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인말러 Dec 06. 2020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누가 해결할 것인가

카타리나 블룸, 폭력은 선이라는 이름에 숨어 덩치를 키운다

   책을 덮고 가장 먼저 생각이 든 것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었다. 영화 속 경찰들은 용의자를 검거한 순간 범인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들은 원하는 진술을 얻기 위해 용의자를 매달아 놓고 구타하였다. 마치 연쇄살인범이 키워놓은 '폭력'이라는 암 덩어리가 경찰 내부까지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범인이 누군가를 죽일 때마다 경찰들도 암덩어리를 키워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밤이 되면 셔터문을 닫은 채 두려움에 떨었고, 수사 일대 전부가 병들어갔다.


   폭력, 그것은 선(善)이라는 이름에 둔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는 것이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는 마치 연구 보고서와 같은 긴 부제가 붙는다.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이 책은 수사권을 지닌 경찰뿐 아니라, 언론 매체도 폭력을 자행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작품 속 메이저 신문이자 황색 신문인 차이퉁 지(die Zeitung)는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이 연루된 사건에 그녀의 사생활, 가족 등을 모두 파헤쳐 보도한다.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기자들이 얼마나 사실을 왜곡하고 타인의 사생활을 침해했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제공하는 자극적인 문체와 내용이었다.




   작품의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은 카니발 축제에서 우연히 괴텐을 만난다. 그녀는 괴텐에게서 다른 남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진심 어린 매너를 느꼈다. 그 순간 그녀를 둘러싼 것은 낭만과 사랑의 감정이었다. 하룻밤을 함께 보냈으나 다음 날 아침 침대 위에는 그녀 혼자 있었다. 얼마 뒤에는 경찰들이 집에 들이닥친다. 괴텐이 은행 강도와 온갖 사기 혐의 용의자라는 것이다. 물론 블룸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르지 않았다. 하룻밤 동안 그녀와 괴텐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경찰들의 감시를 피해갈 수 있는 아파트 탈출구도 그녀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수사의 대상이었지 형벌의 대상이 아니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론은 그녀에게 처벌을 내린다. 그녀의 배경, 가정환경 등 모든 걸 파헤쳐 "카타리나 블룸이 범죄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보도한다. 그녀가 한 몇 마디 말들은 언론에 의해 왜곡되었고, 사생활과 개인사는 모두 언론의 가십거리가 된다.


그녀는,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차이퉁>에는 이렇게 썼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블룸 부인의 진술을 다소 바꾼 것에 대해 그는 기자로서 '단순한 사람들의 표현을 도우려는' 생각에서 그랬고, 자신은 그런 데 익숙하다고 해명했다.

- 하인리히 뵐 지음,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06쪽


   또한 차이퉁 지는 블룸의 아버지가 사회주의자라는 보도를 낸다. 도대체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일까. 심지어 그들이 그렇게 보도한 근거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지방의 한 신부가 한 말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후각이 항상 믿을 만하다며, 블룸이 공산주의자라는 냄새를 그냥 맡았다고 했다."


카타리나의 아버지가 위장한 공산주의자였다는, 게멜스브로이히의 한 신부가 제공한 놀랄 만한 - 관계자 모두를 놀라게 한  - 정보가 사실인지를 조사하기 위해 블로르나는 하루 날을 잡아 그 마을로 갔다. 우선, 이 신부는 자신의 진술을 거듭 확인해 주었고, <차이퉁>이 그의 말을 그대로 올바르게 인용했다고 인정했으며,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제시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심지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자신의 후각이 항상 믿을 만하다며, 블룸이 공산주의자라는 냄새를 그냥 맡았다고 했다.

- 하인리히 뵐 지음,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24쪽


   블룸을 감시하던 여자 경찰관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차이퉁 지가 아닌 다른 신문을 꺼내어 보였다. 그 신문지에는 "결함 없는 사람이 불운하게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블룸의 반응은 절망적이었다. "대체 누가 이걸 읽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이퉁>을 읽거든요!"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이 책이 나온 46년 전과 다를까? 불과 몇 개월 전에는 검언유착이 화제 되었고, 몇 주 전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언론 신뢰도는 OECD 꼴찌이며 포털뉴스 이용률은 1위라고 한다. 메이저 신문사는 잇따른 정부, 수사 기관과의 유착으로 인해 신뢰를 잃은 것이다. 책의 표지를 넘겨 첫 속지를 보면 이런 문구가 나온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독서를 마치고 나를 엄습한 것은 나도 그 폭력의 칼 끝에 있을 수 있겠다는 두려움이었다. 카타리나 블룸이 겪는 상황들이 전혀 없을 법한 이야기가 이니었기 때문이다. 뵐은 이 책의 내용이 <빌트>지와 유사한 것이 의도도 우연이 아닌,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한다. <빌트Bild>지는 당시 독일의 대표적인 황색 신문yellow paper이다. 뵐은 그 당시 독일 사람들이 겪고있는 불가피한 현실을 고발했다. 



폭력은 '알 권리 보장'과 같은 거대한 선(善)에 자신의 몸을 숨긴 채 덩치를 키워간다. 마치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양 말이다. 그렇다면 폭력은 왜 발생하는가? 책의 부제대로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 문제를 갖고 책상에 앉아 고민하며 "시민혁명"과 "시민권"이라는 두 단어를 되짚어보았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통해 세상의 모양새가 한 개인이 아닌 다수의 국민에 의해 만들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시민의 책임"이라는 단어보다 "시민권"이 강조되어온 것은 우리가 그 책임의 깊이를 통감하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세상의 모양새가 우리에게 달렸다면, 어떤 문제를 해결할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예컨대 자극적인 문체와 언론이 내놓는 정보에만 관심을 두고, 그 정보를 얻은 '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법적으로, 혹은 비윤리적으로 채취한 정보에 대한 방관과 방조다. 성숙한 시민 의식이란 그 책임을 어떻게 인식하고 세태를 바꿔나갈 것이냐에 달렸다.




Photo by Floria Steffen at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