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혁명 이후, 우리가 미국에서 배우는 말들

김현미(또 하나의 문화 동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by 또 하나의 문화

(위 사진출처: Chip Somodevilla/Getty Images)


빛의 혁명 이후, 우리가 미국에서 배우는 말들


김현미(또 하나의 문화 동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석기 시대로 만들어버리겠다.” “지옥을 보여주겠다.”

이러한 협박의 언어는 더 이상 광신적 종교지도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의 입에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발화가 되었다. 미국처럼 민주주의 제도가 공고하다고 여겨졌던 사회에서도, 민주주의의 훼손과 퇴행은 놀랄 만큼 빠르게 위로부터 진행되고 있다. 얼마 전 보스턴에서 만난 한 연구자는 트럼프 재임 이후 이란 전쟁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주 주말마다 반대 집회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는 거리에서 “왕은 물러가라”고 외쳤지만, 동시에 쉽게 떨쳐낼 수 없는 패배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결국 임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제도 정치에 대한 무력감이 어떻게 개인의 감정으로 내면화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미국 시민들은 전국적으로 치열한 반트럼프 시위를 이어가고 있지만, 의회의 승인 없이 전쟁을 일으킨 대통령에 대해 ‘탄핵’을 공공연히 거론하지는 못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처음부터 응원봉 시위로 평화롭고도 열정적으로 탄핵 국면을 열어갔던 한국의 20–30대 여성들의 정치성은 외국인들에게 놀라움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미국 사회에서는 전쟁에 대한 감각이 이토록 희미할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 수많은 전쟁에 개입해 왔고, 크고 작은 군사적 개입만 보더라도 100회를 훌쩍 넘는다. 그럼에도 많은 시민들은 이를 자신의 일상적 현실로 체감하지 않는다. 전쟁이 언제나 ‘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개입으로 정당화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전쟁의 물리적·정서적 비용이 미국 사회 내부에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은 미국 영토 밖에서 수행되었고, 살상과 파괴, 그리고 막대한 비용은 외부로 전가되었다. 전쟁의 흔적은 타자의 공간에 남고, 미국 사회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거리에서 이를 관리해왔다. 전쟁이 일어나도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낡은 무기를 소모하고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순환을 통해 거대 이윤을 창출해왔다. 전쟁은 파괴이면서 동시에 축적의 조건이 되는 역설적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미국 사회의 전쟁 불감증은 트럼프 같은 괴물을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최근 접한 한 기사(New York Post: Seoul women: Koreans learn English using Karoline Leavitt’s White House briefing, April 4, 2026)는 또 다른 차원의 씁쓸함을 남긴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백악관 대변인 캐롤라인 레빗의 브리핑 영상이 영어 학습 콘텐츠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발음이 명확하고 태도가 자신감 있어 보인다는 이유다. 물론 젊은 여성 정치인의 성공적인 이미지, 혹은 한국 방문 당시 보여준 친근한 제스처가 호감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반복하는 언어와 정치적 메시지다. 거칠고 공격적이며, 때로는 무지한 권력의 언어를 그대로 재생산하는 발화를 ‘배우고 싶은 영어’로 소비하는 현상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유통되는 폭력의 언어이자, 우리가 힘겹게 만들어온 정치적 감수성을 되돌리는 퇴행적 선망이기 때문이다. (2026.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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