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3 (2020년도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내는 과제)
미장센이란, 영화의 한 화면 안에 보여지는 모든 시각적인 요소를 일컫는 말이다. 미술, 조명,사운드, 촬영, 심지어 배우의 블로킹과 연기까지도 미장센에 포함이 된다. 즉, 영화가 예술로서의 기능을 하게끔 하는 모든 연출적인 요소를 뜻하는 개념인 것이다. 영화 <버드 박스>의 마지막 장면을 예시로 들어보겠다.
<버드 박스>는 눈이 마주치면 자살을 하게 되는 정체불명의 악령이 세상을 덮치면서 시작되는 영화이다. 악령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임신을 한 주인공 맬로니의 언니는 맬로니를 데리고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악령에 의해 자살을 하게 된다. 온 도시가 악령으로 인해 초토화가 된 상태에서 맬로니는 사람들에 의해 떠밀려 넘어지고,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한 아주머니가 피신처에서 나온다. 하지만 맬로니를 도와준 아주머니는 악령을 보게 되어 불에 타는 차에 올라타며 자살을 하게 되고, 피신처를 찾던 톰의 도움으로 맬로니는 피신처를 찾을 수 있게 된다. 피신처는 톰과 맬로니를 제외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로 얼마 후, 올림피아라는 젊은 여성이 임신한 채로 피신처에 오게 된다. 9명의 사람들은 살아갈 계획을 세우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인원들이 희생이 된다. 톰, 맬로니, 올림피아, 더글러스와 샤롤 밖에 남지 않은 상태. 어느 날, 자신을 들여 달라는 한 남자의 간곡한 외침이 들린다. 더글러스는 반대를 하지만 맬로니의 완강 함으로 개리라는 남자는 피신처에 들어 올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생존자와 함께 지내던 중, 올림피아와 맬로니는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아이를 낳게 된다. 그때야 서서히 드러나는 개리의 정체. 그는 악령과 눈이 마주쳐 미쳐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악령을 ‘아름다운 것’이라 칭하며 막아놓은 창문을 모두 열어둔다. 그를 막는 과정에서 샤롤, 더글라스 그리고 올림피아는 죽게 되고, 톰의 도움으로 개리 또한 죽게 된다. 단 둘이 남은 톰과 맬로니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자신을 희생한 올림피아의 딸과 맬로니의 아들을 함께 키우기로 결정한다. 5년 동안 안전한 곳을 찾아 집을 옮겨 다니던 맬로니와 톰은 아이들과 함께 생존자들이 모인 곳으로 이동을 하기로 한다. 하지만 톰은 악령 숭배자들에 의해 죽음으로 당하게 되고, 결국 맬로니는 그녀의 아들(보이) 그리고 올림피아의 딸(걸)과 함께 박스 안의 새를 사용하며 강을 타 생존자들의 곳으로 이동한다. 그들이 산전수전을 겪으며 도착한 곳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생존에 성공한 맬로니는 자신이 임신을 할 당시 진찰을 해준 의사와 다시 재회하게 된다. 그녀는 새들을 풀어주며 걸과 보이에게 올림피아와 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정말 다양한 해석들이 많이 나온다. ‘선과 악’에 대한 주제로 해석하는 이들도, ‘희망과 절망’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혹은 ‘영화가 너무 난잡 하여 감독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함과 두려움’에 과한 영화로 해석되었다. 악령과 눈이 마주친 이들은 자신이 그리워하던 누군가를 부르거나 자신의 트라우마를 보며 자살을 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맬로니도 무책임한 부모로 인해 자신의 아이들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아이들을 Girl과 Boy로 지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맬로니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톰과 갈등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저한 곳으로 가는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이 아이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주었을 때 아이들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자신이 그토록 외면하고 싶어했던 두려움을 마주보게 된 것이다.
이 영화 속에는 많은 매타포들이 숨겨 있다. 매타포가 오히려 너무 지나쳐, 해석들이 갈리고 감독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평도 많이 받는다. 맬로니와 아이들의 길을 인도해주는 박스 속의 새, 그들의 눈을 가린 눈가리개, 악령 숭배자들, 눈이 보이지 않는 이들, 영화 속에서 시각적으로는 표현이 되는 것이 없는 악령 등등. 감독은 영화 속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미쟝센이 정말 많았다. 그러한 탓에 해석이 다양한 갈래로, 혹은 너무 난잡하다는 평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화 속 매타포들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해석은 이러하다.
1) 박스 속의 새(버드 박스): 영화 속에서 새는 보이지 않는 악령들의 존재를 알리는 경고음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나는 버드 박스는 개인의 두려움과 불안을 자극되었을 때 내면에서 울리는 경고음으로 해석 되었다. 실제로 영화에서도 새들이 요동을 칠 때마다 주인공들은 더욱 큰 위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엔딩 장면에서 맬로니가 새를 풀어주는 모습을 봤을 때에는, 우리가 우리의 두려움을 마주했을 때, 그 경고음은 오히려 희망과 기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악령 숭배자들: 악령 숭배자들이 가장 해석하기 어려웠다. 분석을 해도 작위적인 해석들만생각이 났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찬찬히 보니, 악령 숭배자들이 정말 악한 존재일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 또한 주인공의 주관적인 시점으로 진행이 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주인공이 느끼는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그들이 더욱 위협적인 존재로 영화 내에서 묘사가 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을 해보자면, 개인이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을 바라보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내가 나의 두려움을 마주봤을 때 나에게 불행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함으로 해석이 되었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두려움으로부터 더욱 외면을 하게끔 하는 존재들 인것 같다.
3) 눈 가리개: 맬로니와 톰, 보이와 걸은 안전한 장소를 찾아 이동을 할 때에 항상 눈 가리개를 썼다. 이는 악령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이다. 자신의 두려움을 보지 않으려는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아이들에게 현실에 대한 공포 만을 심어주었던 맬로니가 걸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희망의 메시지를 말해주며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자신의 두려움을 마주 하자 맬로니는 생존자들의 장소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눈 가리개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
4) 보이지 않는 악령: 감독이 영화 내에서 악령의 존재를 보여주지 않은 이유는, 공포감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관객들은 이미 많은 영화와 문학 등을 접하면서 ‘악령’ 혹은 ‘괴물’이라는 존재에 너무나도 익숙해졌다. 악령을 봤을 때 사람들의 행동을 보여준 후, 악령의 모습은 관객들의 상상에 맞긴 것이다. 또한, 주제를 표현하기에도 악령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악령을 보여줬다면, 우리 가까이에 있는 두려움이 아닌 그저 영화 속 괴물의 존재로 인식이 되었을 것 같다. 악령의 모습을 관객들에게서 숨김으로써, 관객들은 본인들의 두려움을 투영하여 인물들에게 더욱 몰입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영화 내에서 표현하려는 두려움이 우리 가까이에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엔딩 장면이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시각 장애인들과 생존자들의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이 어딘가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전 씬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공간의 모습 때문이 가장 큰 것 같다. 뿐 아니라, 거의 1시간 53분 동안 푸른 톤으로 진행되었던 영화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시설로 들어서자, 따스하게 비춰지는 햇빛과 함께 퍼지는 노란 톤이 오히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함을 준다.
<버드 박스>는 영화 <매맨토>와 같이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면서 진행되는 영화다. 과거 씬들은 현재 씬 보다 상대적으로 노란 톤의 화면과 조명을 사용한다. 영화 속 노란 톤과 조명은 햇빛을 묘사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버드 박스>에서의 햇빛은 밖을 내다본다는 의미고, 밖을 내다본다는 것은 안전 함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영화 중반부에 개리가 창문의 신문지들을 뜯으며 샤롤의 눈을 억지로 뜨게 하여 악령을 보게 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노란 톤의 따스한 햇빛이 온 방을 감싼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의 햇빛은 따뜻하기 보다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러한 장면들이 쌓이면서 관객들은 노란색 톤이 나오는 장면들을 위기의 장면들이라고 인식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엔딩 장면에서의 채도가 낮아 마치 햇빛이 쨍쨍한 봄날에 회색 구름이 낀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화면의 색감도 관객들에게 불안함을 주는 요소가 되는 것 같다.
사운드적 측면에는, 전 씬들과는 달리, 불안에 떠는 새 소리가 아닌 평화로운 새와 사람들의 말 소리가 뭉쳐 들린다. 마치 유트브에서 들을 수 있는 식당 앰비언스 같은 느낌이다. 그러한 사운드와 함께 평화로운 사람들의 광경을 낯설어 하는 걸의 모습을 클로즈업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도 시각장애인들과 생존자들의 평화로운 모습이 낯설고 이질적이게 느끼게끔 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크레딧으로 넘어가는 음악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평화로운 앰비언스와 같은 사운드를 깔다가 크레딧으로 넘어가자 음악은 마치 강물에서 악령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맬로니, 걸, 그리고 보이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음악이 깔린다. 귀에 가장 크게 들리는 멜로디 밑에 마치 안개가 서서히 엄습해 오듯 깔리는 스트링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엔딩 장면도 마냥 행복하게 받아드리지 못하게끔 하는 것 같다.
영화는 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을 안전한 곳으로 설정을 했을까? 단순히 악령을 볼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일까? 결말에 대해 나는 다소 회의적인 해석을 했다. 앞서 분석한 요소들을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감독도 그들의 모습을 마냥 평화롭고 행복하게 묘사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두려움의 존재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과연 행복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설에는 약령에 대한 존재를 알리기 위해 새들을 자유롭게 풀어놨다. 그 뜻은, 시각장애가 있는 인물(엑스트라들)들도 악령에 대한 존재를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더욱 세심하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악령의 존재를 느낄 뿐, 악령의 존재를 직접 겪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느끼는 불안이 더 클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정말 평화롭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애써 그 불안과 두려움을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우리가 우리의 불안을 애써 외면하며 괜찮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다독이 듯이 말이다.
엔딩 장면을 보며 든 생각은, 저 아이들이 자라서 후손들을 낳을 것이고 생존자들이 더 많이 찾아올 것인데, 시설 내에서 계속 하여 증가하는 인구수는 어떡할 것인지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또한, 악령은 인간의 힘으로 처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시설 밖에는 아직도 그들이 존재한다. 생존자들은 여전히 악령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아이들은 자라면서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어 할 테고,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더 크고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는 이들도 많을 것이고, 그로 인해 시설 내의 생존자들 모두가 위험에 처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엔딩을 통해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떻게든 두려움은 우리 곁에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그 두려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경고음이 될 수도 혹은 나에게 용기를 주는 기대가 될 수도 있다.’ 가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