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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 하나의 문화 Jul 02. 2024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1인분의 삶이라는 덫을 빠져나오기까지

또 하나의 문화 6월 북토크 토론문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 1인분의 삶이라는 덫을 빠져나오기까지


토론글: 희정. 기록노동자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기록한다. 저서로는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2011), 『노동자, 쓰러지다』(2014), 『아름다운 한 생이다』(2016),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2019),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2022), 『일할 자격』(2023), 『베테랑의 몸』(2023)이 있다.




#청춘시대

요사이 죽음을 키워드로 두고 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에 앞서 여러 사람이 쓴 죽음에 관한 글을 읽는데, ‘죽음이 먼 일인 젊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구절을 종종 본다. 그럴 때마다, 거짓말... 중얼거린다. 모르는 소리다. 내 주변 사람들은 너무 많이, 자주 죽음을 떠올린다.


<청춘시대>라는 드라마가 있다. 청춘을 키워드로 한 극 작품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방영된 지 서너 해가 지난 후에야 접했다. 하우스메이트인 20대 여성 4인을 주축으로 진행되는 드라마라고 들어, 청춘들이 모여 적절하게 희망차고 적절하게 아프겠지, 싶었다. 드라마는 예상과 달랐다. 그 안에는 너무 많은 죽음 키워드가 존재했다. 세월호. 데이트 폭력, 성범죄… 가족은 가족이긴 해도 보호막(?)일 순 없고. (심지어 사람 좋은 집주인 할머니는 여성 세입자들의 귀가시간은 관리해도, cctv 하나 제대로 달아주질 않는다.) 이거 너무 아는 이야기다.


이 시대 청년 여성에게 죽음은 너무도 익숙한 존재이다. 그런데 청춘(?)들은 죽음을 모른다니. 이 ‘뭘 모르는 소리’가 청년 여성들을 자살로 모는 또 하나의 요소다. 그러니 ‘뭘 모르는 소리’를 가로 막고, 청년 여성들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일은 너무도 필요하다. 당신의 우울은 당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 물론, 이 당연한 이야기를 언제까지 하고 있어야 해! 라는 생각에 화도 나지만,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꿋꿋하고 섬세하게 전하는 연구자와 기록자, 그리고 발화하는 당사자들이 있어 감사할 뿐이다.


# 나태와 후회

책에는 자신의 노력 부족(나태)와 선택을 반성하고 의심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종종 생각했다. 이 사회의 위계와 계급에 대한 고찰은, 납작하게 비교하자면, 20대 여성이 20대 남성보다 더 앞서 나간다고 볼 수 있는데. 왜 청년 남성에겐 잘 드러나지 않는 자책이(내가 그들에게 더 많이 확인한 것은 피해를 본다는 의식이었다. 기득권을 가진 자는 따로 있고, 나는 박탈당했나는 감각) ‘세상 돌아가는 바’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에게서 더 자주 보이는가. 여성들은 왜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이 더 자주 보이는가. 이 점은 분명,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성’과도 연결된 문제이겠지만, 또 한편으론 파이의 문제라 볼 수 있겠다.


자신의 부족을 자책하는 여성들의 글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것은 저소득층 젊은 세대를 만났을 때의 경험이었다. 가족 자원이 적은 환경의 청소년과 청년일수록 자신의 선택과 판단이 어긋날까 걱정하고, 그 결과나 성과가 낮을 경우 자신의 판단을 더 깊이 후회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가진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빵 하나를 가질 돈밖에 없으면, 어떤 빵을 사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잘못 선택한 책임은 오롯이 나에게 있고, 원망은 커진다. 이 모습이 불안정성이 커진 노동시장에서 청년 여성들의 후회와 겹쳐 보였다. 쉽게 원망하는 건 부족한 자원이 아닌, 적절한 판단과 선택을 하지 못한 ‘나 자신’이다. 이 (사회적) 자원 부족이 자책을 깊게 만든다.


책은 신자유주의 자아실현 담론과 능력주의 서사가 어떻게 여성들에게 자책과 우울을 심어주었는지,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 파이가 부족할 때 강화되는 이 논리는 마치 올무 같아, 발버둥 칠수록 몸을 더 옥죈다. 그래서인가. 2부 ‘노동위험’ 파트에서 “덫에 갇혔다”라는 표현에 눈이 갔다.


# 어쩔 수 없음

그런데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를 쓰면 그만이다. 기수가 탄 말처럼 눈 가림막이라도 하며 뛸 텐데, 어쩌면 청년 여성들은 ‘아예 모르지 않아서’ 더 문제일지도. 나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


더 좋아질 길이 없다. 지금 자신이 경주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러닝머신 위를 뛰고 있다. 지금도 허덕이는데, 앞으로 러닝머신 속도는 더 올라갈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의 삶이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죽음에 대한 욕구는 ‘어쩔 수 없을 때’ 등장한다. 리셋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 해결방안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의 방안처럼 등장한다.


# 발전과 성장

더불어, 이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현재 한국의 청년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규정하는 영역은 노동영역에 한정된다.” 최근 들어 자신의 노동을 재현하고, 일터 속 자신을 표현하려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커지고 있다. 이는 노동에 관한 글을 쓰는 입장에서 반가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왜 갑자기, 그동안 이야기하기 꺼리던 일터의 영역이 관심사의 영역으로 들어왔을까. 노동자로의 자각은 늘 반가운 일이지만, 이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이 일터밖에 없다면 그건 위험한 일이다. 한국 사회의 일터가 그 자체로, 위험하기 때문에. 이는 책의 2부에서 심도 깊게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노동시장은 외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할 자격>을 비롯해 청년 여성들을 만날 때 면,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깊숙이 이들에게 경쟁과 불안이 내면화된 것을 느낀다. 습이 되었다 싶을 때가 있다. 너무도 익숙해져서, 경쟁과 성과 평가와 유연화된 노동이 없다면, 오히려 불안을 느낀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서 하는 고민’이 아니다.


이들에게 ‘안정성’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은 “배울 게 없다.”“성장할 수 없다” “발전이 없다” “경쟁력을 키울 수 없다”라는 말과 동일하게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로 회사의 이직을 고민하거나 이직한 경우를 20대 청년 여성 노동 실태조사 등에서 발견한다. 청년 세대가 내면화한 성장과 발전 논리는, 변화하지 않음/경쟁하지 않음의 상태를 뒤처지고 도태되는 상태로 인식하게끔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책에도 나온 대로 “습득하고, 커리어를 쌓고, 자신의 가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명령”은 이들을 계속 달리게 한다. 달리다가 멈추면 안착한 것도 쉬는 것도 아닌, 표류하는 것이다.


# 여정

한국 사회는 취업 준비를 하지 않고, 일하고 있지 않은 청년들에 대한 통계를 낼 때 이렇게 지칭한다. “그냥 쉬었다.” 연말 연초가 되면, 이런 제목의 기사가 나온다. <“‘그냥 쉬었음, 구직포기’ 역대 최대”> 인생에서 그냥 쉬는 시간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러닝머신 위에서 그냥 멈춘 게 아니다. 더앞서 우리는 경주장에 선 것도 아니고, 러닝머신을 탄 것도 아니고, 살아가는 중이다. 프랑스 노동법에서 ‘여정’(이 단어는 프랑스 노동법에서 가져왔다. 프랑스 노동법은 청년의 권리 중 하나로 “일자리 자율성을 향한 계약된 동반 활동 여정”을 명시했다)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나는 뛰는 일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덫을 빠져나오는 법

앞서 언급한 덫. 덫에 걸리면 죽는다. 비인간 동물들이 그러하듯. 그 덫을 빠져나오려면 손상을 크게 입을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덫에서 빠져나와야 할까? 또는 무엇을 통해 빠져나와야 할까.


저자이자 연구자인 이소진 선생님이 충분히 저서 속에서 자신의 고민과 시야를 보여주셨지만, 그럼에도 확인차 한 번 더 여쭤보고 싶다. 무엇이 있다면, 우리는 우울한 여자들에게 증발한 여자로 가는 다리를 없앨 수 있을까.


+ 개인적으로는 해결책이 없어, 그래서 “해결은 죽음밖에 없으니까”라는 이들의 구술을 읽으며, 나는 ‘고립’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렸다. 저자도 지적한 대로, 이들이 제시한 해결책(노력?)은 신자유주의하에서 ‘나 자신’의 노력이다. 그 애씀의 자리에 주어에는 모두 ‘개인’이 들어가 있다. 요 몇 년간, 동료되기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 방향 아래서, 어떤 네트워크가 있어야, 이 고립과 소외와 개인화가 멈춰질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기록자로 늘 궁금했던 것인데. 면담을 바탕으로 한 질적 연구에서, 사건이나 삶에 대한 당사자의 해석과 연구자의 해석이 대립하거나, 당사자의 감정(후회 등)을 객관화해서 보는 장면이 두드러지는 내용일 경우, 당사자에게 이를 어떻게 설득시키는지(?) 알고 싶다. 르포나 기록글의 경우에는, 그래서 담지 못하는 내용도 많아.. 이 점이 개인적으로 궁금하였다.




* 2024. 6. 24. 또 하나의 문화에서 진행된 저자와 함께 하는 6월 북토크에서 기록노동자 희정이 쓴 토론문. 당일에는 저자 이소진, 또문 운영위원 김미선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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