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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경혜 Feb 24. 2022

화해하기 어려운 싸움. (with 주름 테이프)




만화를 그릴 때 단순한 선 하나로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을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입가 옆 선의 유무다. 같은 조건의 외형을 가진 두 여자, 혹은 남자를 그리고 나서 한 명의 입가에 화룡점정 같은 작은 선 하나를 그려 넣으면 그 한 명은 언니이거나 엄마, 혹은 형이거나 아빠가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 쌍둥이 같던 젊은 얼굴에서 나이 든 얼굴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 간단한 작은 선이 어느 날 내 입가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있어온 것 같은 뻔뻔함을 장착한 채.

사실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무언가를 먹거나 말할 때 짓는 특유의 표정에서 입가 옆 선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애써 무시하기도 했고 이제 정말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때가 온 것인가 하는 걱정도 하긴 했지만 세월과 함께 슬렁슬렁 지나갔다. 하지만 어느 날 두둥! 하고 자리 잡은 입가 옆 주름은 그간의 안일함을 조롱하듯 현실로 나타났다. 이제는 무표정일 때도 언제나 나와 함께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듯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말하거나 먹을 때, 웃을 때는 존재를 한껏 뽐내 길게 이어지는 선을 만들어냈다. 입가 옆 주름 하나로 나이 든 얼굴로 변모한 나는 마흔이라는 숫자보다 더 선명히 내 나이를 실감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특단의 대책을 강구했다. 피부과에 가서 내 주름을 어찌해볼까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했지만 일단 겁이 많은 데다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고 남편의 강력한 반대가 앞을 막아섰다. 자연스럽게 늙어가자는 평소 삶의 철학을 실천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인데 물론 지당한 말씀이고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도 싶지만, 거울 속 주름이 까꿍 하고 인사를 건넬 때마다 괜찮은 피부과를 폭풍 검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예전 어느 뷰티 책자에서 피부과 의사가 소개한 나름 효과적인  생각났다. 약국에서 파는 살색 종이테이프를 주름이 있는 눈가나 입가에 붙이고  주나  달을 생활하면 주름이 엷어지는 효과가 있다는 것인데 마침 살색 종이테이프가 있었던 터라 당장 실행했다. 며칠을 꾸준히 해본 결과 실제로 주름이 엷어지는  같았지만, 중요한 것은 테이프를 붙인 상태로 웃거나 표정을 크게 지어서 입가  주름 옆에  작은 자잘한 선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원래의 주름은 주름대로 존재하며 자신의 작은 졸개들을 만들어내 탄력마저 없어 보이는 효과를 초래했달까.


김훈 작가님의 라면을 끓이며 라는 산문집에 이런 글이 있다.


여자들은 아무데서나 콤펙트를 꺼내 든다.

여자들의 혼백은 거울 속으로 무섭게 집중한다.

그때 여자들은 마치 거울 밖 세상을 버리고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화장을 마치고 나면 딸가닥 소리와 함께 거울 밖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식당이나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여자들은 삼매경으로 화장을 마치고 나서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또다시 콤팩트를 꺼내 그 어려운 공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아마도 여자들의 마음이 세상과 더불어 아늑하지 못하거나 얼굴과 자아 사이에서 화해하기 어려운 싸움을 진행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이렇게 예리한 관찰로 무장해제시키는 것일까. 여자들이 숨을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들킨 바에 어떻게 하면 마음이 세상과 더불어 아늑하고 얼굴과 자아 사이의 화해하기 어려운 싸움을 끝낼  있을지 진심으로 간절하게, 그것이 알고 싶다.


영화 아이 필 프리티는 여자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과 그것을 넘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코믹하면서도 나름 진지하게 그려낸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갖고 있는 특유의 유쾌하고 가볍고 코믹한 요소를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외면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이라고 새로운 사실을 말해주듯 자못 진지하게 말하지만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과 행하고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주인공도 엉뚱한 판타지적 요소를 통해, 즉 머리를 부딪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아름다운 여성으로 보이는 마법 같은 요소를 통해서야 서서히 깨닫는다. 주인공처럼 뿅 하고 내면의 아름다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삶의 태도를 갖기란 어쩌면 주인공처럼 머리를 부딪혀야만 행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손쉬운 해결책을 이용해 채워도 채워도 새어나가는 깨진 독에 물 붓기 같은 내면의 자신감을 채우는 작업을 계속한다.

나만해도 아이 필 프리티 속 주인공처럼 벼락같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나의 외형, 입가의 작은 주름 따위나 넓은 이마 때문에 내리는 귀찮은 앞머리 같은 건 아랑곳없이 나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있는 그대로 살고 싶다. 그렇다면 화면 속 아름다운 연예인이 대수일까? 그들과 나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며 해바라기 민들레 장미꽃이 각각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당연하지만 당연하게 갖지 못한 삶의 자세나 태도를 정신 승리하듯 갖고 싶다.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는 단단한 내면의 힘은 마라톤처럼 길고 지난한 수행의 과정을 묵묵히 걸어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 주인공이 머리를 부딪혀 자신을 아름답게 보는 얕은 술수에 지나지 않는 자신감보다 더 깊고 단단한 자신감과 그런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성찰의 힘을 갖는 것은 아름다운 외형을 갖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고귀해서 더 갖고 싶은 아름다움이다.


오래전,  자신이  견디게 혐오스럽던  시절에 참여했던 명상 프로그램에서 만난 여성은 나를 포함  주위 외형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여성들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길을 실천하며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내면의 빛으로 주위를 환하게 만들었다. 난생처음 보는 그녀의 빛남은 그동안 내가 생각하고  왔던 빛남과는 전혀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동경했다. 내면의 아름다움의 현현이었다. 그녀가 걸어간 길을 홀린  따라가고 싶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의 얼굴을 마주하며 직관적으로 느끼게    경험은 한동안은 외면의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않게  주었다. 나도 그녀처럼 내면의 빛만으로 충분히 빛날  있을 거란 희망을 붙잡게  주었다.

하지만 삶이라는 건 있는 그대로 나를 놔두지 않고 다시 눈을 가려버린다. 휩쓸리듯 사람들과 부딪히며 다시금 외형에 집착하게 한다. 나는 여전히 나의 이상을 실천하지 못하고 살색 종이테이프에 의존한다. 무수히 많은 자잘한 작은 선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을 겪으면서도 입가 옆 주름을 엷게 해 줄 거란 희망을 놓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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