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 좋은 사람이었고
기계 장치에 묶여있지도 않았다

알베르 카뮈의「이방인」을 읽고

by 카인말러


초등학교 시절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을 때 엄마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너보다 힘든 애들도 많아." 엄마는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우리 집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어린 마음에 그 말이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나보다 힘든 애들이야 많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니까.


가정 형편이 좀 나아지고, 험난했던 대학교 입시도 끝나니 그제야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돌아보니 내 짧은 인생이 온통 운이었다. 만일 학교 교사인 엄마를 두지 않았다면 나는 특목고에 입학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미리 준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고등학교에서 정말로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들었을 것이다.


이 글 한 편에 나는 "우리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싶다. 좀 더 친근한 표현을 쓰자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해보고 싶다. 물론 나 한 명의 삶을 챙기기도 버거운 시대에, 독자와 사회적 의무에 대해 논하는 것이 그리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남에게까지 그 사랑을 확장할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내 생각에 공감이 가게끔, 또한 독자들의 삶에 와닿게끔 글을 써보려 노력하겠다.


나는 내가 삶에서 경험한 행운은 다 이해하고 있는 줄 알았다. 좋은 친구들을 만난 것에 대해서도, 부모 잘 만나서 좋은 교육을 받은 것도 충분히 감사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나서는 정말로 내가 다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많은 걸 받아 온 사람의 입장에서 회의감이 들었다. 아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특혜이고 특권이라는 생각은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진심으로 느꼈다. 「이방인」은 나를 가장 많이 반성하게 한 책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 알베르 카뮈 지음, 「이방인」, 13쪽


소설은 주인공 뫼르소가 자신의 어머니가 양로원에서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으며 시작한다. 「이방인」의 첫 문장은 모든 소설의 첫 문장들 중 가장 유명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첫 문장이다. 엄마가 죽었는데 언제 죽었는지를 모르다니...


사실 주인공인 뫼르소는 썩 쉽게 이해 가는 성격은 아니다. 그는 어머니가 죽자 양로원으로 장례를 치르러 가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영안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장례 하루 뒤에 그는 곧장 해수욕장으로 놀러 갔다가 옛 직장 동료였던 마리 카르도나를 만난다. 마리 카르도나와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그렇고 그런, 요즘 말로 '썸'의 관계였다. 수영이 끝나고 뫼르소는 입고 온 상복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상복을 보고 마리가 놀라자 뫼르소는 어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음을 알린다. 마리는 고작 하루가 지났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지만, 그렇다고 뫼르소에게 뭐라 말을 꺼내지는 않는다.


조금 뒤에 마리는 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닌 것 같다고 나는 대답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점심을 준비하면서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또 웃어 대서 나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 알베르 카뮈 지음, 「이방인」, 51쪽


함께 밤을 보낸 뫼르소에게 마리는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는다. 그러나 뫼르소는 이에 대한 답으로 아닌 것 같다고 답한다. 뫼르소는 조금 무뚝뚝하고, 소위 감정이라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한다. 어머니의 부고에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지만, 굳이 휴가를 내서 80 킬로미터 떨어진 어머니의 양로원에 가야 한다는 피로감에 비하면 턱 없이 작은 감정이었다. 그리고 마리에 대해서도 자신은 욕정을 느낄 뿐,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사실 뫼르소는 거짓말을 못 할 뿐이다. 그는 느끼지 못하는 감정에 대해 느낀다고 말하지도 않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뫼르소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다. 오히려 그런 점이 뫼르소의 매력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성격은 법정에서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뫼르소는 살인죄로 법정에 선다. 뫼르소와 그의 친구 레몽을 한 아랍인 무리가 미행했는데, 뫼르소가 아랍인을 향해 권총을 쏜 것이다. 아랍인 쪽이 먼저 칼을 빼들었고, 그 칼에 반사된 햇빛에 뫼르소는 우발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물론 살인은 그 자체로 지탄받을 일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핵심 장소는 '범죄 현장'이 아니라 '법정'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든 아니든, 법정 앞에 서면 누구나 자신을 변호할 권리가 있는데, 뫼르소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게 핵심이다. 재판관과 배심원은 이미 '유죄 추정의 원칙'을 깔고 간 채로 재판에 참여했고, 뫼르소는 그런 분위기에서 자신을 변호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심지어, 재판장은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뫼르소의 어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재판장은 나에게, 이제부터 겉보기에는 나의 사건과 무관한 것 같지만, 아마도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들을 다루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또 엄마 이야기를 하려는 것임을 알아차렸고 동시에 그것이 내게는 얼마나 지겨운 일인가를 느꼈다.

- 알베르 카뮈 지음, 「이방인」, 108쪽


재판에 섰더니 재판장과 검사 측은 사건 이야기는 안 하고 뫼르소의 어머니와 장례식 이야기만 꺼낸다.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서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냈다느니, 장례식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등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재판장은 그런 것들을 근거로 뫼르소가 '성격상 충분히 살인을 저지를만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뫼르소도 어머니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사건과 아무 관계없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그 이야기에 휩쓸려 갑론을박하지 않는다. 이미 법정에 서 있는 사람들 모두가, 심지어 배심원들조차 사건 자체보다는 어머니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결국 자신에 대한 제대로 된 항변을 못 한 채 형이 선고된다. 기껏 범죄 사실에 대해 '햇빛 때문에 우발적으로 저질렀다'고 말했지만, 그 말로 인해 배심원들은 뫼르소가 기분 따라 살인을 저지른다고 오해하게 된다. 결국 재판에 뫼르소라는 사람 자체는 무시된 채,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재판장, 이 셋만이 주도해나가는 꼴이 났다. 범죄 당사자는 아무 말 못 하고 소위 '법 전문가'들끼리만 갑론을박이 오고 갔다.


나는 이쯤까지 읽었을 때, 뫼르소가 자신을 변호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 뫼르소의 책임도 분명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소설 속 재판 시스템이, 당사자를 제외해놓고 진행되었고, 또한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어머니의 장례'를 근거로 범죄자를 비판한 것은 사법 시스템의 문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을 변호하려 노력하지도 않고, 자신을 변호할 방법을 몰랐던 것은 결국 뫼르소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독자도 이런 내 생각에 동의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한 것에 관해 반성하고 있다. 변호하지 못한 게 뫼르소의 책임이라고 말한 것은 어려서부터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아온 나의 위선적인 생각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전에 집행에 관한 이야기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을 자책했다. (중략) 전문적인 서적들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싶어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한 책들에서라면 탈출의 이야기들(감형이나 변호에 관한 이야기들 - 글쓴이)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지음, 「이방인」, 131-132쪽


재판이 끝나자 뫼르소는 그 자신을 책망한다. 자신이 그동안 법정에 서보는 것을 상상도 해본 적이 없고, 어떻게 자신을 변호해야 할 지에 관한 책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그러나 이내 그는 그게 자신의 탓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러한 호사를 나에게 허락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나에게 그런 호사를 금지하고 있었으니, 기계 장치가 나를 다시 붙잡는 것이었다.

- 알베르 카뮈 지음, 「이방인」, 132쪽


"기계 장치가 나를 다시 붙잡는 것이었다." 나는 이 문장이 작품 전체를 꿰뚫는 한마디라고 생각한다. 기계 장치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주인공 뫼르소의 직업은 그저 평범한 직장인 정도로 나오지, 구체적으로 공장에서 일한다느니 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직장이 공장이든 아니든, 나는 이 '기계 장치'를 뫼르소 본인을 둘러싼 생활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가 법정에서 변론을 하지 못했던 것은, 그가 법률이나 사회적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관심을 가질 생활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제야 나는 뫼르소의 책임, 다시 말해 '개인의 책임'을 운운하며 책을 읽은 것을 후회했다. 그것은 특권을 가진 나의 무책임한 생각이었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하루에도 몇 시간씩 여유 시간이 있고, 법률책이나 정치 책은 교양서 수준 정도는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뫼르소에게 '그런 호사는 금지'되어있었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운'을 겪으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운이 많은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운이 따라주지 못한 경우도 있다. 가장 와닿는 예는 수능 시험일 것이다. 한 문제 차이로 대학이 왔다 갔다하고, 심지어 학과마다 경쟁률도 매년 천차만별이다. 친구들 중에는 한 문제 차이로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한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나는 많은 운이 따라준 편이었고,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그럴 여유가 되는 '운' 덕분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재분배"라는 말의 뜻을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재분배란, 내가 내 인생에서 받은 특혜와 운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개인의 책임 운운하던 나 자신을 버리기로 했다.


물론 뫼르소가 법정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법률적 지식이 있어야 법정에서 발언권을 얻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의 문제다. 다시 말해 뫼르소가 아무런 법률적 지식이 없어도, 발언을 하고 싶다면 법정에서 얼마든지 말을 꺼낼 권리는 보장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작품 속 문제는 그럴 권리가 보장되어 있어도 그럴 권리를 사용할 환경이 안 된다는 데에 있다.


나대로의 걱정거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나도 한마디 참견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변호사는 "가만있어요, 그편이 당신 사건에 더 유리해요."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 알베르 카뮈 지음, 「이방인」, 120쪽


변호사는 뫼르소의 발언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 같아도 법정 앞에 서서 변호사가 가만있으라고 말하면 가만있을 것 같았다. 형량과 인생이 걸린 문제에 혹여나 내가 내 무덤을 파는 꼴은 만들기 싫으니 말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같은 입장이어도 발언을 못 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뫼르소 탓을 할 수 있을까. 결국 뫼르소는 그렇게 아무런 감형도 얻지 못한 채 형벌이 집행된다.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 알베르 카뮈 지음, 「이방인」, 14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