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디 캔디
원작: 미즈키 쿄코
원화: 이가라시 유미코
일본의 순정만화이자 TV 애니메이션으로 국내에서는 1977년 MBC에서 방영되었다가 1983년 <들장미 소녀 캔디>라는 제목으로 재방영되었다. (아마 나는 이때 처음 TV에서 캔디를 봤고 국민학교 고학년 때 다시 만화책으로 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만화책으로도 여러 버전이 있지만 내가 이번에 운 좋게 손에 넣은 만화책은 바로 1-8권까지로 묶여있는 <캔디 캔디>였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웃으면서 달려보자 푸른들을
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캔디
나 혼자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지만
그럴 땐 얘기를 나누자 거울 속에 나 하고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캔디야
울면은 바보다 캔디 캔디야
- 들장미 소녀 캔디 주제곡
내가 초, 중학교에 다닐 때 우리 반에서 그림 꽤나 그리는 아이들은 순정만화에 나오는 캔디, 안소니, 테리우스 같은 캐릭터를 그려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곤 했었다. 그 친구와 별로 친하지 않아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할 수 없었던 나는 평소에 그림 잘 그리는 그 친구와 좀 더 가깝게 지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캔디 그림을 획득한 친구를 부럽게 바라보곤 했었다. 직접 그려보려고 몇 번 긁적거려 보기도 했지만 영 소질이 없었다.
그 시대에 캔디를 보고 자란 우리 시대 여성들은 마치 고이 간직한 동심처럼 나도 모르게 캔디 증후군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면 바로 이 캔디라는 캐릭터는 누구인가? 캔디는 순정만화 캔디 캔디의 주인공으로 밝고 순수한 성격을 가진 소녀이다. 고아로 자라며 온갖 어려운 환경에 처하지만 항상 특유의 낙천적인 마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사람을 돕는데 물불 가리지 않으며 매우 정의롭고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녀의 밝고 긍정적인 성격 때문에 몇 명의 악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데 특히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캔디를 보고 자란 소녀들이 성인이 되자 90년대 중후반, 2000년대 초반 드라마들은 하나같이 캔디형 여주인공들의 전성기였다. (캔디 보고 자란 그녀들이 작가가 되어 나름 이렇게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암튼 드라마 속 그녀들은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긍정적이고 정의로우며 모든 남자들의 관심을 받지만 결국 그중에서도 가장 멋지고 능력 있는 백마 탄 왕자를 만나 사랑을 이루게 된다는 전개이다. 물론 그녀들은 매우 아름답다. 드라마 초반에 못생김을 가장하기 위해 안경을 씌우거나 뽀글 머리로 등장하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미모를 드러내게 된다는 설정으로 수많은 여성 시청자들에게 "야, 너도 이렇게 될 수 있어." 하는 희망을 안겨주는 듯했다.
암튼 이런 전형적인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자라서인가 마치 세뇌되듯이 내 안 어딘가에도 캔디 증후군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힘들어도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고 슬픔을 참아내는 것이 멋진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망처럼 느껴져 나도 오랜 세월 외로워도 슬퍼도 겉으로 티를 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깐. 이런 생각은 어느 한순간에 의식적으로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절대 울지 않아야지'하고 굳은 다짐을 하면서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자리하는 것이다. 아마도 자라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수도 있고 슬퍼 눈물을 흘렸을 때 부모나 주변으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몰래 눈물 흘리는 캔디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보니 외롭고 슬픈데 안 울고 참아봤자 나만 아프고 서러울 뿐 "너 참 대견하다"며 알아주고 득이 될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캔디처럼 모든 남자들이 나만 바라보며 사랑해 주는 일은 더더욱 없다. 오히려 슬플 때 슬프다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는 사람 주위에 더 많은 사람이 있고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눈부시게 밝고 긍정적인 사람은 분명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다. 하지만 슬픔을 회피하며 억지로 눈물을 삼킨 채 거짓 웃음으로 평생을 버틴다면 언젠가는 엄청난 부작용을 피해 가기 힘들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딸에게 캔디처럼 애쓰며 살 필요 없다고 말해주며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사랑하는 딸아,
외롭고 슬프면 울어도 괜찮단다.
살다 보면 누구나 슬픔을 경험하게 되고 슬픔은 피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느끼고 이겨내야 한다. 이겨내기 위해서는 슬픔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어야 해. 나의 슬픔의 근원을 찾아보고 울고 싶을 때는 실컷 울면서 감정을 표출하고 흘려보내면 한결 가벼워질 거야.
그리고 너를 진심으로 아끼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슬픔을 나눌 줄도 알아야 해. 엄마도 꽤 오랫동안 내 마음을 잘 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슬픔을 나누며 살아가는 게 진짜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슬픔을 견디는 동안에도 너 자신을 위로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을 잊지 말아 줘. 슬픔을 마주하고 이겨내는 법을 배우면서 더 단단해지고 멋진 사람으로 성장할 너를 응원한다.
엄마가 항상 네 곁에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