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이젠 추억이 되어버린.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여수여행을 드디어 다녀왔다.
여행은 시작 전과 후가 분주하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부터 어디서 무얼 하고 어떤 걸 먹을지 대충이라도 찾으면서, 여행짐을 싸곤 한다. 미리 싸둘 수 없는 짐(세면도구, 화장품 등)은 메모를 해두고는 아침에 짐을 챙기는 철두철미한 모습까지 보인다. 최소한의 패키지로만 움직이는 나로서도 번잡스러운 여행 아침의 시작이다. 물론 여행 후에도 짐들을 원래의 자리로 돌리며, 빨래의 허들을 넘는 건 무척이나 귀찮다.
그렇지만, 여행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홀연히 카드 한 장만 가지고 1박 2일 떠났던 여행도 좋았지만, 그 여행이 기차로 시작된다면 무조건 오케이다. 기차여행은 여권이나 비자같이 신경 쓸 부분도 없는 데가 좌석도 널찍하고, 중간중간 걸어 다니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물론 좌석에 앉으면, 절대 일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꼿꼿하게 앉아서 미동도 없이 책을 펼치지만,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의 마음 차이는 지구와 가장 멀리 떨어진 행성 정도의 거리지 않을까.
그런데, 이번 여행은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바로 우리 집의 시클리드들이었다. 우리 집에는 총 3 마리의 시클리드가 있었다. 하양이, 노랑이, 쪼꼬미. 다행히 쪼꼬미는 너무 작은 다람쥐모양으로 제법 커진 하양이와 노랑이의 시선을 끌지 않아 의외로 손을 놓은 막내처럼 자라고 있지만, 노랑이와 하양이의 전쟁은 너무 오래된 것이었다. 노랑이가 더 크던 시절, 지나치게 하양이를 괴롭혔던 자업자득이라지만, 구석에서 세로로 유영하며 죽은 척하는 노랑이가 안쓰러웠다.
어쩌면 각각 다른 어항에 집어넣는 휴전상태 말고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어항을 놓을 수 있는 자리의 플러그가 딱 2개용이라서 플러그가 2개씩 필요한 어항을 2개 놓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언젠가 하나처럼 잘 살길 바라며 각자의 아지트를 지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는데, 나름 스트레스에 강한 노랑이는 맛이 간 눈을 하고 있어도 생각보다 잘 버텨주었다.
문제는 이 아이들이 싸울 때마다 어찌나 격렬한지 튀어 오르기도 한단 사실이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면서 꼼꼼하게 어항 뚜껑까지 닫았으나, 완전 밀폐형은 아니라서 조금걱정이었다. 그래도 아주 작은 틈으로 튀어올라 밖으로 떨어지는 10만 분의 1의 확률은 극히 드문 거겠지라며 마음대로 생각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항 안은 뭔가 고요했다. 배고파서 그러나 싶어 물고기밥을 주자, 하양이와 다람쥐만 나왔다. 워낙에 겁이 많은 노랑이라서 이리 찾고 저리 찾아보았는데 없더랬다. 세로로 죽은 척도 잘하고, 구석진 곳에 카멜레온처럼 몸을 가리기 일쑤여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밥을 주어도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혹시 튀어 오른 건가 싶어서 구석구석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노랑이는 의자 옆에 추락한 상태로 말라있었다.
놀래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10만 분의 1 정도의 확률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어벤저스에서 닥터스트레인지가 인간이 이길 수 있는 가짓수는 단 1개라고 했을 때, 그게 보통 어렵더라도 실패의 의미는 아니란 게 어쩜 사실인지도 모른다.
밖으로, 더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하양이와 살 수 없었던 것일까?
발버둥 치다가 밖으로 떨어지면 항상 그래왔듯, 내가 급하게 옮겨줄 것이라고 믿었던 걸까?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저 세상으로 간 노랑이를 위해 잠시 기도를 하고, 금붕어를 묻어서는 안 된다는 나라의 규정에 의하여 노랑이는 여느 다른 생선처럼 음식물쓰레기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시클리드를 열심히 키우다가 다시 빠이를 해야 한다면, 지금 키우고 있는 녀석들까지만 케어하고 더 이상은 들이지 말아야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생선과 같은 모양을 한 조그마한 물고기였던들, 이렇게 쓰라리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