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소파

사치스러운 하얀색이 소파를 만났다.

by 남배추

미국에 있을 때 크루즈여행을 해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크루즈여행에 도가 튼 친한 언니를 통해,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크루즈를 타고 내 작은 친구와 함께 무척 신나 했던 기억이 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액티비티를 즐기며, 극외향인의 작은 친구는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그중 한 명은 사업을 하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 집과 서로 핸드폰번호를 교환하며, ‘아, 이렇게도 사람을 사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접점이 없던 그녀와 나는 당연히 연락에 소원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그녀가 문자로 만날 수 있는지 묻더랬다. 텍사스에 사는 그녀가 어째서 뉴욕으로 왔는지 궁금하였는데 에르메스 켈리백을 사러 왔단다.


‘오, 켈리백’


우리는 그녀의 요청대로 에르메스샵에서 만났고, 내 인생 처음으로 에르메스 화이트 켈리백 박스를 오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실물의 켈리백은 아름다웠다. 아무나 살 수 없는 켈리백을 예약할 수 있었던 그녀의 구매이력도 대단했겠지만, 무려 만 달러에 가까운 화이트가방을 큰 고민 없이 구매하다니. 나로서는 돈이 있어도 이 만 번을 고민할 것 같은데 그녀는 바로 구입하곤, 우버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약 10분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그 뒤로 우리는 베스트프렌드가 되었다…


라는 일은 절대로 없었고, 그 뒤로 그녀는 나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없었는데, 그날 나의 행색이 너무 초라했던 것인지 아니면 에르메스샵에서 오픈박스 영상을 찍어줘야 했던 그 이상 이하의 존재도 아니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여전히 하얀색 켈리백을 덥석 사던 그녀의 모습은 선명히 남아 있다.


누구는 이처럼 하얀색 켈리백도 비행기를 타고 와서 살 지언정, 나에게 하얀색은 사치 중에 최고의 사치라서 구매가 꺼려진다. 때가 탐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런 내가 <하얀 소파>를 구매했다.

어린 시절 그토록 소유하고 싶었던 소파.

심지어 하얀색을 산 것이다.

물론 때가 잘 타는지 안 타는지, 때가 탔을 때에는 지우기 용이한지 꼼꼼히 확인한 후에 까다롭게 선택했지만, 엉덩이를 자주 비비게 될 소파를 하얀색으로 산 것이다.


‘나, 정말 성공했구나.’ (웃음)


내 인생의 첫 소파는 미국에서 구입한 70달러짜리 검은색이었다. 솔직히 소파 없이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입식생활의 미국에서 소파가 없으면 곤란할 것 같았다.


몇 년 뒤에는 한국으로 귀국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미국집에 어울리는 소파를 비싸게 살 수는 없었다. 어느 집이나 맞는 가구가 있는데, 미국의 집과 한국의 집은 결이 달랐으므로 실용적이고 저렴한 소파를 사자고 결정했다. 최종적으로 침대로 변형이 가능한 이케아 침대소파가 낙찰되었다. 딱딱했다. 어떤 미국인은 다리살이 부러졌다며 악평을 써놓았더랬다. 세탁도 할 수 없는 면이었지만 처음 그 소파가 들어왔을 때부터 우리는 소파에 언제나 옹기종기 붙어 앉았다. 우리 셋이 앉아도 전혀 부러지지 않았다. 뽑기가 잘 된 것일까. 아니면 그 미국인은 분명 거구였으리라.


그렇지만 가격이 가격인지라 여름이 지나면 검은색의 소파가 하얗게 소금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40달러짜리 커버를 두 개나 사서 ‘눈 가리고 아웅’도 해 보았다. 역시 물건은 비싸도 좋은 걸 사서 써야 한다는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왼쪽 아래가 그 문제의 70달러짜리 소파. 3년동안 고마웠어!


사실 진짜 문제는 크기였다. 넓이도 작고, 길이도 길지 않아 한 사람이 겨우 누워있을 수 있었는데, 셋이서 그걸 사용하다 보니 둘은 꼭 소파바닥으로 내려가 좌식생활을 해야 했더랬다. 이런 우여곡절 때문인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소파를 아주 신중히 고르느라 가구 중에 가장 나중에 사게 되었다나 어쨌다나.


처음에는 닦기 편한 가죽을 생각했다. 가죽이 망가지든 말든 물티슈로 쓱 닦아서 쓸 수 있는 기다란 소파. 수 십 번을 앉아 보고, 집안이랑 매치를 시켜보는 상상도 해보고, 사람들의 리뷰도 살펴보던 나는 결국 또 어두운 회색가죽소파를 계약하기에 이르렀다. 찝찝하더랬다. 분명 때에 강할 테고, 물티슈로 닦기도 편하고, 심지어 서비스제품까지 받았건만, 영 개운치가 않아서 주변에 의견을 물어보았다.


“요새 누가 그렇게 어두운 소파를 사냐?”


팔랑귀인 나는 다시 고르고 또 골라서 하얀색 천소파를 골랐다. 하얀색만으로도 사치스러운데 천으로 된 소파이다. 물론 기술이 좋아져 물티슈로 쓱싹 하면 쉽게 닦아진다. 예쁜데 실용성도 있다. 하지만 하얀색이다. 그래도 샀다.


‘나도 이젠 하얀색소파를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었구나’

하얀 소파를 살 수 있는 어른이 된 자신에게 소리 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처음으로 소파가 들어왔을 때, 때라도 탈까 봐 얼마나 애간장이 타던지. 짝사랑도 이런 짝사랑이 없었다. 하늘 아래, 사람보다 중한 물건은 없거늘, 연필자국이라도 날까 봐 소파에서는 공부도 못하게 하고 먹지도 못하게 했다. 물론 지금은 조금 유연해졌지만.(웃음)


이제 다른 꿈이 생겼다.

하얀 소파에 ‘턱’ 하니 앉아서는 떡볶이를 먹어도 아무렇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꿈도 살짝 업그레이드되었다나 어쨌다나.