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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장인최씨 Jun 27. 2016

첫 걸음, 따뜻한 기도

워홀러 Bernard 의 홀로서기

  호주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취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40만 원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고 지정된 병원에서 엑스레이 검사를 받으면 비자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나도 호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축구와도 연관이 없고 마음을 먹으면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일을 선택했다. 하지만 뜻대로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절친한 친구가 다녀온 캐나다도 문을 두드려봤지만 당시 홍콩 국민들이 캐나다로 대량 이민 신청을 하는 바람에(아... 진짜...) 길이 막혔다. 갈길을 헤매다가 호주 시드니에 아버지께서 교회 주일학교 교사를 하실 적 제자 되는 형님께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계신다고 했다.

쿠알라 룸푸르 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중, 묘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호주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아서 뜨거웠던 2014년 7월 18일 김해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시드니로 날아갔다. 가던 도중 해프닝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비행기 한대가 격추됐는데 그게 말레이시아 항공이랬다. 공교롭게도 내가 타고 가던 비행기도 말레이시아 소속의 A 항공사였다. 쿠알라 룸푸르에서 환승을 하던 도중 메신저와 SNS를 통해 소식을 전했다. 걱정과 우려 섞인 반응들로 '난리'였다.

쿠알라 룸푸르에서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로 환승하기 위한 환승 카운터


  아마 제목이 어색하다고 생각할 테다. 그런데 '살아보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른 느낌이라 이렇게 제목을 잡았다. 쿠알라 룸푸르에서 시드니로 가는 데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퍼스 부근을 지나 호주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시드니로 가는 길이다. 호주의 중부지방에는 사막과 초원뿐이다.

  그나마 군데군데 주거지역으로 보이는 곳이 있으나 농업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이다. 집과 집의 거리가 멀어서 이웃이라고 하기엔 좀 어색하다.


  2014년 7월 18일 금요일 점심시간이 다돼서 시드니 국제공항에 발을 디뎠다. 2년이 다 되어 이 글을 적는데도 그 느낌은 생생하다. 꿉꿉하고 더웠던 한국에서 남반구의 겨울을 맞이한 시드니로 처음 왔을 때. 건조하고 바람이 꽤 많이 불었다. 시드니에서 자리를 잡고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던 형님께서는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리셨다. 둘째 딸과 함께 반갑게 맞아주셨다.


  차를 타고 정신없이 움직였다. 처음이었으니 어디가 어디인지도, 얼마나 걸렸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모든 게 낯설었고 신기하기만 했다. 처음 유심칩을 사기 위해 들렀던 쇼핑센터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영연방에는 에스프레소도, 아메리카노도, 카페라떼, 카페모카도 없었다. 대신 숏 블랙, 롱 블랙, 라테, 모카가 있었다. 


  이것저것 볼일을 마친 뒤 형님네 집으로 향했다. 집이 위치한 곳은 뉴 사우스 웨일스 주(이하 NSW)의 Suburb(Sub Urban 의 준말, 군 정도의 개념이라고 하면 되겠다.) 중 하나인 에핑이다. NSW 의 대표적인 교육지구 중 하나다. 오기 전 형님과 연락을 하면서 들었던 주소가 마냥 어색했는데 와서 보니 '아, 내가 외국에 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도착했다. 형수님과 형수님의 어머님께서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막내딸도 있었다. 기분이 묘하다. 내가 머물 방을 안내해주셨다. 들어가서 짐을 풀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정보를 확인하니 이제 시간이 기억난다. 오후 2시 24분. 호주에서 생활할 첫 번째 내 방의 사진을 찍은 시간이다.


잘 도착했다고 부모님께 안부를 전하기 위함이다. 짐을 막 풀어헤쳤더니 엉망이다.


  사진을 보니 아련하다. 피곤할 테니 눈 좀 붙이라고 하신다. 정신없이 잤다. 일어나니 저녁상이 준비되어 있다. 형님네 첫째 아들도 학교에 갔다가 와있었다. 밥을 먹기 전 첫째 아들이 기도를 하자고 한다. 기도 내용은 이랬다.


하나님, 오늘 은우, 할머니, 삼촌, 엄마, 은빈이 함께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할머니, 은우, 엄마, 삼촌, 은빈이 (순서가 뒤죽박죽) 밥 같이 먹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이 밥 먹고 건강하게 해주세요.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2년이 지나서 다시 봐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 당시 은성이(첫째 아들)는 호주 나이로 다섯 살이었다. 기도를 하면서 눈물이 울컥했다. 끝나고도 눈물이 올라오는 걸 참으며 따뜻한 밥과 곰국에 소금을 조금 넣고 밥을 말았다.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부끄럽게도 눈물이 좀 섞였지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밥을 다 먹고 잠시 담소를 나눈 뒤 씻고 잠을 청했다. 잠이 잘 안 온다. 뒤척거리다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두 번째로 외국에 나온 건데 1년이라는 시간을 혼자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밀려온다. 코끝이 찡해졌다. 애처럼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그렇게 첫째 날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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