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 독후감
고3 때 수능 사회 탐구 과목을 고를 때 고민이 많았다. 평소 자신 있고 관심이 많은 '경제' 과목을 선택할지, 혹은 주변 친구들이 많이 선택하고 실제로 표준 점수도 비교적 위험이 적은 '윤리와 사상’을 선택할지 고민이었다. 결국 나는 수능 성적이 걱정되어서 '윤리와 사상'을 선택했다. 당시에 과목 자체에는 재미를 붙였지만, 암기 위주로 급하게 공부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공부하다가 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하간 그 이후로 노자 선생을 제대로 만나 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엄밀히는 그때도 '도=상덕=인간의 본성'이라며 외워서 공부한 것이니, 도가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기회로 제대로 읽고 며칠간 다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런 시간과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정말 행복하고 감사했다.
우선 나는 동양 철학의 전문가가 아니다. 나는 「도덕경」의 주요 구절들을 최대한 정확하고 읽기 쉽게 풀이하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이 서평의 작성을 준비하며, 고(故) 신영복 교수님의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라는 책을 참고했다. 또한 이 글에서 인용하는 도덕경 구절들은 모두 노태준 교수님이 번역 및 풀이하신 내용이다. 「도덕경」은 상편인 「도경」 21장, 하편인 「덕경」 4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대에 우리가 읽고 있는 「도덕경」은 이 둘을 합친 총 8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서평에서는 앞부분 「도경」을 다룬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글은 전문적 해석이 아니다. 「도덕경」이라는 어려운 책을 나름 내 관점대로 읽어본 나의 독후감이다.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좀 더 재미있게 읽을 글이 될지도 열심히 고민했지만, 정작 내 뜻처럼 '재미 글'이 완성되지는 않았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동양에 이런 철학자가 있었고, 이 철학자에 대해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정도로 읽어뒀으면 좋겠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노자의 본명은 이이, 자는 백양이라고 한다. 그의 생존 연대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학자는 맹자 뒤, 한비자 앞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 중국은 하나의 통일된 사상도, 나라도 없는 시기였다. 제후들이 통치하는 여러 나라가 서로 전쟁과 하극상을 벌이는 춘추전국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철학은 곧 반(反) 혼란의 철학이다. 모순이 가득한 삶일수록 노자 철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게 하여 그 배를 채우고, 그 뜻을 약하게 하여 그 뼈를 튼튼하게 한다. 그리하여 항상 백성을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하고, 이른바 아는 자로 하여금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한다. 이와 같이 무위를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는 법이다."
- 「도경」 제3장 : 무위의 정치
도가 사상은 나에게 아픈 손가락 같은 철학이다. 읽을 때 종종 마음이 아프다. 「논어」나 「맹자」, 「심경」 등 유가의 책들은 꽤 재밌게 읽었다. 특히 「논어」는 조금 어렵다고 느꼈지만 와 닿는 말들이 많았다. 「맹자」는 다 읽은 지금도 거의 매일 꺼내 읽는, 내 서재의 압도적 ‘베스트셀러’다. 유교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간직해야 할 태도로서 '인(仁)'을 제시했고, 그런 것들의 외적 규범으로서 '예(禮)'를 제시했다. 그런데 노자는 이 둘 다 행복한 삶의 비결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회에 법이 많아지면 모순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법정에 변호사, 검사, 판사의 3인의 중재자들을 놓는다. 하지만 노자가 보기에 이는 사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사회는 그저 모두가 허위적인 욕심을 버리고(無慾), 동시에 모든 인위적 제도를 철폐하면(無爲) 더 행복해지는 장소다. 요컨대 이 부분이 내가 도가 사상을 읽을수록 마음이 아팠던 이유다. 이야말로 기득권층의 논리가 아닐까? 강자가 약자의 기회를 박탈해가며 약자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말하면 어쩌지?
하지만 나는 사상을 창시한 사람과 사상을 집행한 사람을 구분하지 못했다. 마틴 루터는 민중들을 위해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했으나 이제는 그런 종교 논리가 다양한 사회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데 사용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절대적 빈곤층을 위해 자본론을 썼지만, 그 사회주의 아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상의 집행자에 의해 탄압되고 학살당했다.
그러므로 노자의 철학도 그런 가능성을 내포할 뿐이지, 이에 대해 노자가 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나는 이 글에서 노자에 대해 그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기로 했다. 동양철학의 전공자도 아닌 내가 수천 년을 살아온 사상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나는 다만 이 글에서 내가 도덕경을 읽으며 느낀 점, 떠오르는 감정들을 전하고 싶다.
"또 한편 모든 사리에 명백히 통달해 있으면서도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철저하게 바보 노릇을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겸손한 태도가 아닐까. 지금까지 주장해 온 무위 자연의 도가 이 세상의 삼라만상을 만들고 또한 길렀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사람들처럼 그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여 독차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큰 사업을 성취하였어도 오히려 자기가 한 일을 조금도 자랑하지 않았다. 또한 그것들을 낳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만물을 주재하여 제멋대로 요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듯 위대하면서도 겸손한 자, 그것을 우리는 현덕이라고 하는 것이다."
-「도경」 제10장 : 현묘한 덕
신은 존재하는가? 아마 세상을 신이 만들었든 그저 하나의 자연현상이든 만든 주체가 있을 것이다. 그저 자연현상이라면 자연 자체가 창조자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가장 겸손한 존재일 것이다. 그 신은 우리에게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다. 신이 인간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기독교의 주장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신이 우리와 공존하면서 이 세상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자랑하고 다니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노자는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며 오히려 위대한 사람일수록 고개를 숙이고, 현덕(玄德)을 갖춘 사람일수록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빌립보서」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각자는 겸손으로써 서로 남을 낫다고 하노라. (중략) 하느님은 자기를 겸허하게 하며, 종의 모습을 취하며 사람과 같이 되었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겸손'은 인생의 중요한 미덕 중 하나이다. 나는 유독 요즘 들어 겸손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내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몇몇 과목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성적이 잘 나왔다. 그런데 더 큰 세상 앞에 서니 그런 자신감을 잃었다. 오히려 나의 거만함과 자만심에 의해 실패하는 일들도 생겼다. 무엇보다 이제는 글을 쓰니, 사람들이 내 글을 읽으려면 내가 겸손한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 다만 겸손할수록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고, 무언가 배울 때 겸손할수록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고, 오미는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하고, 말을 타고 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발광케 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동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배를 충실히 하도록 하고, 눈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도경」 제12장 : 오관(五官)의 욕망
감각을 모두 부정하기는 어렵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기쁘고, 전시관에서 아름다운 작품을 보면 몇 분씩 골똘히 서 있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게임을 할 때도 이기면 기분이 좋아 몇 시간씩 하게 되는 것도 감각에 의한 현상일 것이다. 나는 명백히 무욕(無欲)이라는 개념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욕심대로 살다가, 때로는 욕심의 한계에 부딪히고, 충족시킬 수 있는 욕심과 이룰 수 없는 꿈을 구분해 적절히 잘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욕심을 지배하는 것이지, 욕심에 내가 지배당하는 상태는 아니다.
아마 노자가 비판하고자 한 것은 욕심에 지배당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이나, 색(色)과 식(喰)에만 눈이 멀어 욕구에만 충실한 사람을 겨냥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재미와 놀이는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도 대학에 들어와서 꿈을 찾기 전에는 집에서 몇 시간씩 게임도 하고, 밖에 나가서 며칠씩 밤을 새우며 술을 즐긴 적이 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시간을 하루빨리 벗어나지 않았으면 아찔했을 것 같다. 사실 지금도 '그때 조금 더 공부를 해뒀으면'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 내가 꿈이 없다고 시간을 허비하게 되면, 나중에 꿈이 생겼을 때 그 허비한 시간으로 인해 내가 꿈으로부터 몇 발자국씩 멀어졌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무엇보다, 놀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기 어렵다.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한 필수 요소는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욕망은 존재하되, 그 욕망을 오로지 자신이 통제할 수 있어야 그 삶이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잠시 자본주의 체제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이 주제에 관심이 없는 독자는 이 장을 넘겨도 좋다.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 신영복 교수님은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라고 말씀하셨다. 자본주의는 저축이 아닌 소비로 유지되는 시스템이며 사람들의 소비를 무척 장려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욕심 없는 삶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누군가는 욕심을 갖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약자는 강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에만 이용되게 된다. 만일 사회가 모든 구성원의 욕심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 사회는 오히려 강자들에 의해 통제될 것이라고 믿는다. 강자들이 약자들의 욕심을 통제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자본주의는 오히려 약자들을 위한 시스템이다. 약자들이 자신의 욕심에 대해 목소리 낼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 자체로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사람들의 권리는 자본주의를 통해서 보존되고, 욕심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모두에게 평등하게 작용한다. 요컨대 시스템은 시스템일 뿐, 개인이 자신의 욕심을 통제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태상은 아래에서 이것이 있음을 알 뿐이고, 그다음은 친하여 이를 칭찬하고, 그다음은 이를 두려워하고, 그다음은 이를 업신여긴다."
- 「도경」 제17장 : 백성에 임하는 성인의 자세
태상은 ‘왕’, 즉 지금으로 치면 정치 지도자라는 뜻이다. 위 문장을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가장 좋은 지도자는 사람들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지도자이며, 두 번째로 좋은 지도자는 사람들이 칭찬하는 지도자, 세 번째로 좋은 지도자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다. 마지막으로 가장 안 좋은 지도자는 사람들이 업신여기고 미워하는 지도자다.
가장 좋은 지도자의 조건은 사람들이 그냥 그 존재를 아는 정도, 즉 칭찬도 비판도 할 필요가 없는 지도자라 한다. 이것이 노자의 ‘무위 정치’다. 지도자는 그 무엇도 하지 말고 사람들이 알아서 살게 내버려 두라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노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처음으로 ‘작은정부론’을 주장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류가 역사라는 시간을 지내며, 사회적 '힘'이 존재하는 순간 그 힘은 약자를 괴롭힘으로써 팽창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의 힘이 너무 커지면 정부가 곧 약자를 괴롭힌다(소비에트 연방). 정부의 통제가 너무 약하면 민간의 강자가 그 나머지 약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2008년 금융위기). 곧 정부와 민간의 힘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가 가장 안정적인 것이다. 과도하게 작은 정부는 민간의 폭력을 통제하기에 무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지도자, 즉 많은 사람이 칭찬하는 지도자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독자에게 노자 철학이 어떻게 하면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며칠을 고민했다. 이 글을 쓴 것은 벌써 일주일 전이지만 정말 이게 독자가 원할 글인지, 독자에게 도움이 될 글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며칠을 고민하고 수정했지만 큰 변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노자 선생은 사회가 전쟁과 빈곤으로 가장 복잡할 때 등장한 인물이다. 우리나라가 최근 코로나로 인한 여러 사회 문제를 겪고 있고, 사람들의 마음이 어느 때보다 복잡하다. 그래서 한번쯤 「도덕경」을 다시 읽는 것이 우리 삶에 조금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언제나 긴 글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하고, 혹 그분들께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봐 죄송스러운 마음이 늘 가슴 한 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