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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러지지 않는 우주

단편 소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에세이 (2020.10월)

 “당신이라는 우주를.”



       소설 속 ‘형’의 대사와 같이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는 서로의 우주들이 어우러지지 않은 채 혹은 어지럽게 얽힌 채로 살아가게 된다. 소설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주인공인 ‘영’을 따라가며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다. 각자의 우주 속을 헤매며, 이 사회와 세계 속 자신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작가만의 가벼우면서도 재치 있는 문체는 살아있는 인물들을 창조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또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플롯 구조도 이질감이나 헷갈림 없이 독자들이 인물의 감정선에 잘 몰입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작가 본인의 이야기인가?’라는 물음이 들 정도로 (아마 맞는 것 같다) 디테일한 인물의 감정 묘사는 소설을 더욱 매력적이게 만들었다.



    ‘사랑은 상대에게 배신을 당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목사님인 아빠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며 한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생각났던 말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엄마와 (전) 연인인 ‘형’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의 배신을 당하며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주인공 스스로 생각하는 실패는 무엇일까? 끝내 받아내지 못한 엄마의 사과? 이루어지지 않은 형과의 사랑? 주인공은 자신의 우주 속에서 찾지 못한 답을 엄마와 형을 통해 찾으려 한다. 그는 그들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과 가치를 확인하고자 한다. 주인공뿐 아니라, 소설 속 세명의 인물 모두 각자의 우주만을 내세우며, 알아주고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즉, 본인들의 불안과 결핍만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욕심을 상대에게 강요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주인공이 실패한 것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얻는 것에 실패한 것이라고 본다. 세 인물은 서로를 사랑하기 전에 자신의 불안과 결핍을 본인 스스로가 알아주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도 그 사람만의 우주가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의 우주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 여름, 나는 완전히 미쳐 있었다. 돌았고, 사로 잡혔다.’



주인공은 형에게 완전히 매료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형의 우주를 들여다보지도, 보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저 형을 향한 자신의 감정과 그에게 사로 잡힌 자기 자신에게 매료되어있을 뿐이다. 형의 우주론적 담론에 그는 그를 ‘현실적인 문제는 다 밀어놓은 채 저 너머만 보는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형이라는 인물 또한 자신의 감정에만 취해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는 형의 많은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들은 적은 있어도 진실되게 들은 적은 없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형에게 사로 잡힌 이유는 형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형에게 사로 잡힌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자신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형이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들을 겪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형의 우주론적 담론을 이해하느라 그와 있을 땐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들과 내적인 고민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취한 연극배우 같은 형 – 함께 있으면 그리스 비극이나 80년대 영화 같았던 분위기에 취해 본인이 대단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착각과 함께 현실이 마비되는 기분에 취했을 것이다.

   형이 잠든 사이, 주인공은 형의 컴퓨터 속 검색 결과들을 보며 불쑥 사과받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른다. 자신이 사과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나열하다가 그는 엄마에게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왜 그 순간 불쑥 엄마에게 사과를 받고 싶어 했을까. 동성애에 대한 온갖 기사들을 검색한 형의 컴퓨터를 보며 주인공은 지금까지 본인이 느낀 사랑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본인의 사랑이, 환상이, 어렵게 찾은 자신의 자리가 다시 없어질 것에 대한 불안함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불안함의 원인을 자신의 엄마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 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본인이 어딘가 혹은 누군가에게 소속되지 못한다는 거절감을 느끼는 시점부터 인 것 같다. 주인공이 느낀 첫 거절 감은 (대개의 경우 그렇듯) 자신의 부모로부터 왔다. 그리고 고등학교 여름 방학 때 있었던 (정신 병원에 입원당한) 일을 기점으로 엄마의 사랑으로부터 배신감을 느낀다. 엄마가 거부한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자신이 속할 곳을 찾지 못하는 것이고, 자신이 온전히 사랑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라며 탓한다. 하지만 끝내 엄마의 사과는 그에게로 녹아들고, 엄마도 형도 자신도 그저 자신으로써 존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라며 소설을 끝낸다.

   작가는 주인공의 감정과 주변을 해체하며 본인에 대한 고민을 해나간다. 하지만 ‘해체’에서만 끝낸 점이 아쉬웠다. 마치 자신의 보물 상자에 두었던 씨를 땅에 뿌렸지만, 물을 주지 않은 느낌이었다. 자신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점과 소설을 통해 표현한 자신에 대해 더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있었지만, 땅을 파다가 도중에 힘들어서 그만둔 기분이 들었다. 감정의 나열과 해체, 그 속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작가 본인도 아직 잘 모르는 듯하다. 작가는 -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암이나 곰팡이처럼, 지구의 자전이나 태양의 흑점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주의 현상이다.’



-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그렇기에 우리가 하는 사랑 또한 완전할 수 없다. 그럼에도 존재하기 위한 노력이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아름답고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잘못이 없으며 단지 운이 나빴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게 된다. 서로의 우주들이 어우러지지 않은 채 부딪히고 갈등하며, 틀어지고 얽히며, 탓하고 원망하며 살아간다. 각자가 자신의 우주를 들여다볼 용기를 낼 때 비로소 서로의 우주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우주는 어우러지기 시작한다. 책을 처음 읽을 땐 작가의 가치관/세계관과 부딪히는 부분들 때문에 그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다. (사실 취향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그다지 큰 여운이나 감흥을 얻진 못했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작가는 이제야 자신의 우주를 들여다볼 용기를 냈으며, 단지 첫걸음을 뗀 아이와도 같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 라는 우주를.’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 대개의 경우 우리의 우주는 서로 어우러지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 라는 우주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들여다볼 때, 그제야 우리의 우주는 어우러져 그 속의 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어우러지지 않는 우주 |작성자 한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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