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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

영화 '막달라 마리아' 에세이 (2020.5월)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후보로 여러 영화들이 있었다. Call me by your name, The King, Bird Box 등. 그러다 문득 조커가 보고 싶었다. 조커를 보고 싶은 마음은 곧 호아퀸 피닉스의 다른 작품들을 보고 싶은 궁금증으로 변했다. 조커와는 정반대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호아퀸의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글에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Mary Magdalene’ 이라는 영화를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그 영화가 개봉 했을 때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이 영화를 꼭 보자고 결심을 했다.



조커와는 정반대의 역할을 보고 싶었던 나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Mary Magdalene’에서 호아퀸은 예수님 역할을 맡았다. 호아퀸의 조커가 너무 인상 깊은 나머지 호아퀸이 연기하는 예수님은 어떨까 라는 궁금증이 있었다. 호아퀸은 자신이 맡은 배역에 완벽히 적응을 하면서도, 자신만의 깊고 강렬한 감정선으로 캐릭터와 본인을 돋보이게 만든다. 예수님과 관련된 많은 영화들을 보았고, 예수님을 맡은 훌륭한 배우들도 봐왔다. 하지만 예수님을 이토록 인간적으로 그린 연출과 배우는 처음이었다.



모태신앙으로 살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예수님의 이미지는 인자함 속에 있는 강함의 이미지였다. 크면서 예수님은 인간으로써 세상에 오면서 우리가 느꼈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단지 머릿속에만 있던 개념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위인 예수님이 아닌, 그저 한 인물로써, 한 사람으로써의 예수님을 그렸다. 우리가 바라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든 예수님이 아닌, 예수 그 자체를 그린 것 같았다. 막달라 마리아, 유다 등의 인물도 마찬가지었다. 많은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몸을 파는 여자라고 알고 있다. 나 또한 그렇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마리아의 모습은 내가 평소 가지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여자 제자’ ‘몸을 파는 여인’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한 사람, 그리고 사람들에게 깊은 애정과 동정심이 많은 한 인물로써 그려졌다. (자료를 찾아보니 마리아가 몸을 파는 여인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고, 초대 교회에서 여인들의 편에 서준 예수님의 가르침이 못마땅했던 몇몇의 지도자들이 퍼트린 루마라고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만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갈 때까지 옆을 지키며, 예수님이 살아났을 때의 첫 목격자였다. 어렸을 때 이런 부분에서 의문들이 많이 들었었다.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그를 따르던 모든 제자들이 같았을 텐데 왜 막달라 마리아만이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켰을까?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곁을 지킬 수 밖에 없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시 여인들은 한 인격체로 인정되지 못했던 시대이다. 그저 가정의 소유물, 가정을 돌보는 역할을 해주는 존재였다. 여인들은 원하는 만큼 원하는 시간대에 마음껏 기도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마리아 (영화를 토대로 본다면)는 그저 누군가의 아내와 어머니로 평생을 보내는 것과는 다른 삶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이 세상에 보내진 이유는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사랑과 말씀을 실천하고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리아 본인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 뚜렷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고, 거기서 오는 외로움으로 마음은 공허해 져만 갔다.



그러던 와중에 마리아의 아버지는 그녀를 결혼시키려 했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들로 인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억누르며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들을 이러한 마음의 동기를 죄라고 표명하고 그녀 안의 악마를 쫓아내야 한다며 거의 익사 할 때까지 그녀를 강물에 씻긴다. 다음 날 힘없이 누운 마리아를 걱정한 가족들은 유명한 치료자 ‘예수’를 불러 그녀 안의 악마를 쫓아 내 달라고 한다. 마리아는 예수를 달갑지 않아 한다. 하지만 예수가 마리아에게 건넨 첫 마디는 ‘너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었다. 그의 마리아는 잘 모르겠다며,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는 마리아 안에는 악마가 없다는 대답과 함께 따뜻한 미소를 건네준다. 처음으로 자신의 갈망을 알아준 예수라는 사람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된다. 마리아는 북적이는 무리 속에 들어가 그의 가르침을 듣고, 가족들에게서 배신자라는 말을 들으며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그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



당시 이스라엘 문화에서 랍비(스승)은 거의 부모님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마리아 또한 예수를 스승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따랐다. 하지만 그를 따르며 예수가 모두가 기다렸던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어쩌면 예수가 가르치는 ‘새로운 세상’은 모두가 생각하던 그 세상(로마로부터의 해방) 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이유에서 다른 제자들은 모두 숨었을 때 마리아 만이 예수님의 곁을 지켰을까? 다른 제자들도 자신의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예수님을 따르며 사랑했는데?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전부였다.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 이며, 자신에게 진정한 자유를 알게 해준 스승이자 메시아이다. 끊임없이 부정당하는 자신의 자아를 있는 그대로 보며 사랑해준 구원자인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며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었고, 신앙인으로써 나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경험들을 빗대며 나에게 있어 예수님이 어떤 의미인지를 되돌아 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끊임없이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이 부정되며 모두가 나와 맞지 않는 모양에 나를 끼워 맞추려 하는 기분이 얼마나 절망감이 드는지 너무나 잘 안다. 그렇기에 더 마리아에게 공감을 하며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이 가장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결국 내가 사랑받고 싶어하는 대상이 나를 있는 그대로, 나로서 사랑해준다는 느낌을 받을 때 인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또한 완전하지 않다.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받을 순 있지만, 완전한 사랑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완전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우리는 아무리 많은 사랑을 받아도 마음 한편에서는 결핍과 공허함을 느끼는 것이다. 사람마다 받고 싶어하는 사랑의 종류와 모습, 모양도 모두 다르다. 그렇기에 내가 받은 사랑이 아무리 다정하고 따뜻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원하는 사랑의 방식이 아니라면 나의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다.



나 또한 그러한 결핍들로 인해 깊은 우울에 빠지며,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이들의 사랑까지도 부정하고 그들에게서 원하는 애정을 얻기 위해 나를 감정적으로 망가트려 그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원하는 사랑을 내가 내 자신에게 주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내가 나에게 주는 사랑 조차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는 벽으로 변질이 되었다. 결국 나의 결핍은 채워지지 않았고, 그 결핍은 커져만 가며, 내 안에서의 수 많은 욕구들이 부딪혀 혼란스럽기 까지 했다. 이 결핍들로 인해 나는 내 자신을 억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며 더 깊은 신앙의 훈련을 받고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해주며, 지켜주고, 나의 불안정하고 모난 사랑 조차도 아름답다고 속삭이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도 같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가 더욱 더 주님의 곁을 끝까지 지켰던 이유도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사랑해주며, 이끌어준 그녀의 스승이자 구원자와 끝날 까지 함께 하겠다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자신이 받은 사랑을 예수님께도 주고 싶었던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출처] 막달라 마리아|작성자 한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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