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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불만이 많았던 23살)

'무진기행' 에세이 (2020.3월)

누군가가 나에게 오래 살고 싶냐는 질문을 해 올 때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굳이 오래 살고 싶진 않은데. 그냥 짧고 굵게 살고 싶어. 한 80년?”



그래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나 주변에 어르신들을 보면 80살이라는 나이도 생각보다 많은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100살 이상까지 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이 책 덕분에 내 꿈은 이뤄질 것 같다. 소설의 마지막 책장을 넘겼을 때는 이미 내 수명의 약 5년은 줄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무진기행’이라는 소설이 지금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당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은 것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여러 자료들을 검색 보았다. 대부분은 ‘획기적이고 독특한 문체!’ ‘당시의 시대적 공감을 이끌어낸 소설!’ 이었다. 이 소설을 이해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소설의 배경인 1960년대에 대해 조사를 조금 해봤다. 1960년대에는 ‘한강의 기적’ 등의 급격한 경제 성장과 ‘5.16 군사정변’과 같은 정치와 정권의 급격한 변화들로 끊임없이 사회가 뒤흔들리는 시대였다. 급격한 변화와 폭력이 나무라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의 자아, 가슴의 열망과 이상보다는 그것과는 반대되는 가치들을 더 우선시 해야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현실에 순응을 해야 했으며 투쟁하고 싸워야 했다. 그 결과 사회는 안정이 되어갔고, 주변의 나라에서도 인정 받을 만큼 큰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의 사회는 빛을 향해 나아갔지만, 사회의 빛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은 그림자에 가리워졌다. 그들은 스스로가 원하는 것, 개인의 행복과 이상을 억눌러야 했고, 그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의 자아를 포기해야 했다. ‘무진기행’이 당시의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사회와 현실로부터 자유를 향한 당시 사람들의 열망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난 후에야 나는 ‘무진기행’이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를 이해 할 수 있었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에 반감이 들어 소설을 이해하고 싶은 동기가 생겼고, 그 동기로 인해 당시 시대에 대해 짧게라도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당시의 사람들 – 지금의 어른들과 지금의 사회의 흐름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기성세대가 안정성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 할 수 있었다. 지금의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였을 적에는 급격한 사회변화와 끊임없는 투쟁과 폭력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들은 자신의 피와 땀을 흘려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수없이 많은 무고한 희생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감사한 노력과 희생 덕분에 사회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지만, 당시의 시대적 아픔은 불안함으로 그들 마음 속에 피어났고 그 불안함은 사회 속으로 깊은 뿌리를 내렸다. 이러한 불안함으로 인해 그들이 억압해왔던 개인의 행복과 이상을 향한 열망은 점점 쌓여만 갔다. 그러한 기성세대의 불안함으로 인해 억압을 당한 지금의 젊은 세대는 그들처럼 살지 않겠다며 다짐한다. 그 다짐은 반감이 되어 지금의 기성세대의 억압된 열망과 지금의 젊은 세대의 억압된 열망들이 모두 폭발하여 개인의 행복, 쾌락, 안락함과 편안함을 지나치게 추구하게 된 것이다. 사실 고등학생 때부터 확립되어온 나만의 이론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나 또한 사회가 강조하는 것들에 대한 반감만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 지금 어른들의 불안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무진기행’은 주인공이 무진으로 떠나며 일어나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소설이다. 그는 무진에서 자신의 후배 박과 동창 조, 그리고 인숙이라는 여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는 인숙과 몸을 섞고 아내의 급한 연락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주인공은 아내의 전보와 무진에 남고 싶어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인숙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담기 편지를 써내려 간다. 이내 그는 인숙에게 쓴 편지를 찢고 서울로 돌아간다. 그는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소설은 끝난다. 나의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무진과 인숙은 주인공이 추구하고자 하는 자아의 실현과 이상, 개인 행복의 추구인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서울과 아내는 주인공이 돌아가고 순응하며 묵묵하게 따라야 하는 현실로 해석되었다. 무진이라는 공간이 주인공에게는 이상의 공간이지만, 박과 조 그리고 인숙에게는 오히려 무진이라는 공간이 현실이라는 점도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주인공이 인숙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쓴 것은 주인공과 당시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아 실현과 개인의 행복을 향한 열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편지를 찢은 것은 결국 그가 현실에 순응하기로 결정했고, 당시 많은 사람들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가 서울을 떠나며 느꼈던 부끄러움은 결국 자신을 배신하고 현실을 선택을 한 자신을 향한 부끄러움, 현실에 대한 불만은 있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향한 부끄러움으로 해석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러한 아픔을 지녔다는 생각에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적 공감을 끌어내고, 작품성이 뛰어난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없으며, 비판할 점이 없는 작품은 없다고 본다. ‘무진기행’도 마찬가지이다.


‘무진기행’에 관한 글을 인터넷에 찾아봐도 이 작품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글들을 접하긴 쉽지 않았다. 많아도 10개 중에 2개 정도였다. 학창시절을 되새겨 보면, ‘이 작품은 이러한 점들이 뛰어났기에 지금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배웠지, 그 작품을 비판적인 – 그것과는 상반되는 관점에 대해서 배운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왜 당시의 뛰어난 작품, 혹은 지금의 뛰어난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 작품을 긍정하고, 비판할 점이 없는 작품이 되는 것일까? 왜 시대적인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이유로 그 작품은 자동적으로 모든 것이 완벽한 작품이 되는 것일까? 왜 긍정적인 평가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작품을 보는 눈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학창시절 때부터 있었다. 좋은 작품이 있지만 완벽한 작품은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시대적 가치와 감성은 변하기 때문에 당시에는 크게 비판할 것이 없던 작품도 몇 년 후에는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무진기행’의 경우도 그랬다.


‘무진기행’은 좋은 작품임이 틀림없다. 작가만의 독특한 문체와 시대적 공감을 이끌어내고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상징적으로 잘 드러난 작품이다. 하지만, 이처럼 좋은 작품도 비판할 점들이 있다. 우선, 바람을 피는 내용의 이야기를 미화시킨 것에 반감이 들고 화가 났다. 바람이라는 소재 자체에 반감이 들었기보다는, 바람을 핀 후 큰 죄책감이 없어 보이는 주인공의 모습에 반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바람이라는 소재를 개인의 행복(이상)의 상징성으로 사용하며 미화한 것이 화가 났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배워온 한국문학 작품들의 (심지어 영화 조차도)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바람’이라는 소재에 내가 반감이 든 이유는 따로 있다. 한국문학과 영화에서는 새로운 상대와의 만남을 이상과 현실로부터의 도피, 자유 등의 상징성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익숙한 상대를 그저 책임감으로 인한 관계, 현실의 순응, 잠깐의 재미와 실수 후에도 돌아 갈 수 있는 안식처로서 표현이 된다. 뭐 상징성은 개인의 자유고 많은 사람들이 바람에 대한 환상을 한번쯤은 한다니 (사실 이것에 대해서도 할 말이 굉장히 매우 아주 많지만 생략하겠다) 그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대게 이러한 상징성을 지닌 인물들은 바람을 피는 인물과 주제의 상징성을 위해 소모적으로만 쓰이고, 바람을 피는 인물은 남자, 바람의 대상과 익숙한 대상은 주로 여자이다. 이런 인물들은 자아가 없을 뿐 더러, 인물 자체로서 이야기에서는 큰 작용을 하지 않는다.


‘무진기행’을 보면 아내라는 인물이 굉장히 소모적으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주인공 외에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며, 이야기의 흐름상 아내의 비중이 없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주인공이 무진으로 여행을 하면서 아내를 언급하거나 아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을 드물다. 아내 덕분에 무진으로 여행을 올 수 있었고, 주인공이 아내에 대한 애정이 아예 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또한, 직장인으로서 여행 도중에 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는 힘들 것이다. 일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면 자신의 승진에 큰 역할을 한 아내에 대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아내가 없는 곳에서 새로운 여성에게 호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죄책감이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며, 죄책감이 들면 자연스럽게 아내 생각이 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누가 아내에 대해 묻지 않는 이상 아내에 대해 생각을 하거나 언급을 하는 부분이 크게 나오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작가가 이러한 세세한 심리묘사가 불필요하다 판단되어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근거만으로는 아내라는 여성이었기에 상징성을 위해 소모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아내가 소설 내에서 언급이 될 경우에는 그저 ‘빽 좋은 과부’라는 타이틀로만 언급이 된다. 그 외에 아내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소설의 주제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인 만큼 이상을 상징하는 인숙과 현실을 상징하는 아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아내는 상징성을 위해 소모적으로 쓰였다. 그래서인지 아내라는 인물의 상징성만큼이나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 인숙 또한 상징성을 위해 소모적으로 쓰인 것처럼 느껴졌다. 인물을 소모적이게 쓰는 것은 개인에 따라 크게 비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포함한 다른 작품들을 아울러 생각해 볼때, 상징성을 지닌 바람의 대상과 익숙한 대상은 상대적으로 여성, 그리고 바람을 피는 대상은 상대적으로 남성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 곳곳에 직간접적으로 그 당시의 여성차별적인 가치관들이 드러나는 부분들 또한 내가 든 반감에 근거가 된다. 그 외로 반감이 든 부분은 아니지만, 당시 작품들의 특징을 보면 인물과 소설의 인상이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뿐 아니라, 주인공은 살아가는 현실에 불만이 많지만 그것을 해소 혹은 해결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 것 같다. 또, 주인공의 감정의 직접적인 묘사보다 인물이 관찰하는 주변의 묘사나 주변 인물들의 대화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 같다.


막상 글을 써보니 소설의 책장을 넘기며 빼앗겼던 5년의 수명을 다시 돌려 받은 느낌이다. 크게 재미나 감동이 있었던 작품도 아니었고, 내 가치관과는 많이 부딪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배우고 공부하고 생각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5년이라는 수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다.


     

[출처] 무진기행 감상문|작성자 한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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