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을 앍고 회고하는 중2 시절
세상이 오답이고 내가 정답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속물적이고 거짓말을 했다. 그렇다고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도 거짓말을 했지만, 최소한 그들처럼 속물적인 이유에서 하지는 않았다.
그 시절을 지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성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뭐랄까. 그때의 순수함이 그립기는 하지만, 그곳에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시절을 떠나온 나를 조금은 덜 미워하기 위해 이름을 붙이며 억지로 칭찬해온 것이다.
평소 같으면 200 페이지 소설은 하루면 다 읽는데, 이 책은 일주일을 봤다. 나를 다시 정답으로 만들어주고, 중2병이 중2병이라고 안 느껴지게 만들어주는 이 짧은 책에, 그만큼 오래 남고 싶었다. 아마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대학생이라면 이 글이 더 와 닿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릴 때로 돌아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독자들과 함께 읽고 싶다. 그리고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감동을 스포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는 몇 구절 더 인용했었지만 퇴고하는 과정에서 가장 내 마음을 울렸던 구절들은 오히려 지웠다.
잊어버리고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난 학교에서 쫓겨났다. 크리스마스 휴가 이후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네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은 데다가 전혀 공부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으니 학교에서는 빈번하게 내게 경고를 해왔다. 특히 중간고사 즈음에는 부모님이 교장 선생에게 불려 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난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퇴학당하고 만 것이다. 펜시에서 퇴학이라는 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펜시가 너무나도 좋은 학교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건 사실이다.
J. 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엮음, 「호밀밭의 파수꾼 」, 13쪽
중학생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상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 너무 자주 생각해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게 딱 하나 있다.
"난 나중에 자식 낳으면 동화책은 읽히지 말아야지."
세상 어른들은 모두 동화책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나는 어려서부터 세상에는 영웅과 악당밖에 없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만 세상에는 영웅도 악당도 아닌 보통 사람이 훨씬 많았고, 그렇게 멋있어 보이던 내 아버지도 결국 그냥 '보통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노력하면 뭐든 바꿀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세상은 동화책이나 위인전의 삶이 아니었다. 그걸 가장 뼈저리게 느낀 사건은 나의 유일한 지지 기반이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할아버지께서 입원하신 동안 매일 병문안을 갔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그 날은 하필 유일하게 내가 병문안을 못 간 날이었다.
나는 이제는 그런 일상이 익숙해졌다. 영웅이 될 수는 없지만 그저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다고 내 삶이 싫거나 자존감이 낮은 것은 아니었다. 마치 처음 산 옷이 거칠거칠하고 피부가 따갑고 몸에 안 맞다가, 결국 몇 번 입으면 몸에 익숙해지듯이 그렇게 맞춰진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옷이 나에게 맞게 된 게 아니라, 내가 세상에 맞춰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난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 연극이라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영화만큼 끔찍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달리 언급할 정도도 못 된다. 우선 나는 배우들이 싫다. 배우들은 절대로 진짜 사람들처럼 연기하지 않는다. 나름대로는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할 테지만 말이다.
J. 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엮음, 「호밀밭의 파수꾼 」, 158쪽
그때는 '가짜'를 보면 화가 났다. 실제로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말하고, 나를 이해한다는 게 제일 싫었다. 정말 이해한다면 이해한다고 말할 게 아니라 내 이야기를 들어줬겠지. 지금은 내가 그러고 있다. 때로 우울증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가 겪어본 건 우울감이지 우울증을 겪어본 건 아닌데, 그것에 대해 글을 쓰고 행복하려면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는 이야기를 위로랍시고 쓴다. 최소한 위선자나 사기꾼은 되지 않으려고 "물론 나는 우울감은 겪어봤어도 우울증은 잘 모르긴 하지만 말이야"라는 말을 덧붙인다. 경제학을 공부하며 빈부격차에 대해 토론하는 것도 때로 위선적이다. 수치와 지표, 그리고 유명한 경제학자들의 책을 참고하며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는 한마디, "물론 제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다소 경솔한 발언일 수 있습니다만..."
이제는 '가짜'를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의식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어찌 됐든 사기를 치거나 나한테 손해를 입히는 것만 아니라면, 어느 정도 자기를 꾸미고 거짓말로 포장하는 것도 그 사람의 권리일 테니까. 그렇지만 그걸 인정하고 용인하는 게 과연 성숙해진 걸까? 나는 아직 내가 성숙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어렸을 때보다 어른들과 마찰을 좀 덜 일으키고, 사람 사이에서 상처 받고 고생하는 일이 조금 줄었을 뿐이다. 조금 무뎌졌다.
"아까 말한 거 정말이야? 아무 데도 안 간다는 거 말이야. 나중에 정말 집으로 올 거야?" 피비가 물었다.
"그래"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난 피비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 집으로 돌아갔으니까.
J. 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엮음, 「호밀밭의 파수꾼 」, 277쪽
어른이 되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어른이라고 다 성숙한 건 아니니까. 아직 성숙한 게 뭔지 모르겠는데도 어른이 되어야 하는 순간이 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 뭔지 알아야 했다.
주인공 콜필드의 동생 피비가 캐리어에 짐을 싼 채로 밖에 나온다. 집을 나간다는 자기 오빠를 따라나서려고 방에서 인형과 옷들을 캐리어에 쑤셔 넣은 채 그대로 나온 것이다. 그제야 콜필드는 부정하지 못할 사실을 마주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함께 하려면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 나 하나 지키기도 버겁지만 우리는 사실 지키고 싶은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가 있었고, 계속 이렇게 감정 소모를 반복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욕구가 있었다. 콜필드는 결국 동생 피비를 집에 데려다 놓기 위해 자신도 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학교도 다시 다닌다. 중2의 내 계획과 내 주관대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 결국 현실과 처음으로 타협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 더 소중한 것을 위해 나는 내 주변의 사소한 가짜들에 신경을 꺼버리고 결국 그 가짜들과 함께 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중2의 원대한 꿈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결국 나도 콜필드처럼,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동생을 위해, 그리고 하루하루 가짜에 상처 받는 걸 좀 그만두기 위해 어른이 되었다. 중2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아마 나도 속물이고 가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최소한 '성숙하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나 자신을 나 스스로 인정하고 위로해줄 수 있다는 뜻이라고 느낀다. 내가 나 스스로 속물이고 가식이라고 느낄 때에도, 그런 나 자신을 끌어안고 "아니야, 괜찮아. 넌 멋진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데에는 용기 있는 성숙함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