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페이스북 친구 한 명을 조용히 삭제했다. 언제 친구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들어 자꾸 그녀의 포스팅이 나에게 노출되었고 그녀가 올리는 사진들은 하나같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불편하다 못해 괴롭기까지 했고 결국은 그녀를 언팔로우할 수밖에 없었다. 직업이 장례지도사 (장례식 업무를 진행하는 사람)인 그녀는 매일같이 장례식장 풍경과 검은 상복차림의 유족들을 포스팅했다. 그녀는 존엄한 죽음을 안내하는 본인의 일상을 공유한 것뿐이고 이는 SNS에 개인 일상, 직업, 취미 등을 포스트 하는 여느 사람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지만 분명 나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죽음은 무겁다. 세상 그 어떤 절망의 나락도 죽음만큼 무겁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 그 단어가 주는 감정은 온통 부정적이다. 죽음은 곧 삶의 유한성,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고 이는 절망, 두려움, 공포, 고통, 좌절, 막연함, 무력함으로 다가온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내 아들의 죽음은 그러했다. 그래서 페이스북 친구가 올리는 장례식 사진 속에 상복을 입은 타인은 어느새 내가 되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경험하고 또 한 번쯤은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해봤을 테지만 죽음을 주제로 대화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음을 화두로 던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난색을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종종 나처럼 자식 잃은 부모들과 소통하며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모두가 회피하고 싶은 그 무거운 죽음이 우리에게는 매일같이 맞이하는 일상이고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귀한 아이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부터 시작된다. 그다음은 아이의 죽음으로 내가 느끼는 슬픔과 절망에 대해서. 그리고는 남은 생에 두려움과 막막함을 함께 공유하고 고민한다. 같은 슬픔을 지닌 사람들이 마음으로 함께 울고 서로를 안아주는 것만으로 큰 위안이 되지만 우리는 온통 부정적인 것 투성이인 죽음 속에서 애써 한줄기 빛을 찾아내기도 한다.
아마 억지로라도 그 유일한 빛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식의 죽음을 통해 찾게 된 그 빛이라 함은 죽음은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생에 끝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삶이 귀하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아이러니하고 어처구니없게도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고 난 후에야 생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별생각 없이 튀어나왔을 인사, 매해 맞이했을 생일, 가족이 둘러앉아 나누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반찬투정과 다툼이 난무하는 식사시간, 한 번은 겪어야 한다는 중2병과 사춘기 등등 아들이 살아있었다면 응당 누렸을 모든 것들이 내게는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로 불리는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발전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죽음이란 종말이 아닌 삶이 의미를 갖도록 완성시켜 주는 현상이다."
죽음을 삶의 일부처럼 받아들이고 의연해질 수 있을까? 지금까지도 그렇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자신은 없다. 그저 죽음의 그 아득함 속에서 한줄기 빛을 따라갈 뿐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완벽한 인생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하지만 완벽한 행복이 없듯이 완벽한 불행도 없다. 내 인생의 즐겁고 행복한 영광의 순간에도 목놓아 부르고픈 한 사람이 있어 애달프겠지만, 자식의 죽음은 살아가는 내내 내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일 테지만 그렇다고 나의 매 순간이 절망이고 남은 내 생이 고통뿐일 리 없다. 나는 베큠을 하다 말고 바닥에 떨어진 아들의 레고 피스를 발견하고는 주저앉아 흐느끼다가 이내 일어나서 청소를 마칠 것이다. SNS에 올라온 우스운 영상을 보며 킥킥거리다가도 고등학생이 된 아들 친구의 늠름한 사진을 보며 그리움에 눈시울이 붉어질 것이다. 어느 날은 삶이 길고 고단 할 테고 또 어느 날은 세월이 쏜살같다며 아쉬워할 것이다. 그렇게 빛을 따라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