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영웅이 되지 않고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문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들은 다 이 책이 그렇게 재밌다던데, 나는 1000페이지를 읽는 내내 헉헉거렸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 계속 다시 책 속을 들여다봤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세상을 바꾸려면 반드시 영웅이 되어야 하는 걸까? 영웅의 기준은 뭐지?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나한테 이런 질문들을 던져 놓고 도망가버렸다.
소설 「죄와 벌」의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하지만 대학 교육을 받은 소위 '지식인' 계층이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통해 자신의 여동생 '두냐'의 약혼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두냐의 성격을 너무 잘 알았다. 두냐가 자신과 가족을 가난에서 벗어나게끔 하려고, 사랑하지도 않는 부자 신사와 결혼하려는 것을 그는 단번에 눈치 챘다. 어떻게 하면 돈이 생길까. 어떻게 하면 두냐의 결혼을 막을 수 있을까. 때마침 라스콜니코프는 전당포에 맡겨놓은 자신의 고급 시계가 생각났다. '그래, 그 시계면 어느 정도 돈이 될테지.' 라스콜니코프는 전당포의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예전부터 알료나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알료나는 돈만 밝히며 자신의 여동생 리자베타를 부려먹는 '사회악'이다. 가난한 형편이라는 개인적 이유와 더불어, '악당 처치'라는 사회적 동기까지 생긴 터였다.
라스콜니코프는 하숙집의 도끼를 챙겨 곧장 전당포로 향한다. 도끼로 내리찍은 알료나의 머리 아래로 피가 흐르고 그녀의 새하얀 두개골이 보인다. 하필 그때 이 범죄 현장을 리자베타가 발견했고, 라스콜니코프는 의도치 않게 리자베타까지 죽이게 된다. 리자베타를 죽이면서 그는 '우발적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사실 라스콜니코프는 이미 반년 전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논문을 작성했다.
"비범한 사람은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온갖 방식으로 법률을 뛰어넘을 권리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비범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작중 예심 판사 포르피리가 라스콜리니코프의 논문을 정리하여 설명한 내용)
"다시 말해 공식적인 권리가 아니라 그 스스로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어떤 장애물을 뛰어넘을 권리를 갖는다고 암시했음을 따름이며, 더욱이 오로지 자신의 사상(때로는 전 인류에게 구원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요)을 실행하는 데 그것이 요구될 경우에만 그렇다는 겁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죄와 벌」, 민음사, 465쪽
죽이는 일은 쉬웠지만 죽인 후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후유증과 불안감에 시달리며 며칠을 침대에서 끙끙 앓는다. 그리고 결국, 죄책감을 못 이겨 에심판사 포르피리에게 자백하고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이 (시기적으로 한참 전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의 축소판으로 생각한다. 라스콜니코프의 사상에도 엄연히 '명분'은 있다. 그는 공리주의적인 이유에서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이의 재산을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실 착하고 마음이 여리다. 퇴역 군인이자 가난뱅이인 마르멜라도프가 죽자 그의 유족에게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빠듯한 생활비를 전부 기부하며 장례비를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람이 살인을 감행했을까? 때로 '사상'이 사람을 위험한 구석까지 몰아넣는다.
소설 속 그의 모습에는 지난 세기 수많은 유대인을 죽인 아돌프 히틀러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직접' 살인(학살)을 계획하고 그것을 감행했으니 말이다. 「죄와 벌」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게 1866년이니, 어떻게 보면 도스토예프스키가 70년 이후의 일을 예측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도스토예프스키도 히틀러가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죽일거라 생각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라스콜니코프와 히틀러 모두 좋은 결말을 맞지는 않았다. 한쪽은 시베리아 한복판의 감옥에 갇혔고, 다른 한쪽은 베를린 한복판에서 자신의 머리통에 총구를 겨눴다. 잘못된 사상이 두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리고, 동시에 여럿을 죽게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악당이 되겠다"는 삐뚤어진 마음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히틀러는 자기 자신을 게르만족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영웅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사람마다 영웅에 대한 기준이 다르니 잘못된 기준을 가지면 악당이 될 수도 있는거고, 뭐가 옳냐 뭐가 그르냐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 그래서 나는 '영웅'이라는 단어가 오히려 무섭다.
사실 라스콜니코프의 논문은 '초인 사상'에 대한 내용이다. 현대인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초인 사상'이 잘못된 사상임을 깨달았다. 특히 우리나라는 한 '초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범죄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이 사실이 피부로 와닿을 수밖에 없다. 모든 권리가 주어지는 초인, 그런데 늘 초인은 좋은 결말을 맞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사회를 바꾸고 싶은 사람들은 많을텐데, 영웅이 되려고 노력해서는 안되는 것이라면, 영웅이 경우에 따라 악당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사회를 바꿔야 맞는걸까? 새로운 사상, 새로운 사고방식을 찾아야 한다.
수많은 소위 '지식인'이 그 자신만의 이상 사회를 머릿속에서 그리며 그것을 사회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죄와 벌의 현대적 해석」의 작가 조주관 교수님은 라스콜니코프의 문제를 '지식인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초인 사상이 소설 속에서 보기 좋게 실패한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20세기에는 히틀러와 스탈린 등 강한 집권자가 차례로 무너졌다. 단순히 '폭력성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요컨대 사람을 초인과 비(非)초인으로 나누는 것은 이분법 논리의 오류다. 세상은 유럽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의 혁명과 투쟁 끝에 민주주의를 얻었다. 우리나라는 지난 반 세기 동안 유신 정권과 군부 독재를 겪으며 지금의 민주주의까지 도착했다. 1866년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집필할 당시에는 지금의 '현대적 민주주의'가 없었다. 우리는 이제 세상이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 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그 중간 어딘가에 '시민의 목소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
다시 말해 초인 사상을 토대로 한 정부나 권력 집단이 실패한 것은, 최고 권력자가 폭력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런 권력에는 시민의 목소리가 낄 틈이 없기 때문이다.
‘시민’을 비범하다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민이 평범한 존재는 아니다. 시민은 국민 청원을 통해 목소리를 모으고, 때로 법정에 서서 불의를 고발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하에서 하나 둘 시민이 된다. 우리는 영웅이 될 필요가 없다. 시민이 되면 된다. 아니, 시민이 되어야 한다. 영웅은 그 사상에 따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시민은 자생 작용을 한다. 무너지거나 치우칠 것 같으면 반드시 반대 여론이 나와 균형을 잡는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혜택이다.
나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흔히들 밀레니얼 세대라고 부르는 그 나이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밀레니얼 세대는 민주주의를 노력으로 얻지 않았다. 태어나보니 그런 세상이었다. 불만이 있으면 언제든 청와대 게시판에 글을 쓸 수도 있다. 요컨대 우리는 민주주의를 선물 받은 세대다. 하지만 그 선물을 얼마나 잘 간직하느냐는 개개인의 몫이다. 정부를 감시하고, 불의를 고발하는 시민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주체가 개인밖에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원고를 마감한 후 예정에 없던 이 소설의 에필로그를 작성했다. 여기서 그는 사회의 진보는 오로지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을 통해 이뤄진다는 메세지를 던졌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도 그 과정에 있어 사람들의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세상은 소수의 영웅들이 변화시키는 장소가 아니다. 우리 개개인이 타인과 연대하고 사랑하며 만들어가는 공동체다. 이것이 만일 도스토예프스키가 지금 이 세상을 살았다면 우리에게 던졌을 메세지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