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조한혜정의 글
1. 웬 할머니 이야기?
5월 21일 박찬경 감독이 <귀신, 간첩, 할머니>라는 주제로 전시를 한다며 글 한 편 써보겠냐는 메일을 보내왔다. 최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둘러싼 국가 간 갈등이 새삼 폭력적 근대화 과정에서 ‘할머니’의 자리에 대해 다시 생각나게 하지 않느냐면서 할머니가 겪은 피해, 기도, 투쟁에 대해 자유롭게 써달라는 주문이었다. 청산되지 않는 냉전의 역사를 집요하게 분석해볼 필요도 있지만, 이 주문은 어쩐지 지루하지 않는가? 가장 억압된 존재를 상정하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듯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내 할머니를 떠올리며 답신을 보냈다. “아, 할머니 이야기, 쓰고 싶지요. 그런데 귀신 간첩, 이런 말과 연결되는 삶은 아니었던 듯해요. 한을 쌓은 분들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삶을 만들어가면서 사셨던 것이라……. 분명 안티고네 할머니이셨긴 한데 그런 국민 국가적 단어도 별로이고요. 기획이 좀 달라지면 그때나 쓸게요.”
답이 왔다. “귀신, 간첩과 연결하지 않으셔도 되고, 주제의 조건 없이 자유롭게 '할머니 이야기'를 써주시면 어떨까요? 오히려 적극적으로 삶을 만들어가면서 살아온 점에 초점을 맞추셔도 좋겠습니다. 국민 국가적 사고에 대한 비판을 해주셔도 좋고요. 저희 주제 발문에 쓰인 '할머니' 부분은 저희 안에서도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참여 작품들이 많아서, 언제 한번 작품을 보여드릴 기회도 갖고 싶습니다. 기획이 달라졌다 생각하시고 재고해보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메일을 읽다보니 호기심도 동하고 친할머니 생각도 나서 다시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 친할머니는 귀신(미친 사람들로부터)을 쫓아내는 힘을 가지셨다고 하더군요. 나는 외가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서 상주에 계셨던 친할머니 생각을 미처 못 했네요. 한번 써 볼게요.” 감독과 만나 작품 구경을 한 후 결국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남의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겨를이 없는 시대이지만 내 두 할머니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한다. 좀 다른 모습의 ‘할머니’, 그리고 좀 다른 방식의 ‘할머니’ 이야기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내가 실제로 불러온 대로 외할머니는 ‘구포 할머니’, 친할머니는 ‘상주 할머니’라고 부를 것이다.
2. 구포 할머니
내 외할머니 이정자님은 1900년에 태어나셨고 구포 낙동강에서 큰 곡물상을 하던 천석꾼 ‘이 참봉’의 딸이었다. 나의 외외증조부가 되는 이 참봉은 양반 가문 출신이지만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누나들과 함께 자수성가한 경우라 한다. 당시 참봉이라는 벼슬/호칭은 요즘 박사 학위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아내는 두 딸만 낳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매사에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이 참봉은 두 딸을 아주 귀히 여기며 키웠던 것 같다. 활달하고 영특한 큰딸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며 기고만장한 여자로 성장했다. 내외관습이 남아있던 때라 할머니는 집에서 서당 선생이나 일본 유학생들로부터 한문과 한글, 산수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동네 아이들이 가는 학교가 궁금해진 할머니는 학교에 보내달라고 아버지를 졸라 학교에 가게 되었다.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는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가니까 학생들이 다 사라지고 없어서 한참 찾다 보니 이 참봉의 딸이 학생들을 전부 데리고 자기 집에서 공부를 가르치고 있더라는 이야기다. 선생님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는지 그냥 놀고 싶어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나 많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것은 어릴 때나 나이 들어서나 변함없던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큰 이모 말로는 백정의 딸이 있는 것을 보고 학교를 그만 다녔다는데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사람차별을 하지 않는 분이 구포 할머니인지라 ‘사실 확인’을 해보고 싶은 부분이다.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다. 어릴 때 할머니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했던 편이지만 그 이후 시간이 많이 흘러서 무슨 말을 누구에게 들은 것인지 가물가물하니 감안하고 들어주기 바란다.
구포 할머니는 열여덟 되던 해 동래에 사는 서울서 낙향한 한 씨 집안의 셋째 아들과 혼인의 연을 맺었다. 시아버지는 정교한 장식 조각이 달린 긴 담뱃대 공장을 하셨다고 한다. 시어머니인 현 씨 부인은 구한말 큰 벼슬을 하다가 나라꼴이 말이 아니어서 막 낙향한 집안이었다는데 내 추측으로 서울서 신문명을 일찍이 접한 개화 집안으로 역관이나 사신으로 외국에도 들락거린 집안이었던 것 같다. 더 이상 나라라고 볼 수 없는 구한말의 파국적 상황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낙향한 분들로 매우 합리적인 문화를 가진 집안이었던 듯하다. 담배공장 외증조 할아버지는 동아일보 창간 때부터 신문을 보시고 그 신문들을 다 모아두셨다고 들었다. 또 이 분은 이참봉과 달리 군에서 참봉 벼슬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안 받았다고 어머니가 말해준 적이 있다. 그리고 보면 구포 할아버지는 요즘 말하면 졸부 같은 분이어서 동래 사둔 댁에서는 그리 존경을 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 외할아버지의 부친인 담배공장 할아버지는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고 모두 신 한문을 익혔다. 첫째는1900년 의사가 되라며 일본 유학을 보냈는데 의대를 졸업하는 해에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그는 집에 돌아오지 않고 중국으로 가버렸다. 중국 상해에서 개업하여 해방 때까지 온 가족이 독립운동을 하셨다. 둘째 형은 일본에서 공과대학을 나온 발명가로 일본과 모국을 오가며 한량처럼 사셨다고 한다. 셋째인 내 할아버지는 정이 많고 특히 어머니를 따른 아들이었다는데 서울 외가에서 기독교계 경신중학교를 다녔다. 넷째 아들은 동래 고보를 졸업하고 취직해서 열심히 돈을 모아 바이올린을 사더니 바이올린에 미쳐 살았다고 한다. 나중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미국유학까지 가셨는데 이 분은 [행복의 나라]를 쓴 대중 음악가 한대수의 할아버지이시다. 다섯째 아들은 상과를 나와 평생 회계 보는 일을 하셨다.
내 외 할아버지가 구포의 부잣집 맏딸에게 장가를 든 것은 장인이 일본 유학을 보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고 실제 장인이 유학을 보내주었다. 데릴사위로 간 셈인데 계산이 빠른 장인은 영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사위가 점점 못 마땅해졌다. 비싼 유학비를 쓰기보다 사업을 잘 하면 일본 유학생을 몇 명이라도 고용할 수 있는데 무슨 쓸데없는 공부냐면서 사위를 구포로 불러들여 곡물상을 차려주었다. 고지식한 샌님 스타일인 내 할아버지는 장인의 귀국 명령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심기가 뒤틀려서 자기 식대로 친구들에게 돈을 마구 빌려주고 비가와도 곡식을 걷지도 않는 등 열심을 쏟지 않다가 결국 망하고 말았다. 술도 마시지 못하면서 음악을 아주 좋아하여 창을 들으러 기생집에 계속 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말괄량이 같은 구포 할머니는 중매쟁이로부터 신랑감이 두루마기 자락 하나 흩트리지 않고 걷는 참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덜컥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결혼 후 과묵한 남편이 답답해서 늘 가슴을 쳤다. 엄마의 어릴 적 기억에 따르면 구포 할머니는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담배도 피웠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저 멀리서 오면 모두가 담배 연기를 쫓아내느라 법석을 떨었다고 하였다.
혼인 후 답답하게 지내던 차에 구포 할머니는 호주에서 온 젊은 여자 선교사가 묵을 곳이 없다고 좀 묵게 해달라는 부탁에 기꺼이 집을 내주었고 친화력이 뛰어난 할머니와 선교사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호기심이 많은 할머니는 그를 따라 종종 교회에 다니고 성경도 읽으셨다는데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다. 구체적 계기는 큰딸인 내 어머니 아래로 아들이 줄줄이 태어났는데 그 아들들이 모두 서너 살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이어 억장이 무너져 불공 들이는 것을 그만두고 개종을 해버리셨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할머니는 파란 눈의 미혼 선교사 와 사귀면서 여자가 꼭 결혼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여동생을 일본 여의전으로 유학을 보냈다. 여동생(이모할머니)은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언니가 떠밀어 보내니까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유학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충격에 입이 돌아가 버린 이모할머니는 다시 일본을 가지 않고 집에서 쉬다가 그 근처 정미소집으로 시집을 갔다. 어릴 때 기억으로 그 이모 할머니 네는 아주 높은 담벼락에 아름다운 꽃이 황홀하게 핀 대궐 같은 집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관료 쯤이 살던 집이었던 것 같다. 내 할머니는 큰딸인 나의 어머니에게도 개화한 시대를 살라고 일렀다. 할머니는 “너는 한 남자를 섬길 필요 없다. 나라를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고 한다. 말수가 적은 어머니가 내게 이 말을 여러 번 한 것을 보면 이 말은 또한 어머니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었기도 한 것 같다. 어쨌든 이광수 소설의 애독자였던 어머니는 그의 변절에 분노하면서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 채영신처럼 농촌에서 계몽운동을 할 꿈을 키웠다. 어머니는 무의촌에서 의사가 될 생각이셨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신사 참배를 거부한 통에 의대 행이 좌절되었지만 독신으로 어려운 이들을 도우면서 나라를 위해 살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전쟁 말기 미혼여성은 ‘정신대’로 끌려간다는 흉흉한 소문 속에서 1944년 일본 유학 중이던, 마르고 창백해서 오래 살 것 같지 않아 보이던 문학도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다시 구포 할머니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호주 선교사를 보면서 점점 더 인습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게 되면서 남편과 헤어져 살면 좋겠다는 마음을 키워갈 때 – 아직 나혜석 씨도 출현하지 않았던 시대라 할머니에게 헤어진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궁금하지만- 샌님 남편이 드디어 사업을 말아먹었다. 의리가 있는 할머니는 남편이 제대로 살 수 있을 때까지는 같이 살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네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할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이주했다. 그 때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평양에서 공부를 하던 동생의 주선으로 태안양행이라는 선교사들을 위한 백화점에 지배인으로 고용이 된 것인데 사업도 해보았고 영어도 잘 하는 할아버지에게는 최적의 직업이었다. 그렇게 3년 일을 하다가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함께 신학공부를 하자고 제안하셨다고 한다. 기독교계통인 중학교를 다녔고 사업이 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또한 선교사들의 생활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결정을 하게 되신 듯하다. 그래서 부부는 나란히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다. 나중에 신사참배 거부로 퇴학을 당하는 바람에 어머니도 신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할머니는 매일 지각을 하는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이었고, 어머니는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가장 어린 학생이었다고 한다.
구포 할머니의 무용담은 화려하다. 젊을 때는 국채 보상운동을 위해 강연을 다니셨다고 하는데 강연 갈 때는 바느질 솜씨 좋고 신분 의식이 강한 증조할머니가 딸이 무명옷을 입는 것이 못마땅하여 안감을 비단으로 지어 입혔다고 한다. 할머니는 누구든 보면 이름을 부르고 내외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면장이 된 동창을 보고도 크게 이름을 부르고 일이 있으면 어디든 가셨다고 한다. 평양에 있을 때 조선 사람을 무시하는 선교사의 행태에 기분이 상한 할머니는 그에게 “당장 당신 나라로 가라, 사랑하러 왔으면 사랑을 하고 그러지 않으려면 이곳에 있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는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 큰 사위인 내 아버지를 끔찍이 예뻐했지만 어머니에게 잘 못 하면 헤어지라고 난리를 치는 장모였기도 하다. 어릴 적에 할머니를 따라 동래 온천장에 온 냉탕을 하러 자주 갔었는데 할머니는 물을 그냥 틀어놓는 사람을 보면 혼 줄을 내셨다. 길다가 휴지를 버리거나 소변을 보는 남자도 마찬가지로 혼이 났다. 친척들은 말 잘하고 화통한 할머니를 보면서 박순천 씨처럼 국회의원이 돼야 했다는 말들을 종종 했었다. 할머니는 매일 일기를 썼는데 3월 1일에는 3.1절 만세를 부른 이들 이름을 일일이 쓰면서 독립 운동가를 기리고 나라 사랑을 확인하셨다. 어머니는 종종 내게 간이 작은 것을 빼면 내가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백화점 지배인 일을 그만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1941년 즈음이었다. 목사가 된 할아버지는 설교가 아닌 다른 일로 하나님의 나랏일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던 중 “내 자녀들을 돌보라”는 말씀을 듣고 부산부두에 서성거리는 고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웃 사랑(애린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는데 일제 말기 탄압이 심해졌고 경찰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당시 감옥에서 옷고름으로 목을 맬 수 있기에 고름 있는 옷을 못 입게 했다고 하는데, 할머니는 감옥에 갈 생각으로 옷고름이 없는 한복을 입고 다니셨다고 한다. 그런데 순사가 어느 날 가만히 두 분을 불러서 누군가가 고아를 돌 봐야 할 테니 잡아갈 수가 없다면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이 참봉 부친을 설득해서 구포의 산과 논밭을 받아내어서 가족과 고아들이 모두 이주를 하게 된다. 할머니의 부친은 부스럼덩어리이거나 계속 설사를 하는 ‘거지 아이들’을 돌보는 딸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아무도 못 말리는 딸이 땅을 내놓으라고 “마당에서 구르기까지 해서” 달라는 대로 다 주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몇 십 명의 고아와 과부들의 애린 공동체는 열심히 밭을 개간해서 농사를 지었지만 부족한 경비를 따로 마련해야 했다. 기도만 하는 할아버지에 비해 할머니는 생활력이 있어서 아주머니들과 수를 놓은 손수건을 전국의 교회나 친척들에게 보내서 후원금을 받아오게 하였다고 한다. 그 역할은 붙임성 높은 중간 외삼촌의 역할이었다. 할머니는 발이 워낙 넓어서 식량이 다 떨어질 만하면 어디선가 식량이 들어오곤 했다고 한다. 전쟁 말기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숨어 다니던 많은 분이 이 구포의 아지트에 몸을 숨기고 지냈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농장을 운영하고 큰아들에게 목욕탕을 경영하게 해서 공동체의 생활비를 충당했다. 할머니는 더 이상 성격이 맞지 않는 남편과 이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두 분은 동행하는 파트너로서 상호 존중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사셨다. 큰딸인 내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맞지 않는 두 분 사이에서 중재인 역할을 하느라 늘 신경을 썼어야 했지만 말이다.
육이오가 터지고 고아들이 늘어서 할아버지는 부산에서, 할머니는 구포에서 백여 명의 고아들을 돌보아야 했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나는 귀신을 보는 아이, 밤마다 불났다고 소리치는 아이들과 같이 지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꼭 새벽기도에 참여하게 했다. ‘큰방’에 살던 우리에게는 강요하지 않으셔서 철이 들었을 때 물었던 적이 있다. 그랬더니 부모의 사랑을 못 받는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을 하셨다. 말이 적고 인자한 할아버지는 교사나 보모들에게는 매우 무서운 분이지만 절대 아이들을 때리거나 혼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고루 나누어주는 조용한 분이었다. 그러나 성질이 급한 할머니는 아이들이 잘 못 되면 때리기도 하고 혼쭐을 내는 스타일이셨다. 애린원 50주년, 60주년 등 홈커밍 자리에 가서 알게 된 것이지만 인자한 할아버지보다 불같은 할머니의 사랑에 대한 기억들을 간직한 이들이 더 많았다.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 중 하나는 자기 아이와 남의 아이를 차별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당신 아이를 여섯이나 낳았고 원래 좀 약골인 데다 다혈질이어서 병이 많았다. 늘 몸이 쑤신다고 해서 나도 많이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허리를 밟아드리기도 했다. 할머니는 1963년 어느 봄날, 치과에 가서 이를 빼고 목욕을 하고 동네 문상을 다녀온 후 세상을 떠나셨다. 환갑을 갓 넘긴 나이. 내가 중학교 때이다.
3. 상주 할머니
이쯤 해서 나의 친할머니인 상주 할머니가 구포 할머니와 만나게 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상주 할머니 강봉우 님은 양반을 몹시 따지는 재령 강 씨 종손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마을 안에 사는 친척이 별로 없지만 토지는 좀 있는 집안에 시집을 간 할머니는 아들 하나 딸 셋을 낳고 한창 행복했는데 느닷없이 남편을 잃었다. 장티푸스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스물여덟 나이에 홀로 남겨지니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할머니는 매달 돌아오는 제사에 네 명의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할머니에게는 현명한 큰 오빠가 있었는데 한학만이 아니라 주역과 동의보감 등에도 능통한 분으로 인근 환자들을 고쳐주는 명의이기도 했다. 큰 오빠는 영리한 동생이 과부로서 차별을 당하며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고심을 하다가 대구에 가서 목사님을 한 분 모셔왔다. 신문명을 받아들임으로 유교적 가부장제가 과부에게 부여한 질곡에서부터 여동생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세상을 꿰뚫어보는 유학자 오빠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너른 집터 한쪽에 교회를 지었다. 이로서 그 많은 제사를 내려놓게 되었고 그 돈으로 자식 교육을 시킬 수 있게 되었다. 개종한 이후 상주 할머니는 아들을 대구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내고 일본 유학도 보냈다. 큰 딸은 평양의 신학교로 보내고 둘째는 대구 신명여고를 보내는 등 신교육을 시켰다. 흥미롭게도 그 현명한 종손 오라버니는 자기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자식이 너무 많아서였는지 왜 그랬는데 지금도 내게는 궁금한 부분이다. 영리하고 과단성 있는 상주 할머니는 동네 과부들을 다 교회에 다니게 했고 그래서 많은 동료들이 생겼다.
상주 할머니의 큰 딸이자 나의 큰 고모는 나의 어머니와 평양신학교 동창이다. 학교를 졸업한 어머니는 친구 집이자 교회인 상주에 종종 가서 목회를 돕기도 했는데 그때 할머니의 오빠인 집안 어른은 나의 어머니를 보고 ‘하늘을 이고 있는 귀인’이라며 극찬을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시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쌀 한 가마를 가지고 구포를 찾아왔고 그 이후 두 할머니는 사돈이 되셨다. 사돈이 된 두 할머니는 금방 ‘절친’이 되었고,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전통을 무시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사는 동지가 되었다. 상주 할머니가 구포 할머니의 꼬임에 빠져 파마를 하셨던 일로 가족들이 두고두고 놀리던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두 분은 팔도강산 유람도 가셨고, 수영복을 입고 모래찜질도 하셨다. 사실 종갓집 자제로 자란 상주 할머니는 한문으로 된 긴 문자를 자주 쓰셨는데 내게는 그것이 상대가 양반인지 아닌지를 떠보는 게임같이 보였다. 그리고 철이 들었을 때 손주들에게도 무슨 성씨는 상놈이니 혼인을 하면 안 된다며 기억해두라는 식으로 말하셨는데 나는 그런 말이 마음에 거슬렸다. 구포 할머니는 한문을 잘 아는데도 문자 따위는 안 쓰는데 왜 남의 기를 죽이고 사람차별을 하나 싶어서였다. 사실 내게는 곁에서 일상을 공유한 구포 할머니가 할머니이지 상주할머니는 손님이셨는데 불쑥불쑥 드러내는 그분의 고질적 반상의식에 거부감이 났던 것이다. 할머니가 어려운 문자를 자주 쓰시지만 한문으로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나중에 더욱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이는 그냥 생각이 짧은 손녀의 판단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두 할머니의 우정을 모두가 부러워했다는 점일 것이다.
상주 할머니는 부산에 오면 사돈을 따라다니는 처지지만 상주에 가면 그 동네의 해결사이자 여왕이었다. 안동, 상주 지역에는 해방 전후 일본유학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영향으로 많은 청년들이 ‘빨간 물’이 들었고 사상 투쟁과 6. 25 전쟁 전후로 많은 남자들이 죽어갔다. 내 아버지는 당신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사회주의 활동을 했을 것이고, 구포로 장가를 가지 않았다면 학도병으로 끌려가서 벌써 죽었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먹을 것은 없는데 매달 돌아오는 제사로 더욱 힘든 삶을 살던 ‘과부’들에게 상주 할머니는 든든한 구원의 손길이었다. 교회를 다니면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고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만나 상부상조하면서 과부들은 마을에서 기를 펴고 살 수 있었다. 자식 교육에 집중하면서 희망을 갖고 말이다. 상주 할머니는 아픈 이들, 특히 정신이 이상하게 된 이들을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그들을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주고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 고아들과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지낸 구포 할머니와는 달리 상주 할머니는 친척 남자들이 간첩과 빨갱이로 몰려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꼴을 다 봐야 했으며 어처구니없는 좌우대립 와중에 큰 사위와 둘째 딸도 잃었다. 그렇지만 과부들끼리 서로의 자식과 손주들을 보살펴주면서 교회가 달린 상주 집에서 사시다가 답답해지면 동지적 사돈이 있는 부산 아들네 집을 오가면서 상주 할머니는 과부로서의 서러움을 모르고 구순 장수하시고 돌아가셨다.
4. 내가 읽는 할머니들의 시간, 그리고 할머니가 된 나의 시간
나의 두 분 할머니는 광기의 역사 한가운데를 사셨지만 간첩과 귀신들과는 좀 빗겨나 사셨던 것 같다. 좀 다른 초월적 질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특히 구포 할머니는 고아를 돌보면서 비혈연 유토피안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 같다. 어쩌면 두 할머니는 자신이 먼저 간첩이 되기도 하고 귀신이 되기도 하면서 남들을 헷갈리게 하면서 나름 즐겁게 사셨는지도 모르겠다. 구포 할머니 여동생이 집안 길흉을 보려고 점집에 갔을 때 언니 점도 좀 봐달라고 하니까 무당이 언니네 신이 너무 세서 볼 수가 없다고 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구포 할머니는 점쟁이들도 무서워했고 상주 할머니는 자신이 잡귀신을 쫓는 사람이었다. 원래 담이 크고 능력이 있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분들이 그 암울한 시대를 어렵다고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새벽’의 시간으로 먼저 이동함으로써 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분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식민지 상황과 어둠의 질서를 낙후시키며 자신들끼리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할머니’는 권력에서 가장 먼 존재이자, '귀신과 간첩의 시대'를 견디며 살아온 증인이다.”라는 이 전시회의 취지문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력을 너무 집중화 시키고 있는 것 아닌가? 권력은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고 누가 누구에게 주고 또 받으면서 생성 되는 것이다. 내 할머니들은 일제에도, 가부장제에도 권력을 일임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삶의 주인이었고 서로를 돌보면서 ‘권력’을 만들어갔다.
이 두 할머니의 이야기는 근현대 ‘동아시아의 여성의 시간’을 전형적으로 재현하고 있지 않다. 고독한 유령, 한 맺힌 말을 품고 있는 유령의 삶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일 지배세력에 빌붙었던 시간을 재현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은 주어진 역사 안에서 좀 다른 시간대를 살았고 후손에게 기성 질서에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갔다. 그분들은 동트기 전 어둠을 어둡지 않게 살아낸 ‘돌연변이’였던 것 같다. 할머니들이 살았던 백 년 전처럼 어둠이 짙게 깔린 지금,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새벽을 기다리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형성이 아니라 돌연변이에 대한 상상과 변신의 감각이 아닐까? 여전히 현 체제의 본질을 캐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한다면 ‘가장 억울하고 희생된 자’를 찾아내려 하기보다 아주 헷갈려있는 ‘가해자적 피해자들’을 살펴보라고 말하고 싶다. 증오와 적대에 가득 차서 ‘종북’ 주문을 외우는 이들, 구시대 간첩 노이로제에 걸린 ‘할아버지 특공대’들을 소환하고, 돈만 벌면 된다고 믿는 ‘돈 귀신’, 틈만 나면 게임에 빠져드는 ‘청년 귀신’들을 드러내고 치유의 시간을 갖게 해야 하지 않을까?
어둠은 점점 짙어지고 있다. 이 어둠은 새벽을 위한 어둠일까? 우리는 쌍용 자동차 정리 해고 현장에서, ‘4대강 사업’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현장에서, 해군기지가 들어서고 있는 강정에서, 765kV 초고속 송전탑 공사를 강행하는 밀양에서, 세월호 참사로 인한 슬픔과 분노가 짙어지는 지는 현실 앞에 망연자실해 있다. 국가의 이름을 내건 도구적 권력은 종횡무진 질주하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 놓으라고 한다. 영토 분쟁 시대에 형성된 근대국가조직은 현재의 위기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자폐적이고 사악한 조직이 되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국왕의 질서’가 들어설 기미는 안 보인다. 여기서 국가란 현 정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새만금 개발과 해군기지와 초고속 송전탑 건설을 계획하고 결정한 정권과 그것을 막아내지 못하거나 은근히 동조한 야권 등 집중화된 국가 권력의 주체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에 동조한 국민을 포함한다.
1980년대에 ‘위험사회론’을 내놓은 울리히 벡은 최근 서울에서 한 강연에서 지금의 파국적 상황을 ‘해방적 파국’이라 부르면서 거대한 전환, 탈바꿈의 움직임이 글로벌 시민/국민/주민들의 성찰적 학습을 통해 벌써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기후 변화,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 그간에 일어난 참사가 너무나 적나라하게 현실을 보여주고 있고 그것은 일국에 해당된 것이 아니라 글로벌 차원의 문제임을 인식하게 되면서 ‘자멸 중인 근대 이후’의 시간이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성찰적 학습의 현장은 바로 시장과 국가에 의한 강탈이 자행되고 있는 현장들이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성실한 국민들의 과수원과 마을을 가로 질러 초고속 송전탑을 세우려는 공권력의 현장, 여섯 명의 할머니들을 끌어내기 위해 2000명의 경찰을 동원하고 주민들의 목숨을 건 반대투쟁을 비웃는 그런 현장이다. 중앙집권화된 그 권력은 맞붙어 싸우기에는 이미 너무 부패하고 사악해져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정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고 단순한 체제 변혁이 아니라 개인의 근원적 변신이 요구되는 시간대인 것이다. 마치 애벌레가 고치를 쳐서 나비가 되듯 우리의 비약적 성숙이 요구되는 때이다.
사실 ‘고치’를 치기 위해 나는 일전에 학생들과 밀양에 다녀왔다. 몇 세기 전 식민지 제국의 사령관들이 지도를 놓고 금을 그었듯 마을을 가로질러 선을 긋고 초고압 송전탑을 세우고 있는 국가 권력의 민낯이 드러난 밀양. 그 민낯을 드러나게 한 여자들을 만나고 왔다. 고향을 지키겠다는 시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반대투쟁에 앞장선 덕촌 댁 할매, 그 엄한 일제 치하와 전쟁을 겪은 후 “이 전쟁이 제일 큰 전쟁이다”라 말하는 말해 할매, 여군이 되고 싶었다는 탁월한 연설가 영자 총무님, 전원주택을 짓고 꽃밭을 조용히 가꾸다 투사가된 교장 사모님 미현 씨, 일본과 서울에서 공부하는 두 딸을 그리워하며 강아지 록키와 매일 농성천막에 출근했던 귀영 주부, 4남매를 키우랴 친환경 농사 지으랴 분주한 대책위 위원장 댁 은숙씨, 이 분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법’을 어기고 ‘오빠’의 시신을 묻어준 안티고네들이다. 할머니들은 안타까와한다. 자신들은 국가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말해줄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 왜 국가가 들을 줄 모르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한다. 산이 우는 것을 들어서, 그것을 말을 해주려했다는 것이다.
6. 11 행정 대집행 이후 다시 일어나 ‘시즌 2’를 이야기 하는 그 곳에 나는 더 자주 갈 것이다.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 이 할머니들은 손주들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 분들의 삶이 곧 내 삶이고 내 손자의 삶임을 알기에 ‘외부세력’이 아닌 내부세력으로 그분들과 접속할 것이다. 그 곳에서 ‘강정 이후’, ‘밀양 이후’, ‘세월호 이후’를 이야기 하며 탈핵운동을 벌이고 협동조합을 만들고 있는 그분들의 활동에 동참할 것이다. 고통의 시대를 가볍게 살아내신 내 두 분 할머니를 기억하며, 그 분들의 축복 속에, 새벽을 여는 할머니들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동트기 전의 어둠, 외롭지 않은 안티고네"는,
<귀신 간첩 할머니: 근대에 맞서는 근대>(2014)에 실린 조한혜정의 글입니다.
<귀신 간첩 할머니>는 2014년 9월 2일부터 11월 23일까지 SeMA 비엔날레 2014: 귀신 간첩 할머니를 제목으로, 그리고 '아시아'를 화두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전시된 미디어아트 전시였습니다. 예술가이자 영화감독인 박찬경이 예술감독을 맡았고, 17개국 42명(팀)의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했습니다.
도서형식의 <귀신 간첩 할머니>는 2014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의 공동 기획 출판물입니다.
2023년 첫모임을 가진 또 하나의 문화 '노년과 돌봄' 소모임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소모임의 성원들은 각자의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대화와 글쓰기를 이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