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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Sep 10. 2020

남편, 내가 당신을 몰랐구나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우리 남편은 굉장히 차분한 인격을 지녔다.

쉽게 욱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남편이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을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내가 만약 생활기록부에 남편에 대해 써야 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쓸 것이다.


"품행이 단정하고 성실하여 약속과 규칙을 잘 지킴. 성격이 차분해 온순하며 학습태도가 우수함"




남편은 언제나 차분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가 고열로 실신 직전이었을 때도, 나로 인해 의료진을 찾는 기내방송을 했음에도 우리 남편은 침착했다. 응급환자라며 공항에서 직원이 와 나를 이송해 갈 때에도 남편은 떨림 하나 없었다. 그저 조용히 동행할 뿐이었다.

응급실에 도착 후 남편은 여유롭게 말했다. "자기야, 우리 비행기에서 첫 번째로 나왔어. 이런 적 처음이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족분만실에서 아이를 낳기 위해 내가 사투를 벌일 때 남편은 커튼 뒤 대기의자에 앉아있었다. 아이가 나오면 남편이 탯줄을 자를 예정이었다.

드디어 아이가 나오고 간호사가 남편을 불렀다. "아버님~ 축하드립니다. 아이 잘 나왔어요. 탯줄 자르셔야 하니까 나오세요."

그 말에 남편은 담담히 걸어 나와 의사가 자르라고 하는 탯줄 부분을 한 번에 정확히 자른 다음 조용히 말했다.

"저는 다시 커튼 뒤로 가 될까요?"

그런 남편을 잡은 건 간호사였다. "아버님~~ 아기랑 기념사진이라도 찍고 가세요~~~~"


이후 조리원에서 나는 엄청난 양의 자궁 출혈을 했다. 순간 옷이 피로 물들었고 바닥도 피로 흥건해졌다. 남편은 곧바로 인터폰으로 카운터에 상황을 알렸고 무슨 일인가 와본 조리원 선생님들은 바닥의 피를 보고 사색이 됐다. 선생님 한 명은 달려가 병원에 알리고 두 명은 손을 덜덜 떨며 피에 젖은 내 옷을 갈아입혔다. 동기들은 밖에서 내 방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조리원에서 정신이 멀쩡 한 건 남편뿐이었다. 병원 구급차가 늦게 올 것 같다는 말에 남편은 피에 젖은 나를 태우고 차분히 병원으로 향했다.




남편의 성격이 차분한 것은 이래저래 좋은 일이었다.

서로 같이 화낼 일도 없었고 덕분에 부부싸움도 크게 해 본 적이 없다. 아이가 태어난 후 둘 다 예민해져 티격태격하는 게 다였다.

조금은 호들갑스러운 내 성격을 조용한 남편이 잡아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암에 걸리고 보니... 남편의 반응이 너무 서운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암인데...

나를 끌어안고 울고불고 '내가 널 꼭 살릴 거야' 이런 드라마틱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우리 같이 잘 견뎌보자. 너한테는 가족이 있으니까." 같은 따뜻한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암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남편은 그저 "고치면 되지." 아니면 "뭘 그렇게 걱정을 해.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해." 이런 말 뿐이었다.


나는 하루하루 피가 말라가는데, 여전히 잘 먹고 일상생활 잘하는 남편이 야속했다.


'걱정은 하는 걸까. 내가 암환자인 게 전혀 와 닿지 않나? 나는 이렇게 불안한데 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나는 남편한테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대로 생활하는 남편을 보며 나는 질문에 질문을 쌓아갔다.


그리고 이 질문의 답은 내가 정밀 검사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알 수 있었다.




퇴원을 하고 나는 시댁으로 갔다.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아이는 나를 보면서도 달려오거나 반가워하지 않았다. 데면데면... 서먹서먹... 본체 만 체였다. 어머님과 나는 아이의 그런 반응에 당황했지만, 일주일 동안 떨어져 있어서 그런가 보다 하며 웃어넘겼고 아이와 시간을 조금 가진 뒤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잘 놀았어? 밥 잘 먹었어? 어린이집 잘 다녀왔고? 엄마 안 보고 싶었어? 등등 온갖 질문을 해대고 있었는데 아빠랑 잘 놀았냐는 질문에 아이가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아빠는 술 먹었어. 그래서 나는 할머니랑 놀았어."


술? 남편은 아이를 보느라 계속 시댁에서 지냈다. 어른들 앞에서 술 마실 사람이 아닌데...

어머님께 가서 물었다.

"어머님. 남편 술 마셨어요? 애가 그러던데..."


그러자 어머님은 화가 난 듯 몹시 답답해하며 말했다. 

"아이고. 니 남편 술 엄청 마셨어!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대는지... 퇴근하면 식탁에 앉아서 술을 아주! 소주를 안주도 없이 마시더라?~ 뭐 하는 거래 그게?... 그래서 내가 너라도 잘 버텨야지 뭐 하는 거냐고 했는데도 안 들어. 매일 그렇게 혼자 마셔대는데 말리지도 못했다."



아... 

무언가 강하게 심장을 치는 것 같았다.

그제야 알았다.

남편이...

우리 남편이... 참 많이 힘들어하는구나.

많이 힘들었구나.

내 앞에서 잘도 버텼구나.



몰랐다. 남편이 힘들어할 줄은. 내가 다쳐도, 본인이 다쳐도, 아이가 다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그 이가 사실은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었다.


남편의 뒷이야기를 들은 나는 마음이 꽤나 무거웠다.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섞였다. 미안함... 고마움... 그리고 묵직한 무언가가 섞여 내 마음을 짓눌렀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남편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띠리리 기계음이 울리고 현관이 밝아지자 나와 아이는 남편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갑작스럽게 나와 아이에게 안긴 남편은 왜 이러냐며 저리 가라고, 누가 보면 전쟁터에서 돌아온 줄 알겠다고 입을 나불거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포옹을 풀지 않은 채 그냥 웃었다.


이후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에게 나는 히죽이며 물었다. 

"어머님 댁에서 술 마셨다며? 내가 아파서 걱정됐어? 심란해? 그래서 술 마셨어?"

그랬더니 남편이 쳇 하며 한마디를 뱉어냈다. 

"냉장고에 보이길래 그냥 마신 거거든?"

그리고는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저 사람도 참... 한결같구나.




남편이 흔들렸다면 나도 흔들렸을 것이다. 남편이 무너졌다면 나도 무너졌을 것이다. 이제 알겠다. 

남편이 우리의 일상을 악착같이 지켜내고 있었음을.

우리의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많은 아픔을 숨기고 있었음을.


이제 알겠다. 

남편아.

내가 그동안 당신을 몰랐구나. 그래도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공유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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