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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경혜 Feb 17. 2022

무지개다리를 건넌 하늘이.

마지막을 함께 한다는 것.




오빠의 시골 개 하늘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얼마 전 엄마와 통화할 때 오빠네 개가 많이 아파서 곧 죽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들은 지 나흘만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시려고 원두를 갈려는 찰나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뭐해?” “커피 마시려고. 오빠는 이 시간에 뭐해? 자야 할 시간 아니야?” “… 하늘이가 죽었어.”

꽉 막힌 코맹맹이 소리로 하늘이가 죽었고 오늘 묻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자존심 강한 오빠는 동생 앞에서 울먹였다. “네가 반려묘를 키우니까 생각나서 전화했어.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동물인데.. 고작 일 년밖에 키우지 않았는데도 왜 이렇게 아프냐?”

오빠는 내 얘기를 잘 듣지도 않고 울먹거리다 비집고 나오는 슬픔을 참다못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하늘이는 돌아가신 오빠의 장인 장모님이 집 마당에서 기르던 진돗개다. 두 분이 연달아 돌아가시고 적막으로 가득한 빈 집에 오빠네가 들어와 산지 일 년이 되는 동안 주인을 잃고 쓸쓸히 집을 지키던 하늘이도 함께 였다. 취직에 번번이 미끄러지고 악재가 겹치던 그 시기, 술로 하루하루를 이 악물며 버티던 오빠 옆을 말없이 지키며 함께 산책하고 때로는 오빠의 넋두리도 들어주며 끈끈한 시간을 보냈다. 고작 일 년 동안이지만 누구보다 가깝게 지내왔던 터라 오빠는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나는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안 키울 거야..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끝없이 무너지는 자신이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야근하고 아침에 퇴근해서 점심이 훌쩍 넘어 오후가 다 되어가도록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후크를 키우기로 결심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언가를 책임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오롯이 나의 손에 후크의 생사가 달려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싫었다. 나는 최대한 후크를 맡고 싶지 않았지만, 한쪽 눈도 멀고 한쪽 발도 없이 절뚝거리며 따라오다 집으로 들어가던 나를 멈춰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크를 길고양이로 남기기는 더 싫었다. 뻔히 내다 보이는 앞날을 그대로 방치하는 건 생명을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뻔히 내다 보이는 앞날의 감당하기 벅찬 내 슬픔이 걱정돼 후크를 방치하는 것 역시 생명을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었다. 후크를 키우면서부터는 앞날이건 뒷날이건 되도록 생각하지 않았다. 키우기로 마음먹은 이상 어쩔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음이 마음껏 후크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티브이에서나 보던 강아지 엄마, 고양이 엄마라고 불리는 엄마들이 내가 되었다. 나는 기꺼이 후크 엄마가 되었고 후크를 고양이가 아닌 내 새끼처럼 여기게 되었다. 후크는 곧 어린애처럼 보채고 야옹거리며 나를 졸졸졸 따라다니고 애교를 부리고 내 무릎 위에서 내 손을 핥고 가르릉 거리며 잠이 들었다. 그런 날이 일상이 된 어느 날 받은 오빠의 전화는 내게 조그만 균열을 만들어냈다. 그 균열을 의식하며 나는 오빠를 위로하는 척하며 나를 위로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다 떠나.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한 일이잖아. 오빠가 하늘이를 사랑해주고 산책시켜주고 밥을 주고 아파서 힘들어할 때 곁에 있어주고 그러다 죽을 때 마지막을 함께 해줬으니 그게 얼마나 하늘이에게 행복한 삶이고 죽음이었겠어. 당장 어제 뉴스만 봐도 관리 안된 유기견 센터에 철창에 갇힌 개들이 아사 직전으로 낑낑거리며 사는 게 아닌 삶을 살고 있어. 그런 삶이랑 비교가 되겠어? 늙어서 자연사 한 하늘이는, 게다가 마지막을 혼자가 아니라 오빠가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 어쩌면 웬만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무지개다리를 건넌 거라고, 나는 오빠를 위로하는 척하며 나를 위로했다. “고맙다. 위로가 된다..”

내게 하는 위로가 오빠의 위로가 된다는 말이 다행이면서 부끄러웠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누군가의 마지막을 지켜본다는 것이 두렵다. 뉴스에 나왔던 유기견 센터의 아사 직전인 개들도 눈뜨고 보기 힘들어 고개를 돌렸다. 달리는 트럭에 매달려 질질 끌려가는 개들이 나온 장면에서는 채널을 돌렸다. 하물며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숨을 헐떡이며, 아니면 고요히 죽어가는 모습을 그냥 지켜만 본다는 것이 내게 가능한 일이기나 한 일인지 싶다. 그런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모를 그 일을 해낸다는 것은 얼마만큼의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까. 내가 오빠에게 열변을 토하며 위로하던 그 말들을 먼 훗날의 나에게도 누군가 해줬으면 좋겠다. 무너지지 않도록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며 우왕좌왕하며 절망에 빠져있을 그날에 내게 해준다면, 조금은 견딜만하지 않을까.


하늘이는 어쩌면 이 빈집에 들어온 새로운 가족들의 곁에 조금 더 머물며 그들이 잃어버린 가족들에 대한 마음을 추스르고 각자의 자리를 잡아갈 때까지 기다려준 것이 아닐까 싶다. 오빠의 기적 같은 취직과 올케언니의 진급 시험 등 그들이 이곳에서 온전하게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노견인 하늘이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그들의 곁을 떠났다. 하늘이가 가장 그리워하던 진짜 주인의 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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