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를 좋아하게 된 순간들에 대하여

by 노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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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를 처음 좋아하게 된 계기는 어쩌면 아주 사소한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가기로 한 어느 날 누군가 위스키 한 병을 가져가자고 했고 그때 제가 사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병은 마트에서 골랐습니다. 특별한 기준은 없었습니다. 다만 조금 예뻐 보이고 가격도 아주 가볍지는 않은 것으로. 거기에 직장인이 되었으니 ‘좋은 술’을 한 번쯤 마셔보고 싶다는 마음을 더했던 것. 그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글렌모렌지 넥타도르

그렇게 고른 병이 당시 이름으로는 ‘글렌모렌지 넥타도르’, 지금의 이름으로는 ‘글렌모렌지 더 넥타 16년’이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위스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글렌모렌지라는 이름도 처음이었어요. 다만 평소 마시던 것보다 비싸니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만 있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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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마셔보니 확실히 달랐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차이가 위스키 자체 때문이었는지, 그날의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당시의 감각만은 분명합니다. 이전에 마셨던 술들은 향이 잠깐 스치고 지나간 뒤, 곧 알코올의 씁쓸함만 남았습니다. 도수가 센 술에 향을 덧붙인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그날 마신 위스키는 알코올이라는 인식이 거의 들지 않았습니다. 달콤하고 밝은 향들이 입안에서 천천히 이어졌죠. 한 잔을 마시는 동안 급하게 마실 이유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감각 자체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그날 이후 위스키는 저에게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술- 그 이상이 되었죠.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 위스키를 처음 마신다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병이 글렌모렌지 넥타도르입니다. 첫 잔의 경험을 실패로 만들지 않으며, 술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위스키를 좋아하게 된 순간이라기보다 위스키를 바라보고 대하는 저의 시선과 태도가 새로운 지평으로 펼쳐진 때에 더 가깝습니다.


부나하벤 12년

위스키를 조금 더 마시게 되면서 이전에는 달콤함으로만 인식되던 맛들이 그 이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단맛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결들이 있었고, 향과 맛이 단일하지 않다는 점이 점차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무렵 만난 위스키가 '부나하벤 12년'입니다.

부나하벤은 스코틀랜드 아일라 지역의 위스키입니다. 아일라라고 하면 보통 강한 피트 향을 떠올리게 되지만, 이 위스키는 피트가 거의 없는 셰리 위스키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이 위스키에는 분명한 바다의 인상이 남아 있습니다. 짭조름한 바닷바람, 해안선을 따라 퍼지는 공기 같은 감각입니다.

달콤함과는 다른 방향의 인상이었습니다. 입안에 남는 맛보다는, 마신 뒤에 떠오르는 풍경에 가까웠습니다. 위스키가 단순히 향과 맛의 조합이 아니라, 장소의 기억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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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나하벤 12년은 '단짠'이라기보다 '짠단'에 가깝습니다. 처음에는 짠맛이 들어오고, 끝에서는 셰리의 달콤함이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맛이 빈틈없이 차 있다는 표현이 잘 어울립니다. 위스키가 맛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한 사람에게 특히 만족도가 높습니다.


스프링뱅크 15년

캠벨타운의 위스키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이 있습니다. 스프링뱅크 15년입니다. 스프링뱅크는 생산량이 많지 않고, 그만큼 쉽게 접하기 어려운 위스키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격 또한 가볍지 않지만, 마셔보면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되는 완성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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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스키에서는 셰리의 인상이 먼저 드러납니다. 이후 아주 은은한 피트가 뒤에서 조용히 받쳐줍니다. 피트가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전체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에 머뭅니다. 맛의 방향이 분명하지만 과하지 않고 각 요소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습니다.

숙성 연수가 높다고 해서 언제나 더 나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선택지 안에서 완성도라는 기준으로 보았을 때, 스프링뱅크는 매우 설득력 있는 위스키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함보다는 균형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믹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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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위스키 가운데 제가 가장 신뢰하는 이름은 '믹터스'입니다. 버번과 라이 위스키는 스파이시한 인상이 강한 경우가 많지만 믹터스는 비교적 부드럽고 달콤한 방향을 일관되게 유지합니다. 과도하게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풍미의 밀도를 놓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이 깊었던 병은 '믹터스 토스티드 배럴 라이'입니다. 도수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다가오지 않고, 농축된 풍미가 먼저 느껴집니다. 다크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무겁고 깊은 단맛 위로, 라이 위스키 특유의 허브 향이 길게 이어집니다. 한 잔만으로도 기억에 남기 충분합니다.


러셀 리저브 15년

조금 특별한 버번으로는 ‘러셀 리저브 15년’을 빼놓기 어렵습니다. 2024년을 대표하는 버번 위스키로 출시되며 빠르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버번 위스키에서 15년 숙성은 상당히 긴 시간에 해당합니다. 나무의 존재감이 앞서기 쉬운 조건이지만, 이 위스키는 그 지점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숙성의 깊이는 분명하게 느껴지되 과도하게 치닫지 않습니다.

카라멜과 바닐라, 스파이스로 이루어진 버번의 기본 골격은 유지되면서 코코아를 떠올리게 하는 씁쓸한 단맛이 길게 남습니다. 전형적인 버번의 범주에 완전히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만큼 오랜 시간의 특징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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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토모어

피트 위스키를 이야기할 때 극단에 가까운 이름이 있습니다. ‘옥토모어’입니다.

이 위스키는 설명보다 경험이 먼저입니다. 피트의 인상이 입안 전체에 강하게 남지만 질감은 놀라울 만큼 부드럽습니다.

한 모금을 마시면 먼저 깊고 진한 스모키 향이 입안 전체를 감싸고, 곧이어 바닐라와 달콤한 과일 향이 어우러집니다. 마치 구수한 오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피트를 좋아한다면 언젠가는 꼭 마셔보게 되는 위스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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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모어 18년 딥 앤 컴플렉스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위스키는 '보모어 18년 딥 앤 컴플렉스(Deep & Complex)'입니다. 이 위스키에서는 가죽을 연상시키는 향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고급 가죽 소파에 앉아 있는 듯한 감각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죽 향 위로 셰리 캐스크에서 비롯된 과일의 달콤함이 피트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집니다. 18년의 숙성을 거치며 피트는 한층 부드러워졌고, 그 결과 피트 위스키이면서도 순간적으로 셰리 위스키처럼 느껴지는 지점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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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일곱 병은 단지 위스키 추천 목록이라기보다 제가 위스키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조금씩 변해 온 취향을 담은 개인적인 시간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달게 느껴질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강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지금까지의 제가 남긴, 저의 위스키 노트입니다.

위스키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위스키를 마시며 무엇을 느꼈는지, 어떤 순간에 어떤 향이 기억에 남았는지, 그 경험들이 쌓여 취향이 됩니다. 취향은 비교를 통해 만들어지기보다는 각자의 경험 속에서 천천히 형성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위의 일곱 병을 그대로 권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대신, 당신만의 위스키 노트를 만들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처음 고른 한 병, 의외로 오래 기억에 남은 한 잔, 다시는 찾지 않을 것 같은 경험까지, 그 모든 순간이 노트의 일부가 됩니다.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기억에 쌓아가게 되는 것이 위스키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위스키를 설명하기보다는 저의 경험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제 당신의 위스키 노트를 시작할 차례입니다.


이 글은 출간 예정인 책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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