 전통적인 명상 수행의 핵심 주제이며, 동시에 수천 년간 전해 내려온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최신 뇌과학의 연구 주제들이기도 하다.
많은 뇌과학 연구들이 용서, 연민, 사랑, 수용, 감사, 존중 등을 하게 되면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고, 행복감이 향상되며, 인지기능이 좋아지고, 면역력이 강화된다는 긍정적 효과를 보고하고 있다. 유교의 가르침인 ‘측은지심(惻隱之心)’, 불교의 가르침인 ‘모든 중생을 구제하라’, 기독교의 가르침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모두 ‘타인긍정’이 핵심이며, 따라서 전전두피질 신경망 활성화와 관련이 깊다. 또한 불교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心無罣礙 無有空怖)”라는 가르침이나 기독교의 “너희는 두려워 말라”라는 가르침은 모두 편도체를 안정화하는 효과와 관련이 깊다.
종교의 관점이 아니라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통적인 종교들이 세계적으로 널리 확산되고 수천 년의 전통을 이어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그 기본 가르침들이 편도체를 안정화하고 전전두피질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종교의 핵심 가르침을 따르니 긍정적 정서가 향상되어 행복해지고, 성취 역량이 향상되어 일이 잘 풀리고, 인간관계 능력이 더 좋아져서 일이 잘 되고, 면역력이 향상되어 아픈 것도 낫게 되어 감사한 마음으로 더욱더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선순환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현대 뇌과학은 기성 종교의 가르침들이 뇌 건강과 마음근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여러 과학적 근거를 통해 꾸준히 입증하고 있다.
자기긍정과 타인긍정의 여섯 가지 방법은 두 가치 축으로 이뤄진다. 하나는 용서-연민-사랑의 축이고 또 하나는 수용-감사-존중의 축이다. 용서-연민-사랑은 모두 신이 인간에 내리는 축복이다. 신은 인간을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으로 지켜주신다. 즉 용서-연민-사랑은 기본적으로 절대자가 인간에게 주는 것이다. 그리고 용서를 하면 연민을 느끼게 되고 연민이 발전하여 사랑이 된다. 또는 사랑의 마음이 흘러넘치면 연민이 되고 연민의 마음으로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축인 수용-감사-존중은 모두 인간이 신에 대해서 하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 내면을 돌이켜보고 절대자를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수용이며, 절대자에 대해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기도의 핵심이고,[i] 한없는 경외심으로 절대자를 지극히 존중하는 것이 신앙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섯 가지 자타 긍정을 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곧 알아차림이다. 자신을 돌이켜보는 자기참조과정 능력이 충분한 사람만이 진정한 자기긍정-타인긍정을 할 수 있다.
용서란 무엇인가
긍정적 내면소통의 첫걸음은 용서다. '용서하기(forgiving)'는 무엇인가를 '앞으로 주는 것 (giving forward)'이다. 뒤돌아보아 과거에 집착하거나 얽매이기보다는 앞을 내다보고 미래를 향해 나가면서 다 내어주는 것이 용서다. 뒤돌아보아 앙갚음하고 빼앗는 것이 복수라면 앞을 보고 내어주는 것이 용서다. 내가 나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앞으로 내어주어 늘 지금 여기에 현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ii]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서란 만성적인 적대감이나 부정적이고 강박적인 반추,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인지적이고도 감정적인 과정이다.[iii]
용서의 핵심은 그저 “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일에 대해 다시 의미부여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항상 지금 여기에 나 자신을 다 던져 넣는 것이 용서다. 증오나 복수심은 반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 일에 매달리고 나 자신을 던져 넣는다. 삶의 지평을 멀리 내다보고 나를 얽매는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용서다.
분노를 지닌 채 살아가는 삶은 괴롭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지닌 증오심과 복수심 때문에 괴로워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내가 나를 아프게 하고 병 들고 늙게 한다. 면역력을 엄청나게 떨어뜨리고 텔로미어 길이는 짧아진다(박스 참조). 분노를 지니고 사는 것은 불(火)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분노는 내 속을 태운다. 괴롭다. 그것이 화병이다. 화병은 용서하지 못하고, 타인의 잘못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병이다. 분노를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잘못은 상대방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지속적으로 벌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용서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 결단을 내려서 나의 행동을 통제하는 결단적(decisional) 용서이고, 다른 하나는 상황에 대한 인지, 동기, 감정 상태 등을 바꿔나가는 감정적(emotional) 용서이다.[iv] 효과라는 측면에서는 감정적 용서가 더 좋지만 실제로 용서를 해나가는 과정에서는 결단적 용서로 시작하는 것이 더 쉽다.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거나 양해를 얻거나 정서적 지지를 추구하면서 조건이나 단서를 달아서 하는 용서보다는 스스로 결단을 내려서 과거에 얽매인 나의 집착을 단번에 끊어내는 것이 보다 쉽게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용서는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달라질 필요는 없다.
용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unforgiveness = 복수하려는 마음, 불평을 늘어놓는 마음, 불만스러운 마음, 비판하는 마음)’을 줄이는 것과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다.
용서의 대상에는 자기용서와 타인용서가 있다. 자기용서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스스로 비난하고 자기혐오와 죄책감에 빠지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며, 타인용서란 다른 사람이 내게 끼친 해악에 대해 용서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v] 한편, ‘용서성향(forgivingness)’과 ‘용서상태(forgiveness)’를 구분하기도 한다.[vi] 용서성향은 너그럽고 아량이 넓은 성격적인 성향에 가까운 것이고, 용서상태는 현재 용서를 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도 용서에 대한 많은 이론화 작업이 있었다. 상대방이 내게 지금 위해를 가한다면 이에 대해 적절한 응징을 해두는 것이 미래의 안정적인 사회생활을 위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응징에는 많은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비용이 든다. 반면 용서를 함으로써 훨씬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인간의 뇌는 상황에 따라 때로는 복수를, 때로는 용서를 적절히 균형을 맞춰서 할 수 있도록 발전했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의 입장이다.[vii] 이러한 관점은 용서를 인간관계의 갈등에 대처하는 하나의 도구적 수단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한편 사회심리학이나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도 용서에 관한 연구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는데, 대부분 용서를 전략적 관점에서 다룬다.[viii] 용서를 전략 커뮤니케이션의 하나로 규정하고 나서 언제 어떠한 용서 전략을 구사하는지 혹은 잘못한 사람은 어떠한 용서 전략이나 사과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지 등을 연구하는 것이다.[ix] 그러나 진화심리학이나 커뮤니케이션학의 용서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용서의 진정한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저 용서를 인간관계를 통해 최대한의 만족을 얻어내려는 전략적인 수단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일면 타당한 면도 없지 않으나 진정한 용서의 의미나 방법 혹은 그 효과에 대한 이론화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매우 제한된 관점이다. 아직도 많은 학자가 이렇게 전략적이고 도구적인 관점에서 용서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제한된 도구적 관점으로는 용서가 어떻게 수많은 뇌과학 연구들이 밝혀내는 것과 같은 치유의 효과를 보이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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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로미어와 용서의 과학
세포핵 안에 있는 염색체 끝에는 마치 운동화 끈 끝과도 같은 단단한 말단 조직이 있다. 이것이 텔로미어인데, 세포분열을 반복할수록 텔로미어 길이는 점차 짧아지며 결국 세포는 더 이상 분열을 할 수 없게 되어 수명을 다하게 된다. 텔로미어의 길이는 세포의 노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가를 말해주는 지표다. 그런데 세포분열 시 텔로미어 길이를 유지해주는 효소인 텔로머레이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 세포는 텔로미어 길이를 유지하면서도 분열을 할 수 있게 된다.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감정은 이러한 텔로머레이스의 활동을 감소시켜 세포 노화를 촉진한다. 실제로 오랜 기간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의 텔로미어 길이를 조사해보니 상당히 짧아져 있었다. 텔로머레이스 효소의 작용에 관한 연구로 노벨의학상을 받은 블랙번(Elizabeth Blackburn) 교수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꾸준히 명상 훈련을 하면 텔로미어 길이가 짧아지지 않거나 오히려 더 길어진다는 것이 발견되었다.[x] 뿐만아니라 3개월간 집중적으로 명상 훈련을 시켰더니 면역 세포의 텔로머레이스 활동이 활발해져 면역력이 높아지고 여러 가지 건강 지표들이 개선되는 결과도 나타났다.[xi]
타인긍정의 한 방법인 자애 명상을 했더니 텔로미어 길이가 길어졌다는 연구결과도 있다.[xii] 반면에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텔로미어 길이도 짧아져 있었고 세포 노화도 훨씬 더 많이 진행되어 있음이 발견되었다.[xiii] 분노와 증오심을 지니고 살면 더 많이 아프고 더 빨리 죽는다. 타인에 대해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면 훨씬 더 건강하고 오래 산다. 이것이 용서의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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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용서를 못 하게 되었을까
용서를 주제로 하는 강의를 할 때 “분노의 복수심이나 응징의 마음이 에너지를 줄 때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게다가 상대방이 잘못했으니 정의와 공정의 이름으로 분노하고 응징하는 것은 오히려 책임감 있는 행동이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한다. 나는 이러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고방식임을 깨우쳐 주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용서를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감과 사명감 때문이다. 분노를 숭상하는 문화는 우리 모두를 병들게 하고 있기에 반드시 바꿔야만 한다.
상대방이 내게 잘못하면 우선 용서의 마음부터 들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것이 건강한 마음 상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상대방의 자그마한 잘못에도 분노부터 하면서 응징이나 복수를 떠올린다. 거의 자동반사와도 같다. 사회 전반에서 이러한 성향은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불안장애와 우울증 환자는 갈수록 넘쳐난다. 이러한 감정조절장애 환자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은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따라서 남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그마한 잘못에 대해서도 격렬하게 반응한다. 타인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에 대해서조차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처벌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용서의 능력을 회복해야 마음근력이 강해지고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용서를 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왜 용서의 능력을 잃어버렸는가? 왜 용서를 폄훼하는 문화를 지니게 되었는가? 왜 용서에 대해 가르치려고도 배우려고도 하지 않게 되었는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마음근력이 약해지게 되었는가?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며 이야기를 통해 살아간다. 스토리텔러인 의식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이야기는 단지 ‘들려지는 이야기(story-told)’일 뿐만 아니라 ‘살아지는 이야기(story-lived)’이기도 하다.[xiv]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온 이야기 구조는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과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의 기본 방향을 결정한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 들어온 이야기는 강한 악당과 그에 맞서 싸우는 (지구를 구하고 정의를 지키는) 용감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약간의 변형은 늘 있어도 주인공은 대체로 약하고 악당은 늘 강하다. 주인공이 해야 할 일은 강한 적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악당을 용서하거나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것은 나약한 모습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불굴의 의지로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정의의 이름으로 악당에게 통쾌하게 복수한다. 나약했던 주인공을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대개 복수심이나 증오심이다. 분노의 힘으로 주인공은 악당을 쳐부순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악당을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만화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 이러한 내러티브를 소비하면서 '나'를 주인공에 감정이입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인공의 관점에서 세상을 살아간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드라마나 영화나 뉴스 스토리나 정치 이야기가 모두 선악의 대립이라는 기본 플롯에 따라 구성된다. 어떤 이야기에 접하든 누가 ‘나쁜놈’이고 ‘악당’인가부터 파악하려한다. 물론 그러한 이야기속에서 나는 늘 주인공이기에 항상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다.
온라인 공간에서 난무하는 악플을 보자.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은 옳고 도덕적이며 선하고 현명한데, 악플의 상대방은 악이고 부도덕하며 나쁘고 멍청하다. 이러한 근거없는 자기확신이 과연 어디서 왔을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보라. 누구나 다 “내가 주인공”이라는 환상 속에 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세계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다가 혹시라도 어떤 어려움에 맞닥뜨리면 그 어려움의 원인을 제공하는 존재는 당연히 악당으로 간주하게 된다.
사실은 내가 상대방에게 악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할 여유조차 없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모두 적이다. 나의 적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의 적이다. 만약 그 사람이 나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권력이 세거나 돈이 많다거나 하면 악당임이 더욱더 확실하다. 악당은 모두 강하기에 강자라면 모두 부도덕한 악당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악에 맞서는 것은 정의로운 주인공인 내가 할 일이다. 주인공인 나는 적을 처단해야 한다. 단호하게 응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증오하고 분노해야 한다. 이것이 현대사회에 팽배해있는 분노의 이데올로기다.
선한 주인공 대 악한 악당의 대립 구조로 이 세상을 바라보도록 세뇌당한 현대인들에게 ‘용서’라는 개념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용서는 매우 낯설고 어색한 개념인 반면에, 복수, 응징, 처단 등은 매우 익숙할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악당을 쳐부수는 만화주인공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남성이고, 주로 복수를 하는 것도 남성이다. 여성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남성의 복수 성향이 더 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싱어(Tania Singer) 교수 팀은 경제 게임을 하는 남녀 피험자들을 상대로 ‘공감’에 관한 연구를 했다. 공정한 플레이를 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남성과 여성 피험자 모두 비슷하게 공감을 했다. 그러나 부당한 행위를 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특히 남성 피험자들이 공감하지 못했다. 대신 복수심과 관련된 뇌 부위가 활성화되었으며, 부당한 행위를 한 상대방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볼 때는 보상체계 관련 부위가 활성화되어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xv] 이는 남성이 여성과 비교해 응징을 더 좋아하고 용서에 인색한 뇌를 갖고 있으며 복수를 통해 더 큰 쾌감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용서에 있어서 남녀 차이가 있는가에 대한 53편의 연구논문에 대한 메타분석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과 비교해 공감을 더 잘 하고 용서도 더 잘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xvi]
한편 만화책과 영화와 드라마는 강한 분노와 적개심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착각도 심어준다. 악당에게 분노를 느끼고 복수심에 불탈수록 주인공은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분노가 인간을 형편없이 나약하게 만든다는 것은 과학적인 사실이다. 분노는 두려움의 한 표현양식이다.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을 때 좌절감과 함께 분노와 공격적 행동이 나타난다.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인 행동은 모두 다 두려움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두려움에 떠는 작은 강아지가 더 크게 짖고 공격적인 법이다. 두려움이 없는 큰 개는 짖지 않는다. 조용하고 차분하다. 용서는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행동이다.[xvii] 분노를 바탕으로 한 복수심은 정신과 신체 건강에 매우 해롭다. 증오심은 오래 지니고 있을수록 몸과 마음을 황폐하고 나약하게 만든다.
용서가 가져오는 변화
우리는 용서를 할 때 비로소 온전한 수용도 할 수 있다. 지금 이대로,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의 마음에서 연민의 마음이 생긴다. 아픔과 부족함에 대해 공감을 하면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과 자애의 마음이 솟아오른다. 상대방의 강점과 훌륭한 점이 보이고 이는 존중심으로 연결된다. 이 모든 것을 다 경험하면 자기긍정과 타인긍정의 마음이 동시에 충만해짐으로써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처럼 용서는 전전두피질 활성화를 위한 모든 긍정적 내면소통의 출발점인 셈이다.
용서는 감정을 통제하는 전전두피질 신경망(dlPFC-vlPFC-dACC)의 활성화와 관련이 깊다. 또 타인의 의도를 고찰하고 타인의 잘못을 판단하는 신경망(mPFC-TPJ)도 용서와 관련이 깊다. 반면에 복수를 하고 싶은 감정은 보상체계를 관할하는 변연계와 더 많이 관련되어 있다.[xviii]
이탈리아 피사대학교 연구팀은 누군가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상황을 상상하게 한 후에,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했고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라고 했다. 주어진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갑자기 사장이 업무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당신을 해고했다.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때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의 시나리오를 두 그룹에 각각 제시했다. 첫 번째 그룹에게 제시된 시나리오는 ‘사실 내가 그렇게 최선을 다해 일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상기하고 그냥 사장을 용서하기’ 였고, 두 번째 그룹의 시나리오에게 제시된 시나리오는 ‘사장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음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복수일까를 생각해보기’였다. 이러한 두 가지 상황에 놓인 두 그룹의 뇌 영상을 비교해보니, 용서를 하는 조건에서는 마음이론이나 공감, 인지를 통한 감정조절 등 마음근력과 관련된 뇌부위(dlPFC, ACC 등)가 더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xix]
또 다른 fMRI 연구에서도 잘못에 대해 진지한 사과를 받아 용서하려는 마음이 생겨날 때 마음이론과 관련된 부위(mPFC, precuneus 등)이 더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xx] 이처럼 뇌과학 관점에서 보아도 용서는 전전두피질 활성화를 위한 매우 효과적인 내면소통 훈련이라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용서는 인간관계 갈등에서 오는 스트레스의 악영향을 완화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정신적, 신체적 건강에 큰 도움을 준다. 누군가에게 적개심을 품거나 증오하는 감정을 계속 품는 것은 건강에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친다. 심혈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xxi] 수면도 방해한다.[xxii] 코르티솔 등의 스트레스 호르몬도 증가시키며,[xxiii] 이러한 분노가 오래 계속될 경우 우울증 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반면에 용서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은 건강에 전반적으로 큰 도움을 준다. 심혈관계의 건강을 증진하고, 심혈관 환자의 생존율을 높이기도 한다.[xxiv] 특히 용서를 잘하는 기질을 지닌 사람들은 약물이나 알코올의존도가 훨씬 낮고, 용서하는 심리상태를 유지하면 심장박동을 포함한 여러 신체 증상이 모두 좋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xxv] 이처럼 용서는 건강 상태와 직결된다. 실제로 용서하는 성향이 높을수록 더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다.[xxvi] 특히 회복탄력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증진시킨다.[xxvii] 미국 최고의 병원으로 일컬어지는 미국 메이요클리닉에서는 ‘용서하기’가 건강한 인간관계, 정신건강 증진, 불안증 감소, 혈압 강하, 우울증 완화, 면역력 증강, 심혈관 기능 증진, 자아존중감 증진 등 신체와 정신건강 전반을 위해 폭넓은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점을 환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주고 있다.[xxviii] 용서는 그야말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한 만병통치약이라 부를만하다.
어떻게 해야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는 화해의 시도가 아님을 우선 깨달아야 한다.[xxix] 다시 같이 잘 지내보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과거의 일을 떠나보내고 흘려보내는 것이다. 분노와 증오라는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부정적 감정의 원인이 되는 특정한 사건이나 사람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는 상대방과 함께 둘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동의나 호응이나 인정이 필요하지도 않다. 오히려 상대방은 필요하지 않다. 용서는 나 혼자 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지워버리고 흘려보내는 것이다. 상대방을 폭력적으로 파괴하려는 마음이 복수심이라면, 따뜻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지워버리는 것이 용서다. 나에게 해악을 끼친 상대방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흘려보낸다는 이야기 구조는 현대사회에서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어색하고 낯설게 드릴 수밖에 없다.
용서 수행의 전통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 중 하나가 아힘사(ahimsā)이다. 2000여년 전에 파탄잘리는 《요가 수트라》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다양한 요가 수행방식을 8단계로 정리했다. 그 첫 단계가 야마(Yama)인데 일종의 금기들이다. 해서는 안 될 것을 안 하는 것이 요가의 시작이다. 다섯 가지 야마 중 첫 번째가 바로 아힘사다. 말하자면 아힘사는 모든 수행의 ‘시작의 시작’이자 출발점인 셈이다.
아힘사는 ‘비폭력’ 혹은 ‘불살생’이라 번역되는데, 누구에게든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일말의 적의나 악의를 지니지 않는 상태다. 신체적인 폭력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해를 끼치지 않는 마음 상태다. 어떤 상황에서도 복수나 앙갚음을 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아힘사다. 아힘사는 용서의 핵심이다.
용서의 본질은 내가 나에게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이며 일종의 내면소통이다. 용서의 기본적인 방법은 나에게 해악을 끼친 상대방을 마음속으로 떠올린 다음에 속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 당신이 끼친 해악은 이제 나를 더 이상 구속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에 의해 더 이상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나는 어떠한 증오심도 복수심도 가지지 않는다. 나는 과거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다. 나에게는 늘 펼쳐지는 지금 여기가 더 중요하다. 나는 당신에게 어떠한 해악도 끼치지 않겠다.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
어떠한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가가 용서하는 마음이 좀 더 쉽게 생길 수 있는지의 여부에 영향을 미친다. 상대방의 잘못이 어떤 원칙이나 규칙을 어겼다고 생각하는 ‘절차적 정의’의 위반이라 생각하면 용서하는 마음이 좀 더 쉽게 들지만, 상대방의 잘못이 나에게 돌아올 이익을 빼앗아 간 ‘분배적 정의’의 위반이라 생각하면 용서할 마음이 훨씬 더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xxx] 말하자면 상대방이 같은 잘못을 했더라도 절차적 정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분배적 정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용서하기가 좀 더 쉬워진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그의 행위가 나의 이익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에 집중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끼친 손해에 집중하는 한 용서하는 마음이 잘 생겨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더 큰 손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용서하는 것은 나의 행복과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 따라서 용서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용서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용서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필요도 없다. 나에게 해악을 끼친 상대는 내가 용서했다는 사실을 알 자격조차 없다. 용서는 나 혼자 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또 그래야 한다.
용서하려면 어떠한 식으로든 내게 해악을 끼쳤던 상대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나쁜 기억이 떠오르고 편도체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마음속에 가득 차버리면 용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따라서 편도체를 안정화하는 훈련을 먼저 충분히 해서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 용서 훈련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물론 편도체를 가라앉히는 호흡 명상이나 알아차림 명상을 함께하면 용서의 효과는 더욱 커진다.[xxxi] 고유감각 훈련 역시 편도체 안정화에 도움이 되므로 움직임 명상을 하는 것도 좋다. 실제로 유산소 운동과 유연성 운동은 자기조절력과 더불어 용서하는 능력도 향상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xxxii] 유산소 운동이나 장력운동을 할 때도 내 몸의 움직임에 대한 고유감각 정보를 늘 자각하는 훈련을 하면 용서할 수 있는 능력도 증진된다.
자기용서는 왜 중요한가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자신도 용서하지 못한다. 타인에 대한 정보처리와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처리는 거의 같은 신경망에 의해서 처리된다. 그렇기에 타인에 대한 모든 부정적 감정은 결국 나 자신에게 투영되기 마련이다. 마음근력과 관련해서 볼 때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분노를 자주 느끼는 것은 최악의 습관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는 일이다. 내가 나를 용서하는 자기용서는 나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기본 요건이다. 나는 나를 용서해야만 한다. 내가 나를 용서하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증오나 미움을 깔고 있으면 아무 일도 제대로 해낼 수가 없다. 용서를 할 수 있어야 다른 것도 할 수 있게 된다. 자기용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자기용서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자기 잘못에 대해 분명히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 어리석음, 부도덕함 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스스로 용서가 가능해진다. 내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 내가 나에게 변명하거나 사실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심리적인 저항을 계속하면 자기용서가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내면소통의 뿌리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마음 한쪽에 남아서 스트레스의 근원으로 자라나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끗하게 인정하고 스스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거쳐야 스트레스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다. 그래야 자기가치감(self-worth)과 자기존중심(self-respect)이 세워질 근거가 마련된다.[xxxiii]
잘못된 행위를 하고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나,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그 정도 잘못은 누구나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즉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통렬한 반성 없이 그냥 넘어간다면 자기용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자기용서의 시작은 자신의 잘못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깊이 반성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한 인정과 반성이 있고 깊이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러한 반성과 용서의 과정을 겪고 나면 나는 나 자신을 더욱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자기존중이 가능해진다. 자기용서는 우리를 자기존중으로 이끌어준다. 진정한 자기반성은 자기긍정으로 가는 확실한 첫걸음이다.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반성할 수 있어야 자기비난이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자기반성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존중할 수 없게 되고, 자신을 비난하게 되고 결국 자기비하와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
나에게 특별한 해악을 끼친 상대방이 있건 없건 우선 해야 하는 것은 자기용서다. 자기비난은 건강에 매우 해로우며, 자기용서는 건강에 매우 이롭다는 연구도 여럿 있다.[xxxiv]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늘 비난하는 내면소통을 하는 사람들은 편도체가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 자기비난의 습관을 지난 사람들은 트라우마 스트레스에 시달리거나[xxxv] 우울증 증세를 나타낼 가능성이 컸다.[xxxvi]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내면소통을 자주 하고 자아존중이 낮은 사람일수록 심지어 교통사고를 일으킬 가능성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xxxvii]
자기용서와 타인용서는 공통점이 많지만 결정적인 차이점도 있다. 그것은 자기용서를 하지 못할 때의 해악이 타인용서를 하지 못할 때의 해악에 비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이다.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면 늘 분노와 복수심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심신 건강에 매우 해롭다. 그런데 자기용서를 하지 못하는 것은 심신 건강에 훨씬 더 직접적이고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xxxviii] 이것이 무엇보다도 자기용서를 먼저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다시 한번 강조해두지만, 용서는 타인을 위한 비겁한 행위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용기있는 행위다.
각주
[i] Eckhart, 2009
[ii] Singh, 2020.
[iii] Worthington et al., 2007.
[iv] Worthington, 2005
[v] Toussaint et al., 2001
[vi] Mullet, Neto & Riviere, 2005
[vii] Billingsley & Losin, 2017
[viii] McCullough et al., 1998
[ix] Kelley, 1998
[x] Epel et al., 2009
[xi] Jacobs et al., 2011
[xii] Hoge, et al., 2013
[xiii] Brydon et al., 2012; Watkins et al., 2016
[xiv] Pearce, 2007
[xv] Singer et al., 2006
[xvi] Miller et al., 2008
[xvii] McCullough, 2000
[xviii] Billingsley & Losin, 2017
[xix] Ricciardi et al., 2013
[xx] Ohtsubo et al., 2018
[xxi] Holt-Lunstad et al., 2008
[xxii] Stoia-Caraballo et al., 2008
[xxiii] Berry and Worthington, 2001
[xxiv] Chida and Steptoe, 2008
[xxv] Lawler-Row et al., 2008
[xxvi] Toussaint et al., 2001
[xxvii] Worthington & Scherer, 2004
[xxviii] Mayo Clinic Staff, 2020
[xxix] Worthington, 2013
[xxx] Lucas et al., 2018
[xxxi] Kappen & Karremans, 2017
[xxxii] Struthers et al., 2017
[xxxiii] Dillon, 2001
[xxxiv] Toussaint et al., 2017
[xxxv] Gray et al., 2003
[xxxvi] Peterson et al., 1981
[xxxvii] Norris et al., 2000
[xxxviii] Hall & Fincham,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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