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일(또 하나의 문화 동인, 전주대광교회 목사)
김영일(또 하나의 문화 동인, 전주대광교회 목사)
#1. 1991년 6월 9일 일요일
35년 전 이 날, 나는 한신대 신학과에 갓 입학한 대학 신입생으로 1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면 기숙사에 있는 짐을 꾸려 고향 강진으로 내려가 방학을 보낼 궁리에 빠져 있었다. 시험기간 중 우연히 어느 시인의 부고를 접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 시인이 나의 한신대 선배님이었다는 것을. 옷깃만 스치어도 인연이라는데, 나는 그 옷깃마저도 스칠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이 슬프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23년 차이라는 세월의 간극도 있으려니와 한신대 신학과 동문이라는 것 말고는 딱히 선배님을 생전에 뵈어야 할 필연적인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오늘까지 고정희 시인을 한신대 선배님으로 기억하며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은 선배님의 '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2. 광주 YWCA와 조아라 장로
수유리의 한신대 신대원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1999년 2월, 결혼과 동시에 첫 목회현장인 화순읍교회 전도사로 내려갔다. 약 2년 후인 2000년 12월에는 광주한빛교회로 옮겨 2002년 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연초에 심방 때마다 소태동 <영신원>에 방문하면 그렇게도 정겹고 뜨겁게 심방대원을 맞아주시고 기뻐하시던 조아라 장로님의 소녀 같은 미소와 표정은 잊을 수 없다. 연로하셔서 거동이 불편하시던 때라 외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워하셨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푸짐한 먹거리를 간식으로 내놓으시며 남기지 말고 다 먹고 가라시던 당부의 말씀은 나의 할머니요 어머니가 의당 부어주시던 사랑의 발로였던 것이다.
목사임직 후 2003년 5월에 첫 담임목회지인 해남 계곡면에 소재한 <사정교회>에 부임하였다. 33살에 시작한 담임목회지에서 11년 5개월을 살면서 나의 목회와 삶에 고맙고 소중한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잠시 잊고 있었던 고정희 선배님과의 만남이 다시 이루어진 것이다. 해마다 6월이면 <고정희 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 추모행사가 열리는데, 나 또한 행사에 동참하면서 시인의 삶과 시에 대해 시나브로 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시인의 연보를 살피던 중 시인이 광주 YWCA에서 조아라 장로님과 함께 일을 했던 사실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래서였을까. 시인은 후일에 "내 시와 사유의 세계를 형성한 것은 수유리의 한신대와 광주 YWCA와 또 하나의 문화였다."고 회고했다. 끊길 뻔했던 시인과의 인연은 광주한빛교회에서의 조아라 장로님을 통해 그리고 땅끝 해남에 내려와 시인의 추모행사를 통해 극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조아라 장로님은 내가 해남에 부임한 후인 2003년 7월 8일에(91세)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3. 고정희 기념사업회와의 만남
해남에서의 첫 목회는 고정희 시인과 고정희 기념사업회와의 만남이 있어 풍성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목회 일정에 시간을 내어 송정리에 있는 시인의 생가에 들러 시인이 읽었을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를 망연히 응시하거나 방에 앉아 무심히 책들의 제목을 일별 하곤 했다. 당시 시인의 고모님이 고즈넉한 집(생가)을 홀로 지키고 계셨는데, 시인의 서재와 방을 방문객들에게 자유로이 개방했다. 시인의 사진들과 육필원고들 그리고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생가를 수시로 방문해 시인의 삶의 모토였던 <고행ㆍ청빈ㆍ묵상> 글귀를 경전 읽듯 바라보며 가슴에 새기곤 했다.
해마다 시인 추모행사가 열리면 생가와 묘소 일원에 추모객들이 많이 모이곤 했는데, 어느 해였던가. 당시 기념사업회 이명숙 회장님의 제안으로 해남 읍내 YMCA 강당에서 "고정희 시 강좌"를 열었는데, 내가 강사로 서게 되었다. 시인도 문학평론가도 아닌 내가 감히 고정희 시인의 시를 강의하는 자리에 서게 된 연유는 이렇다.
고정희 시의 주제가 되는 <기독교ㆍ민중ㆍ여성> 가운데, 성서와 기독교적인 시어나 개념들에 관한 것들을 모아 목회자로서 시 읽기를 안내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해주십사는 회장님의 제안에 화답한 것이었다. 비기독교인 일반 독자들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담아낸 낯설거나 난해한 제목이나 시어들의 의미와 문맥을 쉽게 설명, 안내함으로써 누구나 고정희 시인의 시를 부담 없이 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한 강좌였다. 당시 강좌에 참여한 분들과의 화기애애한 소통 덕분에 시인의 시들을 '더 친밀하게 읽고 깊이 묵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피드백이 있어서 보람 있는 강의로 기억된다. 지금도 그때 강의를 위해 준비했던 강의록은 남아 있어서 설교 준비나 강의 때마다 유익한 자료가 되곤 한다 (주제: 고정희 시에 나타난 히브리 사상과 예수 정신).
#4. 한신이 낳은 시인들과 고정희
2015년의 일이니까 벌써 10년이 넘은 세월이다. 한신대 신학대원장 연규홍 교수님의 제안으로 한신대가 낳은 시인들의 작품을 모아 시선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한신대 개교 75주년을 맞아 선배(시인)들의 문학적 감성과 역사의식을 후배 목회자들과 교회가 공유하자는 취지였다. 이를 위해 ‘한신 시문학회’가 주관하여 7명의 시인을 선정했다. 시선집에 게재할 시인은 한신대 설립자인 송창근, 김재준을 비롯 김정준, 문익환, 김경수, 임인수, 고정희 등이었다. 나는 고정희 시인을 소개하고 시들을 선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를 위해 당시 목포에 거주하고 계시던 시인의 오빠되시는 분께 전화로 연락을 드려 시선집 발간 취지를 설명하고 흔쾌히 시 게재를 허락받았다. 발간된 시집을 자택으로 보내드렸다. 제목은 <땅에 쓴 글씨>였다. 참고로 시선집에 게재한 시를 소개한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백>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편지> <어머니, 나의 어머니> <사십 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이 시대의 아벨> <야훼님 전 상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수유리의 바람> <성금요일> <부활 그 이후> <기(旗)> <폭풍 전야> <서울 사랑> <히브리전서> <하관> <신 없이 사는 시대의 일곱 가지 복>.
#5. 목사후보생들과 시인의 만남
해남에서 목회하던 시절, 해마다 가을이면 수유리 신학대학원생들은 전국 각지의 교회에 현장목회실습을 떠난다. 나도 4-5명의 목후생들을 초대하여 4박 5일 동안 교회에서 숙식하며 목회실습을 진행했다. 땅끝 해남까지 실습을 와주는 후배들이 고마웠다. 빠지지 않는 프로그램 에는 해남이 낳은 고정희,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방문, 소개하는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살아내며 시로 남긴 선배의 생가와 시의 세계를 함께 경험하는 일은 뿌듯하고 기쁜 일이었다. 해남지역에 왔던 많은 목사후보생들이 지금도 고정희 시인을 기억하며 그의 시를 읽으며 목회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면 즐겁다.
#6. 고정희 시인의 시를 읽는 한국교회를 염원하며
작년(2025년)에 내가 속한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 매월 발행하는 회보에 고정희 시인의 삶과 시를 소개하는 연재를 실었다. 총 7회에 걸쳐 주옥같은 시들을 소개하는 기쁨을 누렸다. 연재를 하게 된 계기는 단순하고도 소박했다. 목회하면서 만나는 선후배 목회자들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혹시 고정희 시인 알아요?” “모른다구요?” “오호통재라!” “이름은 들어봤다구요?” “그분이 바로 한신대 신학과 선배님이에요!” 이런 분위기의 소통을 하곤 한다. 우리 교단이 배출한 대선배님과 시를 모르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최소한 한국교회가 아니 기장 교단에 속한 목회자와 교인들이라도 고정희 시인의 시를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절박하고 절실한 마음에 총회 담당자에게 ‘고정희 시인의 시를 소개할 수 있는 지면을 허락해 주십사’ 요청하여 연재를 하게 되었는데, 전국 각지의 동료 목회자들이 전화나 메시지를 통해 격려해 주시고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셨다. 목사로서, 후배로서 아니 사람으로서 고정희 시인의 시가 한국인들과 더불어 전 세계인들이 읽을 날을 꿈꾸어 본다.
#7. 또문과의 만남을 기뻐하며 인사드립니다.
작년 5월에 목회하던 교회(인천)를 사임하고 급하게 천안에 집을 얻어 내려오게 되었다. 27년 동안 경주마처럼 달려온 목회 여정에 잠시 쉼과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자 안식년을 맞아 쉬게 된 것이다. 생전 처음 살아보는 충청도 천안에 이사 온 날이 마침 고정희 시인의 기일인 ‘6월 9일’이었다. 이삿짐을 부려놓고 책을 정리하다가 고정희 시인 1주기에 발간한 추모집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이 눈에 띄었다. 해남에서 목회할 때 손님이 방문하면 시인의 생가에 가서 이 책을 소개하고 한 권씩 사주곤 하면서 읽었던 책이다. 그런데 이사한 날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꼼꼼히 그리고 찬찬히... 시인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장례식 그리고 1주기 추모공연 등 시인을 추모하는 분들의 현장감 넘치면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글들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추모글을 써주신 분들께 이 지면을 통해 진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 추모집이 아니었으면 시인의 마지막 모습을 모른 채 살아갔을 삶을 생각하니 아찔한 것이다.
추모집을 읽고나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한신대 입학해서 1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43살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셨기에 생전에 선배님을 뵌 적이 없다. 너무 안타깝고 아쉬운 대목이지만 ‘시인의 육성은 어떤지...’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 것이다. 우선 해남의 고정희 기념사업회를 통해 조한혜정 교수님의 전화번호를 의뢰했다. 교수님께 문자로 인사와 용건을 말씀드리니 <또하나의문화>에 문의하도록 안내해 주셨다. 또문의 김희옥 선생님을 통해 음성 파일로 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목소리로 만날 수 있음에 참으로 감사했다. 도움을 주신 해남의 고정희 기념사업회와 제주의 조한혜정 교수님 그리고 또문의 김희옥 선생님께 거듭 감사드린다. 덕분에 지난 가을 10월 말에 제주 여행 중 조한혜정 교수님이 거주하시는 <선흘리 예술마을>에 방문하여 할머님 작가분들의 그림들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환대해주시고 자세한 그림 소개까지 해주신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앞으로 고정희 시를 매개로 또문이 펼쳐나갈 선한 역사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드린다. 또문 회원 여러분, 정말 반갑습니다. (202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