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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Sep 11. 2020

아이와 함께 이 시간을 보내자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수술하기까지 한 달이 남았다. 

한 달 후 내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술 후 회복이 어느 정도로 걸릴지, 회복이 되더라도 항암을 하게 될지, 죽을지 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내게 주어진 한 달은 너무나 소중했다. 




퇴원 후 집에 왔을 때 아이는 내게 달려오지도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저 멀뚱멀뚱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자신을 돌봐주던 할머니에게로 갔다. 나와 어머님은 동그라진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입원이 잦았던 엄마를 둔 아이의 안타까운 의젓함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이는 내게 데면데면했다. 마치 '난 엄마가 필요하지 않았어.'라고 말하듯이...

5살 아이가 나를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앞으로 내가 없더라도 아이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뜻했다. 내가 내 엄마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팠다. 아이가 나를 잊는다 생각하면, 아이의 추억 속에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아팠다. 

그래서 아이와 최대한 많은 추억을 쌓고 싶었다. 행여 내가 없어지더라도 나를 기억할 무언가가 많기를 바랬으니까.

남들이 들으면 비웃었을까... 하지만 나는 간절했다. '내 아이가 나를 기억해주기를...'


엄마에게 등진 채 장난감을 찾는 아이를 보며 남편에게 말했다. 

"오빠. 나 수술받고 나면 몇 달은 못 돌아다닐 것 같은데 지금 날씨 좋으니까 애랑 여행이나 좀 다닐까? 한 달 남았으니까 주말에만 다녀도 몇 번 다닐 수 있잖아."


남편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거냐 걱정했지만 앞으로 당분간 여행을 다니지 못할 거라는 말에는 동의했다.

따라서 우리는 주말마다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고 가고 싶은 여행지를 적어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샤워를 하고나와 소파에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런데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와있었다. 모르는 번호 두 개, 남편 번호 4개... 그리고 남편의 카톡.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급히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은 내 전화를 받자마자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냐며 다짜고짜 성질을 부렸고

무슨 일이냐 묻는 내게 살짝 고무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병원에서 전화 왔었어. 네가 안 받으니까 나한테 했더라. 수술 취소된 게 있어서 거기 들어갈 수 있대! 그래서 열흘 뒤에 수술받기로 했어."


"열흘 뒤? 그렇게 일찍?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는데... 너무 이른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하루라도 빨리 수술받아야지! 아무튼 열흘 뒤에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나 회사니까 일단 나중에 얘기해. 그나저나 내가 전화 안 받았음 어쩔 뻔했어. 기회 날아갈뻔 했잖아! 암튼 끊어."


얼떨결에 수술이 당겨졌다. 이럴 수도 있구나. 이렇게 당겨질 수도 있구나. 근데 내가.. 수술받을 준비가 됐던가?

 



주말이 되자마자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시간이 없었다. 한 달이란 시간이 주어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사라졌다. 마음이 급했다. 하루라도 더 노력하고 싶었다. 아이가 나를 잊지 않도록.

아이와 함께 넓은 곳으로 가 신나게 배도 타고 연도 날렸다. 사찰도 방문하여 종소리를 들으며 가족의 건강을 빌고 또 빌었다. 남편은 종교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날만큼은 소원 종이를 사서 사찰 나무에 걸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평일에도 그다음 주말에도. 나는 아이와 여행을 다녔다. 주말엔 남편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고 평일엔 아이와 둘이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검사를 받느라 체력이 약해진 상태였고 걷는 것도 힘들었지만 어디서 그리 힘이 충전되는지 매일 아이와 돌아다녔다. 아이와 단 둘이 7시간 동안 피크닉을 했고 집에 오는 길에 아이가 힘들다 하면 앞으로 가방을 멘 후 아이를 업고 지하철을 탔다.

나는... 힘을 쥐어 짜내며 처절하게, 아이 마음에 나를 남기려 발버둥 쳤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 아이가 갖지 못할 몇 달을 위해 나는 열흘 동안 철인이 되었다. 입원 이틀 전까지 아이와 사방을 돌아다녔다. 수술 전 병이 나면 안 되기에 집에 오면 영양제를 털어 넣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또다시 아이에게 말했다. "오늘은 엄마랑 어디로 갈까?"




남들에게는 당연한 하루하루가, 가만히 있어도 추억이 쌓이는 그 하루하루가 내게는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기에... 나는 오늘, 온 힘을 다해 추억을 쌓았다.


아이는 알 턱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당분간 올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이에게 오늘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라고, 당분간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하지 못했다. '엄마 많이 기억해줄거지?' 묻지도 못했다. 5살이니 알아듣지도 못할 나이였다. 대신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우리 아들, 오늘도 엄마랑 즐겁게 보내자!" 


'그리고 엄마와 함께한 시간을 기억해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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