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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인말러 Sep 11. 2020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

혜경궁 홍씨; 박병성 옮김,「한중록」 독후감


    나는 영화 보기를 정말 좋아한다. 가끔은 혼자서 짤막한 시나리오를 써볼 때도 있고, 지금 쓰는 서평처럼 예전에는 영화에 대한 짤막한 평론을 포토샵으로 만들기도 했었다. 주로 이창동 감독님의 작품을 좋아해서, 책은 한 권을 여러 번 읽은 적이 거의 없지만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는 몇 번이고 돌려 봤다.


     이제껏 본 영화 중, 극장에서 내내 울었던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유아인이 출연하는 <사도>다. 나와 아버지는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어렵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래서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게 가졌던 한(恨)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영화 <사도>는 다른 사극 영화들보다 사료를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영화 대부분의 대사나 내용 중 「한중록」에서 언급된 내용이 많다.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사도세자에 관한 글을 쓰기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서부터 가장 좋아하던 역사 사건이라 글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최소한 독자들에게 거짓된 정보는 쓰지 말아야겠어서 「한중록」 외에 「권력과 인간: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왕실(정병설)」과 「조선왕조실록(박영규)」를 참고했다. - 구체적인 서지 사항은 맨 아래 참고문헌에 적혀 있다 - 원래는 이덕일 교수님의 「사도세자의 고백」이라는 책도 찾아 읽었지만, 최근에는 이덕일 교수님이 쓰신 내용은 정설과 거리가 먼 소수설이라는 비판이 많다고 해서 이 글에는 직접적으로 인용하지 않았다.



    「한중록」은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회고록이다. 임오화변(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사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으나, 총 네 권의 기록 중 세 권은 정조가 죽고 홍씨가 자기 가문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쓴 내용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일반 서점에 가도 이 책은 '역사' 카테고리가 아닌 '국내 소설'로 분류되어있다.


    혹 영화 <사도>를 본 적이 없거나,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잠시 그 부분의 역사를 짚고 넘어가자. 영조는 효장세자라는 첫아들을 그의 나이 10세에 잃었다. 어린 아들을 잃고 7년 뒤인 1735년에 후궁인 선희궁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으니, 그 아들에 대한 사랑이 어느 왕의 어느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깊었다. 하지만 아들 이선(李愃; 훗날의 사도세자)과의 관계는 이선이 나이가 들수록 멀어졌는데, 종국에는 그 아들을 뒤주에 갇혀 죽게 하고 세자 자리에서 폐위시켰다. 영조와 사도세자가 멀어진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보통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째, 영조가 좋은 왕이었던 데에 반해 좋은 아버지이지 못한 점. 「한중록」에 따르면 이선(李愃)은 태어난 지 넉 달 만에 걸음을 하고 일곱 달 만에 동서남북을 가리켰다고 한다. 뭐 어느 정도 허구야 있겠지만 어찌 됐든 그만큼 이선(李愃)이 영조에게 비상한 아들이었던 것이니, 이선이 2살 때 영조가 그를 왕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이때부터가 문제인데, 세자의 거처는 저승전이라는 궁전이다. 그런데 저승전은 영조의 거처나 이선의 어머니 영빈 이씨의 거처와 모두 멀었으니, 부모의 손길이 2살 때부터 끊어진 셈이다. 또한 이선이 놀이에 빠지자 영조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그때그때 훈계나 교육은 하지 않아 놓고 막상 내관들이나 대신들이 있을 때 아들을 혼을 내며 민망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현대에는 많은 사람이 영조가 아버지로서는 최악의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한다.


둘째, 신하들의 이간질이다. 영조는 세자를 어려서부터 대리청정을 맡긴다. 대리청정은 일반적으로 왕이 약해서 통치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거나, 세자에게 제왕 교육을 미리 시키고자 할  에게 정치를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대리청정에서 세자가 마음대로 결정하면 영조는  자신과 상의 없이 결정하냐고 꾸짖고, 그래서  영조에게 의견을 물으면 그것도 혼자 결정하지 못한다며 대리시킨 보람이 없다고 꾸짖었다. 그런데 이런 영조의 행동은 부자 관계가 소홀함을 확인시켜주는 내용이지 소홀해진 이유는 아니다. 대리청정이 부자 관계를 망친 이유는 따로 있다.


    현대 사회에 보수와 진보가 있듯이, 이 당시에는 늙은 대신들로 구성된 노론과, 젊은 강경파들 중심의 소론이 있었다. 영조는 여러모로 노론의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었다. 선대 왕인 경종의 재임기간 동안 노론은 세력을 키웠는데,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과 혐의에 둘러싸인 채로 왕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세자가 자신과 뜻이 맞고 나이대가 비슷한 소론의 편을 든 것이다. 물론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려고 소론의 편을 든 것은 아니겠지만, 노론으로서는 이가 탐탁지 않으니 아들과 아버지를 이간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간질 속에서 부자 관계도 점차 멀어져 갔다.


    책으로 들어가 보자.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책 속 내용만 몇 가지 나열했다. 이 왕실 가족의 가슴 아픈 사연과 비극에 독자들이 스스로 공감했으면 좋겠다.


     경모궁(사도세자)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기질과 용모가 뛰어나고 특이하셨다. 궁중에서 기록되어 전하는 것을 보니, 나신 지 백일 안에 기이한 일이 많으셨다. 넉 달 만에 걸으시고 여섯 달 만에 영묘의 부르심에 대답하셨다. 또한 일곱 달 만에 동서남북을 가리키셨으며, 두 살에 글자를 배우시어 60여 자를 쓰셨다. (중략)

그 후, 태호 복희 씨가 그린 책을 높이 들라 하며 절하시고 천자문을 배우시다가 '사치 치(侈)'와 '넉넉할 부(富)'에 이르러, '사치 치(侈)'자를 짚으시고 입으신 의복을 가리키며 이것이 사치라 하셨다. 영묘께서 어리실 때 쓰시던 감투에 칠보장식한 것이 있어 그것을 쓰게 하니, 이것도 사치라 하고 안 쓰셨다. 돌에 입던 의복을 입으시게 하려 하니 이렇게 말씀하시며 입지 않으셨다.

 "사치스러워 남부끄럽구나. 싫다."

이것이 세 살 어린 나이에 있었던 기이한 일이어서, 모시던 신하가 명주와 무명을 놓고 시험하였다.

"어느 것이 사치요, 어느 것이 사치가 아닙니까?"

"명주는 사치이고, 무명은 사치가 아니다."

"어느 것으로 옷을 해 드리면 좋으시겠습니까?"

"이것이 좋겠다."

무명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이 일만 보아도 경모궁께서 탁월하심을 알 수 있다.


    영묘(영조)께서는 그 아드님을 얻으시고 지극하신 자애가 비할 데 없으시어 4, 5세 때에도 저승전에 오셔서 함께 주무시고 계시기를 자주 하셨다 한다. 경모궁께서도 본래 효성과 우애가 있으실 뿐 아니라 천지 만물에 통하는 이치로 보아 어릴 때 어찌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리오까. 비록 각각 처소는 멀지만 이렇듯 사랑하시고 교훈하시니, 보통 가정의 부자지간 같으면 어찌 티끌만 한 틈이라도 있었으리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이 그릇되려고 겉으로 드러난 일 없고 지적할 것도 없는 작은 일에 임금의 마음이 말없이 격노하시어, 하루 이틀 어찌된 줄 모르게 동궁(사도세자의 처소)에 머무시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는 1남 3녀가 있었다. 태어난 순으로 화평옹주, 화협옹주, 사도세자, 화완옹주였는데, 이 중 화평과 화완을 영조가 지극히 아꼈지만, 화협과 사도는 도리어 미워하였다.


    화평옹주와 화완옹주의 방에 들어가실 때는 만나 보실 때 입는 의복으로 갈아입으신 후 들어가시나 세자에게는 그렇지 않으셨다. 밖에서 정사를 보시고 드실 때에는 정사를 보신 의복을 그대로 입으신 채 오셔서 동궁(훗날의 사도세자)을 불러 물으셨다.

"밥 먹었느냐?"

    동궁께서 대답을 하시면 그 대답을 들으신 후 귀를 그 자리에서 씻으시고 그 물을 화협옹주가 있는 집의 마당으로 버리셨다.
(중략)

    경모궁(훗날의 사도세자)께서 화협옹주를 대하시면 이렇게 말씀하시며 서로 웃으셨다.

"우리 남매는 씻으신 사람인가 보다."


    영조는 매번 침소에 들기 전에 미워하는 사람을 불러 세워 한마디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불길한 말을 들었을 때는 곧장 귀를 씻었다고 한다. 자신의 유일한 친아들을 침소에 들기 전에 불러 놓고, 귀를 씻은 뒤 그 물은 화협옹주의 집에 버렸다고 하니, 사도와 화협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큰지는 알겠으나, 솔직하게 말해서 어떻게 부모가 자식에게 이럴 수 있나 싶다.


"마음이 상하여 그런다"

    이 책에서 경모궁(사도세자)이 하는 말 중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다. 하루는 영조가 경모궁에게 사과를 하러 오는데, 이때 경모궁은 "마음이 상하여" 그랬다고 이야기한다. 혜경궁 홍씨가 이런 영조의 방문에 대해 기뻐하지만, 경모궁은 어차피 자신은 죽을 것이라 말한다.


"이렇게 들었으니, 이후는 부자 사이가 다행히 좋아지겠습니다." 그러자 경모궁(사도세자)께서 화를 벌컥 내면서 말씀하셨다. "자네는 임금께 사랑받는 며느리이기에 그 말씀을 다 곧이듣는가? 일부러 그러시는 말씀이니 난 믿을 수 없네. 결국은 내가 죽고 말 것일세."


"세손이(훗날의 정조) 아들인데 부자가 화와 복이 같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생각하지 못하네. 나를 미워하심이 점점 심하여 어려우니, 나는 폐하고 세손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을 것일세."


    심리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사도세자가 조울증과 조현병을 앓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후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호적이 고쳐진 것을 보면, 마음의 병을 앓는 중에도 자신이 겪을 미래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 같다.


    영화 <사도>에 나온 내용 중 한 가지 실제와 다른 부분이 있는데, 바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사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사도세자는 역적으로 기록되어 세손인 훗날의 정조가 왕위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조는 처음에는 사도에게 칼을 던지며 자결하라고 명하고, 뒤주를 가져와 거기에 사도세자를 가둔다. 그런데 영화에서 사도세자가 뒤주 안으로 순순히 들어간 것과 달리, 실제 사도는 한 번만 살려달라고 영조에게 빌었다고 한다. 그걸 듣고도 자기 아들을 뒤주 안에 가둬 넣었으니, 영조가 그 당시 얼마나 무서운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가장 마음 아픈 사실은 결코 사도세자가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영조를 죽이려 한 다음 날, 영조가 세자를 부르자 사도세자는 도리어 학질을 앓는다고 거짓말을 하려 했다. 조선 시대에 쓰던 방한모인 휘양을 찾으며, 한여름에 아들인 정조의 휘양을 쓰고 이불을 뒤집어 쓰려했는데, 도리어 아내는 그것에 반대한다.


 "내가 학질을 앓는다 하려 하니, 세손(정조)의 휘항(휘양)을 가져오라."

    내가 그 휘항은 작으니 당신 휘항을 쓰라고 하며 내인에게 소조(정조)의 휘항을 가져오라고 하였더니 소조께서 뜻밖에도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는가!

"자네가 참으로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을 데리고 오래 살려 하고, 내가 오늘 나가서 죽을 것 같으니까 그것을 꺼려 세손의 휘항을 안 주려고 하는 심술을 알겠네." (중략)

"그 말씀이 전혀 마음에 없는 말인 줄 아오니, 이것(세손의 휘항)을 쓰소서."

"싫소! 당신이 꺼려하는 것을 써서 무엇 할꼬."


그리고 이 대화가, 결국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 사이의 마지막 대화로 남는다.


한 번도 부모와 아내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이 세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 이산(李算, 훗날의 정조)과 며느리(훗날의 효의왕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아꼈다. 영화 <사도>에서는 세손빈이 간택되고 아들인 이산이 결혼을 준비하자 배우 유아인이 연기한 사도세자가 이렇게 말한다.


 "부부란 서로의 실수를 덮어주고, 사소한 예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끝없이 사랑하는 것이니라."


    영화 대사로 읽으면 클리셰로 느껴질 수 있어도, 결혼을 준비하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하는 말이 이보다 따뜻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대사와 관련된 기록이 실제로 있는지 이 책 저 책 뒤져보긴 헀지만, 찾지 못했다. 어쩌면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비극이었지만, 정조에게 있어서 사도세자는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현대인들에 의해 이런 영화 대사가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훗날 정조는 아버지의 호를 장조로 추대하고, 자신이 직접 설계한 지상 낙원 '수원 화성'으로 아버지의 묘를 옮긴다.




    마음의 병이 없었다면 성군이 되었을지 모를 사도세자, 영조와 정조의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감춰지지 않는 이 가족의 비극은, 결국 인생의 행복은 나의 업적이 아닌 나의 가족으로부터 온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다.



참고문헌:

정병설 지음, (2012),「권력과 인간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혜경궁 홍씨 지음; 박병성 엮음, (2020), 「한중록」, 더스토리

박영규 지음, (1996), 「조선왕조실록」, 웅진 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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