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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 우리의 일생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에세이 (2020. 4월)

나도 한때 그런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기만 했던 시절이. 그래서인지, 나에게 일어나는 절망의 순간들, 배신의 순간들, 나의 모든 꿈과 희망이 짓밟히는 순간들,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악함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 또한 원망스러웠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담고자 했던 나의 그릇에는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마냥 순진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잔느를 향한 연민 속에 냉소함이 공존했다.




‘여자의 일생’은 잔느가 수녀원에서 나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녀는 수녀원에 들어가기 전에 다정하지만 꽤나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수녀원에서 나온 잔느는 드디어 맞보는 자유에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그렇게 그녀는 줄리앙이라는 청년을 만나게 되고, 둘은 얼마 되지 않아 축복 속에서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결혼 후 달라진 남편의 모습에 잔느는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줄리앙은 잔느의 하녀 로잘리를 임신 시키게 되고, 로잘리는 그 사건으로 잔느의 곁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된다. 남편의 배신으로 줄리앙과 이혼을 하기로 마음 먹은 잔느는 자신의 임신 소식으로 마음을 바꾼다.



어느 날, 잔느의 아들은 아프게 되고 그녀는 불안함에 딸을 임신하게 된다. 그 후 잔느는 자신의 친구 푸르빌 백작 부인과 줄리앙이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눈을 감기로 한다. 하지만 푸르빌 백작은 부인과 줄리앙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자 사고를 위장한 살인을 저지른다. 남편이 죽은 후 잔느는 딸을 유산하고 아들에게 집착하는 삶을 살게 된다. 외할아버지, 이모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과도한 사랑을 받고 자란 폴(잔느의 아들)은 방탕한 청년으로 자란다. 그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며 빚에 쫓겨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다.



아들의 배신(?)으로 괴로워하던 중, 잔느의 아버지와 이모 마저도 세상을 떠나고 잔느는 자살 충동을 느낀다. 그때 그녀의 옛 하녀 로잘리가 나타나 구해준다. 로잘리의 보살핌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가던 중, 그녀는 아들에게서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던 중 위독 해졌다는 편지를 받게 된다. 로잘리는 자신이 폴을 보러 가겠다며 파리로 출발하고, 며칠 후 폴의 딸을 안은 채 잔느를 맞이한다. 자신의 손녀를 안으며 잔느는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것을 느끼고,



“인생이란, 아시겠죠, 생각보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가 봐요.”



라는 로잘리의 말과 함께 소설은 끝난다.



소설의 첫인상은, 남자 작가임에도 당시의 여성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잔느가 여자라서 이런 삶을 사는 거야’ 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고, ‘여자인 잔느’가 아닌 캐릭터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잔느를 느낄 수 있었다. 독자들로 하여금 잔느의 슬픔에 공감하지만 동시에 객관성을 잃지 않게끔 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혹은 과제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소설에 빠져들지 못한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준 염세주의적 세계관 속에서 묘한 분노와 슬픔이 느껴졌다. 마치 본인을 잔느에게 투영하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세상을 향해 원망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분노와 슬픔은 그 크기만큼 너무나 긴 시간이 지나, 짓눌린 지층처럼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짓눌린 분노와 슬픔은 잔느의 무기력함을 통해 표현 되었던 것 같다.



로잘리와 줄리앙을 제외한 소설의 인물들은 어딘가 붕 떠 있어 보였다. 모두 각자의 허상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현실을 맞닥뜨릴 때면 도망치고 진실을 외면하느라 바쁘다. 남작은 줄리앙이 잔느에게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도, 자신의 잘못이 드러날 까봐 잔느를 달래기에만 바쁘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잔느를 순진하게만 키워온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가책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지는 점잖은 모습 속 자신만 아는 모습들이 드러날까 두려웠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남작은 형식적인 인물처럼 보였다. 자기 위안을 위해,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 시키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잘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남작 부인은 현실을 철저히 외면하며 자신의 감상 속에만 빠져 자신의 절망감을 묻어두며 포장한다. 잔느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수 많은 괴로움의 사건들로부터 도망치며 자신의 공허함과 결핍을 채워줄 대상을 옮겨 다닌다. 잔느가 손녀를 안으며 느끼는 희망도 집착처럼 느껴졌다. 살고자 싶기에 어떻게든 살아갈 대상을 찾는 대에서 오는 집착 말이다.



인물들의 회피적인 태도는 모파상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반영한 것은 아닐까 싶다. 모파상의 짓눌린 분노와 슬픔도, 그로 인해 생긴 염세주의적 세계관도 그의 회피적인 태도 때문일 거라고 예상한다. 그럼에도 절망적인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파상의 의지가 엿보인 인물이 있었다. 바로 로잘리 이다. 다른 인물들에 비해 비중이 많지는 않지만, 주제적 측면에서는 주인공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인 것 같다. 나는 로잘리와 잔느의 관계를 통해 모파상이 겪었던 내적 갈등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로잘리는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로잘리와 잔느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 결혼 후에도 함께 서로를 아끼며 산다. 하지만 로잘리가 줄리앙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내쫓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을 놓으려는 순간 잔느에게 찾아온 사람은 로잘리였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며 살아간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 희망이 꺾이고 배신당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배신감으로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만, 그 희망은 가장 절망의 시기에 다시 찾아온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의아했던 점은, 자신의 곁을 끝까지 지켜준 사람은 로잘리 임에도 잔느는 그녀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잔느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본인이 혼자라고 여긴다. 마치 우리가 희망을 외면하며 혼자만의 괴로움 속에서 허우적 거리 듯 말이다.



로잘리라고 힘들지 않은 삶을 살았을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도 몹시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가족처럼 모신 주인의 집에서 내쫓기고, 줄리앙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잔느를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주인을 배신한 더러운 하녀’라는 시선도 감당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로잘리는 삶이 던져주는 돌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것을 통해 더 강해졌다고 생각되었다. 로잘리는 모파상이 되고 싶은 존재, 혹은 자신 곁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로잘리의 마지막 대사는 모파상이 자신에게 주는 작은 위안인 동시에, 이미 너무 지쳐 자신의 절망적인 삶을 체념해버린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고, 나는 거기에 몸을 맡길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불행은 어디로부터 출발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여자의 일생을 읽으며 잔느는 희생물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의문이 든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겪는 어려움의 희생물이라 생각하며, 내가 겪는 고난이 가장 힘들다는 착각에 빠져 산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희생물로 만드는 셈이다. 절망과 고난은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존재일까? 오히려 그러한 부담 때문에 더 짓눌리는 것 같다. 로잘리는 잔느에게 상황을 이겨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잔느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해결책을 제시해주며 그녀가 힘들 때는 보살펴주고, 현실을 외면할 때는 다그치며 품어준다. 이것이 우리가 어려움을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으며 많은 상처도 받고, 넘어지기도 하며, 무너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있기에 우리는 깨달아 가고, 살아가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고 생각한다. 절망과 고난을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닌 내가 품어야 할, 때로는 나를 다그치고 품어줄 수 있는 친구 같은 존재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그렇다. 나는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그릇의 금 사이로 내가 믿고 싶었던 아름다움이 새어 나갔지만, 그렇기에 나는 그릇 밑바닥에 남아있던 모두에게 외면 당했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릇에 새겨진 금은 새로운 문양을 피웠다. 절망을 통해 나의 밑바닥과 결핍들을 마주 보게 되었고, 나의 헛된 희망이 깨지면서 내가 정말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잡게 되었다. 다시 나의 수렁에 빠질 때면 나의 곁에도 로잘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출처] [현대문학예술 중간고사 과제: 여자의 일생] 201834037 한혜윤|작성자 한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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