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직해? 라는 말이 너무 싫은 습관적 이직러
갑자기 나의 선임은 차 한 잔 하자며, 라운지로 나를 불렀다.
워낙 자주 티타임을 가져왔기에 별 다른 걱정이나 의심 없이 나선 나에게, 그는 '내가 이제 사업팀으로 가게 됐어' 라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청천벽력이었다. 입사한 지 이제 3개월차인 풋내기인 나를 두고 어디로 떠나신다고요···?
지난 편에서 이야기했듯, 그는 16년을 한 회사 한 팀에서 일해온 베테랑이었다. 진급 적체가 심각한 우리나라의 대기업에서 그는 아마 새로운 길에 대해 오랜 고민을 해왔을 것이다. 그게 왜 하필 저 오고 나서인데요ㅠ 라는 억울함은 넣어두고 앞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에 대해 덜컥 겁이 났다. 그는 나에게 한 달의 유예 기간(?)을 주었다. 한 달 동안 천천히 인수인계하고 내가 커버하지 않았던 업무를 함께 봐주고 갈 것이라고. 그 한 달이라는 시간이 주는 안도감이 잠시 나를 편하게 만들었다. 그날 곧장 동기들을 만나 술을 마신 걸 보면.
그 이후 나는 어떻게 됐을까? 사수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지난 자료들도 들여다 보고, 점심시간에도 전화 받아가며 바삐 시간을 보냈다. 차장급의 업무를 하면서 나는 동시에 막내 일도 해야 했고, 홍보팀이라는 이유로 이곳저곳에서의 막연한 문의 전화, 메일, 내 후임을 뽑기 위한 인사 업무까지... 매일매일 새로운 일을 쳐내가면서 나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고 그렇게 자기 평가를 가장한 자기 위로를 일삼으며.
2-3개월 지났을까, 줄곧 눌러왔던 억울함이 언젠가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너가 잘하잖아'라는 허울 좋은 이유에 감춰진 '진급 적체'라는 구조적인 문제. 이 때문에 나보다 고연차의 선배는 뽑지 않겠다는 팀장님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고 나는 많은 업무량에도 애써 잘하는 척, 전혀 무리되지 않는 척 꾸역꾸역 업무를 처리했다. 후배를 뽑아준다고 했지만 나보다 저연차인 친구는 내가 하던 업무 중에서 막내일(브랜드 굿즈를 관리하는 등)밖에 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에... 점차 나는 번아웃으로 향해 갔다. 그 사이 사실 많은 일이 있었다. 그 부분까지 언급하게 되면 내가 너무 특정될 것 같아서, 또 그 사람을 너무 비난하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아서 생략하겠지만 사실 꽤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내 업무, 내 성과와 무관해서 더 힘들었다.
건설사라서 분위기 험악한 거 아니야? 라는 질문을 줄곧 받았었는데 사실 그렇진 않았다. 저연차 대리인 나를 사내 유일한 전문가처럼 대우해주시는 분들도 있었고, 나의 부단한 노력을 믿고 지지해주시는 팀원들도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업무가 브랜드 마케팅이고, 그것이 곧 집값과 직결되는 우리나라의 주택 브랜드 특성상 혼자 으쌰으쌰 해나가는 정도로는 업무적인 부담이 컸다. 결국 이 일은 차장급이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응석 섞인 무력감이 지속되었다.
그 무렵, 대기업 IT 회사를 다니는 아는 선배가 브랜드 PR(특히, 소셜 중심) 업무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진짜 이직에 진절머리를 느끼던 나였지만 지금이 아니면 잘못 발 들인 이 업계를 탈출하지 못할 것이란 불안감이 들었다. IT업계는 계속 가고 싶었던 곳이고, 특히 마케팅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두 번쯤은 꿈꿀 만한 곳이니까. 지금 회사로 옮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또 옮기는 게 맞을까? 이런 나를 새로운 회사로 가게 된 들 뽑아줄까? 나라도 안 뽑겠다.
그런데, 뽑혔다. 말이 돼? 내가 꿈꾸던 바로 그 자리에 갑작스럽게 가게 되었다. 준비하는 기간은 피도 말랐고 회사 일도 망망대해 같이 느껴지는 나날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뽑혔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다, 그 회사로 갈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이직을 하게 되었다.
이직, 진짜 지겹다. 그런데 어느덧 내가 직전 회사에서 일했던 기간보다 지금 회사에서의 시간이 더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이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실제로 업무량으로 본다면 건설회사에서의 업무량이 훨씬 많았고 그만큼의 성취감도 따랐겠지만, 지금이 나는 좋다. 왜냐고? 1) 보여지기 위한 불필요한 문서 작업이 없고 2) 자유로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수평적인 문화가 있고 3) 서로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있으니까. 그 외에도 말할 게 많은데, 그건 다른 포스팅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물론, 단점도 있다. 전만큼 소속감이 없기도 하고, 또 치열하게 부딪혀가며 성장하는 느낌은 확실히 덜하다.
나는 이쯤에서 내 이력서 업데이트를 그만하고 싶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있는 자리에서 최대한 오래 남고 싶다. 브랜드 마케팅을 하는 사람에게 또 하나 가장 중요한 자산은 브랜드 히스토리다. 이곳에서 내 자산을 쌓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다. 언제 어떤 계기로 내가 이 시리즈의 5편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어느덧 제목의 '5년차, 연봉 2배'가 아닌 '6년차, 연봉 2.5배'가 되었고 그만큼 나는 만족도도 높아졌고 동시에 정착에 대한 욕심도 커졌다.
이 땅의 모든 저연차 저연봉자(나의 5-6년 전 모습)인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커리어는 내 몫이고 내 행복과 직결되는 부분이니까 과감하게 남의 눈을 쌩까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직의 사유가 돈 때문이든 혹은 보기 싫은 팀 사람이든, 아니면 업무 만족도가 낮아서이든 그 어떤 이유든간에 그걸 견뎌야 하는 사람도, 책임져야 하는 사람도 '나'니까. 그러니 프로이직러니 뭐니 하며 내 커리어를 한 단어로 명명해버리는 사람들에게서 한발짝 떨어져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무엇인지 과감히 결정 내리라고 나는 말해주고 싶다. 이건 내가 와본 길이라서, 내가 해본 것이라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후회도 내 몫이니까, 하고 싶은 대로 질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