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된 커피
유럽에 전파된 커피
극동 지역에 다녀온 유럽의 여행자들이 커피를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17세기에 커피가 유럽에 전해졌고 이후 금방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악마가 만든 쓴 맛”이라고 부르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615년 베니스에 커피가 전해졌을 때에는 그 지역 성직자들은 커피를 강하게 비난했다. 커피에 대한 뜨거운 논쟁은 포프 클레망 8세에게 중재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커피를 직접 마셔본 뒤 만족스러워했고 교황청의 허가를 내주며 논쟁을 종결했다.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커피 하우스는 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 등지에서 사회활동과 교류의 장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영국에서 커피하우스는 커피 한 잔에 1 페니를 지불하고 사회활동, 지식의 교류 등을 할 수 있어 ‘페니 대학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커피는 아침에 주로 마시는 음료인 맥주와 와인을 대체했다. 술 대신 커피를 마신 사람은 낮 시간에 활달한 모습을 보였고 당연히 업무의 능률도 증진됐다. (오늘날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된 것도 이것 때문이라 생각한다.)
17세기 중반, 런던에는 상인, 항해자, 중개업자 그리고 예술가로 북적이는 300개가 넘은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이러한 커피하우스는 많은 사업형태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자면, Lloyd’s of London 은 Edward Lloyd’s Coffee House에서 나온 것이다.
신대륙
1600년대 중반, 영국인에 의해 지금의 뉴욕인 뉴 암스테르담에 커피가 전해졌다.
커피하우스가 빠르게 성장했음에도 킹 조지 3세의 차에 대한 가혹한 세금정책이 시행된 1773년까지 차는 여전히 신대륙에서 선호하는 음료였다. 하지만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으로 인해 커피는 미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음료가 됐다.
“커피는 문명화된 나라에서 가장 선호하는 음료.”
– 토마스 제퍼슨
전 세계적 경작
커피가 점차적으로 확산되면서 아라비아 외부에서는 경쟁적으로 커피를 경작했다.
네덜란드에는 17세기 중후반이 돼서 커피묘목이 들어왔다. 그들은 인도에 커피나무를 처음 심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지금의 인도네시아인 자바의 섬 중 하나인 바타비아에서 성공적으로 경작했다.
커피 경작은 성공적이었고 네덜란드는 커피 무역에서 큰 성장을 보였다. 그리고 수마트라 섬과 셀레베스(인도네시아 동부의 큰 섬)까지 커피나무 경작을 확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