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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름

The Summer I Turned Pretty

by 어쩌다애넷맘

올여름, 나와 열다섯 살 딸을 이어주는 끈은 의외로 미국 하이틴 로맨스 드라마였다. The Summer I Turned Pretty. 사실 딸이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예전 같지 않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앞으로 달려와 자잘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다정한 아이였는데, 지금은 방 문이 닫히는 시간이 늘었다. 대화는 짧아지고 표정은 단단해졌다. 때로는 나와의 대화가 벽에 부딪히는 듯해 답답했고, 나는 이 시기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서도 내심 불안해졌다. 딸은 친구와 휴대폰에 더 많은 마음을 쓰고, 나는 점점 멀어지는 아이와 어떻게 다시 다리를 놓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답답함이 커져 상담실 문을 두드린 적이 있을 정도로 사춘기 딸과의 소통은 생각보다 더 낯설고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고 나는 이때다 싶어 그 옆에 앉았다가 멈출 수 없게 된 것이 바로 The Summer I Turned Pretty였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한 소녀가 매년 여름을 보내는 해변가 별장에서 두 형제와 얽히며 성장과 사랑, 우정, 상실을 겪어가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하이틴 로맨스지만, 미국에서는 시즌이 공개될 때마다 SNS에 해시태그가 쏟아지고, 서점에서는 원작 소설이 다시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특히 10대뿐 아니라 30대, 40대 여성들까지 함께 빠져들며 ‘세대 공감 드라마’라는 별칭이 붙었다.


나는 그저 또 하나의 청춘 드라마쯤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화면 앞에 앉아 딸과 나란히 보니 전혀 달랐다. 드라마 속 여름은 첫사랑의 계절이고, 주인공들의 선택은 늘 과장된 듯 보이지만, 그 과장 속에 우리가 지나온 청춘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딸과 나 사이에 닫혀 있던 문이 조금 열리는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장면마다 딸보다 더 크게 탄성을 지르고, 주인공의 대사에 고개를 끄덕였으며, 딸은 나를 향해 이렇게 묻기도 한다. “엄마는 누구 편이야? 누구랑 커플이 되면 좋겠어?” 이런 소소한 대화가 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매주 수요일, 드라마를 함께 보는 일은 어느새 우리 모녀의 작은 의식처럼 되었다. 나는 친구와 점심 약속을 마치고도, 새로운 에피소드가 올라오는 시간에 맞추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온다. 딸 또한 그 시간은 은근히 지켜내려 애쓰는 눈치다. 학원 숙제도 잠시 미뤄두고, 친구와의 약속도 잡지 않고, 그 시간만큼은 거실 소파 한쪽을 비워둔다. 고작 40분 남짓의 짧은 시간이지만, 그 순간만은 하루의 무게가 풀리고 세상 모든 갈등이 잠시 멀어진다. 드라마 속 화면은 단순한 청춘의 장면을 비추지만, 내게는 그보다 더 선명한 장면이 있으니 바로 내 옆에 앉은 딸의 얼굴이다. 웃다가 울다가, 주인공에게 화내다가 설레는 그 아이의 얼굴을 곁눈질하며 나는 매번 안도한다. 사춘기의 굳게 닫힌 문이 여전히 완전히 잠기지는 않았음을, 그 문틈으로 아직 내게 향하는 빛이 스며들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 안도는 얼마 전 내 생일날 더욱 선명해졌다. 딸이 건네준 카드에는 또박또박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엄마, 이번 여름에 엄마랑 드라마 같이 봐서 너무 좋았어.” 그 문장이 가진 무게는 오래 묵힌 내 불안을 단번에 녹여냈다. 무심한 듯 보였던 딸의 마음 안에도 이 시간이 필요했음을, 아이 역시 나만큼이나 이 시간을 기억 속에 새기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울컥했다. 아이와의 관계는 종종 일방적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온 힘을 다해 애써도 아이는 무심하게 흘려보내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한 줄로 나는 깨달았다. 딸도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화면을 보며 나와 함께 시간을 쌓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랑은 반드시 말로 드러나지 않아도, 조용히 쌓이는 무게가 있음을, 그날의 카드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겪는 첫사랑과 갈등, 성장의 순간들은 고스란히 딸의 현재와 맞닿아 있고, 그 곁에서 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만이 아니라 한때 청춘을 지나온 ‘사람’으로서 딸과 나란히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딸이 성장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아프기도 하고 눈부시기도 하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을 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을 함께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딸이 바라보는 화면 속 여름은 허구일지라도, 그 옆에서 우리가 함께 보낸 이 여름은 진짜다.


이제 마지막 세 에피소드만 남았다. 화면 속 이야기는 곧 끝을 향해 가겠지만, 이 드라마는 내게 단순한 하이틴 로맨스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유치하고 뻔한 삼각관계와 예측 가능한 대사들이라 해도, 그 장면마다 딸과 내가 나란히 앉아 웃고 울며 주고받았던 표정과 숨결이 더해지면 전혀 다른 기억이 된다. 오히려 그 뻔함 덕분에 우리는 마음을 덜어내고 같은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단 하루, 딱 그 시간이 되면 세상 모든 소란이 잠시 멀어지고, 오직 우리 둘만이 같은 화면을 바라보며 같은 대사에 웃음을 터뜨리고 같은 장면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 짧은 의식 같은 시간이 우리 모녀를 잠시나마 이어준 것이다. 언젠가 사춘기의 소용돌이가 잦아들고 딸의 마음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으면, 지금의 이 여름을 떠올리며 그녀가 빙그레 웃어주기를 바란다. 그 미소 하나만으로도 나는 오늘의 이 시간이 충분히 오래 남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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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